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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웹진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담벼락을 넘는 일요일

    /ⓒ에디터 윤작가

     

    나는 '월담'이라는 이름을 그저 예쁜 은유쯤으로 생각했다. 담을 넘는다, 라니. 시적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그 이름의 내력을 알고 나면 은유는 사라지고 구체적인 얼굴이 남는다.

    반월시화공단노동조합 월담은 2013, '반월시화공단 노동자 권리찾기 모임'이라는 긴 이름으로 시작했다. 모임이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얻은 건 202110월이다. 8년이 걸렸다. 그 사이 이름은 짧아졌지만 무게는 더 무거워졌다. 담을 넘는다는 건, 공장과 공단 사이에 놓인 담벼락 하나를 넘는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개별 사업장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지역의 노동자들이 함께 서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반월·시화공단은 자동차 부품과 휴대전화 부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다. 전국에서 불법 파견과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하는 곳이기도 하다. 노동자는 많은데 목소리는 작다. 사업장이 작을수록 노조를 만들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월담은 그 작음을 이유로 아무도 지켜주지 않던 자리에 들어가, 5인 미만 사업장 차별 철폐를 외치고, ·하청의 사슬을 공론화하고, 안산과 시흥에 사는 노동자라면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노동권 공부 모임을 꾸려왔다. 임금 협상만 하는 조직이 아니라, 인권이 지켜지는 동네를 만들겠다는 조직이라는 말은 그래서 과장이 아니다.

    /ⓒ에디터 윤작가

     

    -. 일요일에만 열리는 문

    안산역 동측 공영주차장, 월담노조 사무실 안이었다. 그 안에 새로운 문 하나가 생겼다. 안산시흥이주노동자상담소, 2026517일에 문을 연 곳이다.

    안산과 시흥에는 16만 명이 넘는 이주민이 산다. 반월·시화공단은 이들의 노동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구조다. 그런데도 많은 이주노동자는 언어 장벽과 불안정한 비자, 정보 부족 속에서 인권을 침해당한다. 실제로 공단 노동자의 55.74%가 인권 침해를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상담소는 이 숫자를 뒤에 두고 만들어진 공간이다.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월담노조, 이주노조, 경기이주평등연대가 뜻을 모았다.

    이 상담소가 다정한 이유는 문을 여는 시간에 있다. 평일 오후에는 아무도 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만 문을 연다. 그 세 시간 안에 노무사가 임금 체불과 산업재해와 부당해고를 상담하고, 변호사가 민형사상의 어려움을 듣고, 행정사가 체류 자격과 비자 문제를 함께 들여다본다. 홍보물은 14개 언어로 만들어졌다. 서울예대 노학연대모임 '불나비'의 학생들과 지역 시민들이 자원 활동가로 앉아 상담 기록을 돕는다. 거창한 말이 필요 없는 구조다. 그저 문을 열어놓고, 올 수 있는 시간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다리는 것. 다정함도 이렇게 시스템으로 설계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 문 앞에서 새삼 생각했다.

    /ⓒ에디터 윤작가

     

    -. 광장의 손팻말들

    2026517, 상담소 개소식보다 먼저, 광장에서는 집회가 있었다.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 주최한 migrant workers' rally였다.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보장하라, 강제노동을 철폐하라,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마이크를 타고 광장에 퍼졌다.

    각국의 노동자들이 돌아가며 연대사를 했다. 발음은 저마다 달랐지만 문장의 결은 비슷했다. 어떤 이의 손에는 사진이 들려 있었다. 오물이 넘치는 이동식 화장실, 안전 장비없이 일하는 작업환경, 창문도 없는 비닐하우스 기숙사 방 사진이었다. 이동식 화장싱의 오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도 있었다. 손팻말의 문장은 짧았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사업장 변경 자유 보장." 짧아서 오히려 무거운 문장들이었다.

    /ⓒ에디터 윤작가

     

    이 요구가 왜 이렇게 절박한지는, 상담소가 다뤘던 사례 하나를 알면 이해가 빨라진다. 개소식 후 바로 이루어진 첫 상담은 한 캄보디아 노동자가 회사 기숙사로 배달된 법원 서류를 제때 전달받지 못했다. 서류는 한국어로만 쓰여 있었다. 내용을 알 수 없으니 정식 재판을 청구할 기회조차 놓쳤고, 하마터면 강제 출국 위기까지 갈 뻔했다. 상담소는 정식재판 청구권을 되살리는 절차를 도왔다. 월담노조와 상담소는 이 문제를 개인의 불운으로 남겨두지 않고, 대법원 앞 기자회견을 통해 '약식명령서 모국어 번역 의무화'를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광장의 손팻말과 상담소의 서류 한 장은, 알고 보면 같은 싸움의 다른 얼굴이었다.

    /ⓒ에디터 윤작가

     

    -. 담을 넘은 후에

    리본을 당기는 순간의 박수는 크지 않았다. 대단한 세리머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작은 문 너머에 노무사와 변호사와 행정사가 앉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안도감이었을 것이다.

    /ⓒ에디터 윤작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손팻말의 문장들과 숫자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55.74퍼센트, 16만 명, 14개 언어, 일요일 오후 세 시간. 숫자는 차갑지만, 그 뒤에 놓인 얼굴들은 뜨거웠다. 월담(越牆)이라는 이름의 노조는 이제 공장 담벼락뿐 아니라 언어의 담, 제도의 담, 무관심의 담까지 넘으려 하고 있다.

    거리는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갔다. 베트남 식당에서는 여전히 고수 냄새가 났고, 사람들은 각자의 걸음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안산역 동측 공영주차장 한켠, 상담소의 불은 다음 일요일에도 켜질 것이다. 조합원으로, 후원인으로, 통역 서포터즈로 이 담을 함께 넘을 사람이 있다면 그 불은 더 오래 켜져 있을 것이다. 담을 넘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에디터 윤작가

     



     

    월담노조와 이주노동자상담소는 차별의 벽 때문에 움츠러들었던 노동자들이 다시 어깨를 펴고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작은 씨앗입니다. 일요일 오후, 안산역을 지나다 마주치는 이 따뜻한 공간에 여러분의 응원 한 자락을 더해 주시길 바랍니다.

     

    안산시흥 이주노동자 상담소

     

    1. 문턱을 낮춘 일요일상담소

    평일에 시간을 내기 어려운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운영됩니다. 안산역 동측 공영주차장 내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매우 높습니다.

     

    2. 전문가들의 무료 전문 상담소

    단순한 조언을 넘어 실질적인 권리 구제를 위해 전문가들이 직접 나섭니다.

    * 노동 상담: 임금 체불, 산업 재해, 부당 해고 등 (노무사)

    * 생활 법률 상담: ·형사상 법률적 어려움 (변호사)

    * 비자(체류) 상담: 체류 자격 및 비자 문제 (행정사)

     

    3. 다국어 지원 및 자원 활동처

    14개국어로 된 홍보물을 제작하여 이주 커뮤니티에 상담소의 존재를 알리고 있으며, 서울예대 노학연대모임 불나비학생들과 지역 시민들이 자원 활동가로 참여하여 상담 기록과 운영을 돕고 있습니다.

    상담소는 이주노동자가 단순한 노동력이 아닌, 우리 곁의 사람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자 합니다.

     

    /ⓒ에디터 윤작가

     

    함께하는 방법

    1. 조합원 가입공단의 변화를 위해 월담노조의 운영과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습니다.

    2. 후원인 참여월담노조와 상담소가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세요.

    3. 자원 활동언어별 통역 서포터즈나 상담 내역을 관리할 자원 활동가들의 손길이 절실합니다.

     

    상담소 위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중앙대로 462 (안산역 동측 공영주차장 내 월담노조)

    * 상담시간: 매주 일요일 오후 2~ 5

    * 문의전화: 031-491-2460

     

    담벼락을 넘는 일요일

    조회수 32

    2026-07-20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명과 이동의 불편 속에 살아가는 노령 참전 어르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조용한 방 안에서도 멈추지 않는 소리

    귀에서 계속 소리가 납니다.”

    어르신은 창문을 닫고 잠시 말을 멈췄다.

    주변은 조용했다.

    하지만 어르신의 귀에는 조용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진다.

    밤에도,

    식사할 때도,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도.

    젊은 시절 전쟁터에서 들었던 폭음과 긴장 속의 시간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이다.

    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참전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념하고만 있는가.

     

    살아남은 이후의 시간

    전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전장을 떠올린다.

    그러나 전쟁은 총성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

    그 후의 삶으로 이어진다.

    특히 고령의 참전 어르신들에게 남은 것은 훈장보다 더 긴 시간의 신체적 변화일 수 있다.

    청력 저하,

    이명,

    관절 기능 저하,

    보행 어려움,

    만성 통증,

    사회적 고립.

    이 문제는 하나씩 따로 오지 않는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면 외출이 줄고,

    외출이 줄면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되고,

    움직임이 줄면 건강이 더 악화된다.

    이동권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로 연결된다.


     
     

    현장 메모

    병원 한 번 다녀오면 하루가 끝나요

    오전 840.

    한 어르신이 집 문을 나선다.

    천천히 계단 손잡이를 짚는다.

    잠시 멈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숨을 고른다.

    목적지는 병원이다.

    왕복 이동시간 약 세 시간.

    진료 시간은 10분 남짓.

    하지만 어르신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진료가 아니라 이동이다.

    버스 시간 확인.

    승하차.

    대기.

    귀가.

    하루 일정 대부분이 이동에 쓰인다.

    그리고 다음 예약을 고민한다.

    몸이 힘든 것도 힘든데 자꾸 밖에 나가기 어렵게 돼요.”

    그 말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점점 좁아지는 생활반경을 의미했다.

     

    오전 1017, 1117

    복지기관 셔틀을 기다리는 어르신.

    오늘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요.”

    그 말 속에는 이동의 피로뿐 아니라 생활의 축소가 담겨 있었다.

     

    복지는 있는데 닿지 않는 사람들

    현재 다양한 복지서비스가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 이용률과 체감은 다르다.

    왜일까.

    첫째, 정보 접근의 어려움

    둘째, 신청 과정의 복잡성

    셋째, 이동의 부담

    넷째, 도움 요청에 대한 심리적 부담

    특히 고령층은 디지털 환경 변화 속에서 더욱 멀어진다.

    앱 예약,

    온라인 신청,

    전자 안내.

    제도가 있어도 닿지 못하면 복지가 아니다.

     

    지역 복지 관계자가 말하는 현장의 과제

    Q. 가장 필요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A. 서비스 확대보다 전달 방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복지가 아니라 찾아가는 복지가 되어야 합니다.

     

    Q.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인가요.

    A. 이동지원, 동행지원, 통합 안내, 방문 상담입니다.

    특히 고령 보훈대상자는 건강·복지·교통이 함께 연결되어야 합니다.

     

    공익적 해결은 가능한가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시도되고 있다.

    문제는 규모와 지속성이다.

     

    다음과 같은 접근이 필요하다.

    찾아가는 보훈·복지 통합서비스

    한 번 방문으로

    건강 상담

    복지 안내

    생활 지원

    이동 상담까지 함께 연결.

    이동권 지원 확대

    병원 동행 서비스

    생활 이동 차량

    예약 지원

    근거리 순환 이동체계 구축

    청각 건강 관리 체계

    정기 청력 확인

    이명 상담

    생활 적응 교육

    보청기·보조기기 접근 개선

    지역 안전망 구축

    통장

    주민

    복지관

    자원봉사

    병원을 연결하는 공동체 네트워크.

     

    우리 동네가 실천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보훈 어르신 이동 동행단 운영

    세대공감 방문 인터뷰

    디지털 안내 지원

    건강·복지 통합상담

    생활 불편 신고 창구 확대

     

    전쟁은 끝났지만 공동체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긴 시간을 견디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질문받고 있다.

    그분들이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무엇을 준비했는가.

    보훈은 기억의 의식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이동할 수 있는 권리.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권리.

    그 권리가 보장될 때,

    비로소 감사는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때,

    보훈은 과거를 기념하는 일이 아니게 된다.

    현재를 책임지는 일이다.

    현충일 추모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364일도 중요하다.

    몸이 불편한 어르신이 병원을 갈 수 있는지,

    혼자 생활하지 않는지,

    필요한 정보를 받을 수 있는지.

    그 질문이 보훈의 시작일 수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럭비공

    조회수 170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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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헌국회 개원식 일동 념사진(출처_위키백과)

     

    다시 쉬는 날이 된 717

    717일 제헌절은 헌법이 제정된 1948년 이듬해부터 국경일공휴일이었다. 국경일(國慶日)은 나라의 경사를 기념하는 날이니 헌법을 제정한 날이 빠질 수 없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1949101일 제정되었다. 31,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을 국경일로 삼았다. 2005년에 한글날이 추가되었다. 5일제 도입으로 2008년부터 제헌절과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가 올해부터 둘 다 다시 공휴일이다.

    공휴일(公休日)은 국가에서 정하여 쉬는 날이다. 특별하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니 각자가 원하는 대로 쉬면 된다. 설날이나 추석은 전통적으로 하는 의례가 있지만, 제헌절은 그렇지 않다. 어린이날엔 어린이를 위해 뭔가를 하면 좋지만, 그렇다고 그날만 어린이를 존중하고 아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버이날이 공휴일이 아니라고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공휴일로 정하는 일은 꼭 그날만이 아니라 늘 함께 그날의 의미를 새기자는 뜻이다. 제헌절에 함께 쉼’(共休) 역시 평소에도 헌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실천하자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1948531일 오후, 중앙청 홀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

    오전 제1차본회의에서 초대 국회의장으로 피선된 이승만이 개원사를 낭독하고 있다(출처_위키백과)

     

    제헌절이 다시 공휴일이 되기까지 헌법의 눈으로 보면

    먼저 제헌절이 다시 공휴일이 되는 과정부터 헌법 관점에서 살피자. ‘공휴일에 관한 법률은 국경일법과 달리 202177일에서야 제정되었다. 그 이전에 공휴일의 법적 근거는 법률이 아니라 194964일 제정된 이래 개정되었던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으로서 대통령령이다. 엄밀하게는 모든 시민이 함께 쉬는 게 아니라 관공서가 쉬는 것이다. 입법권은 국회에 속하고(헌법 제40),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 사항을 정할 수 있다(헌법 제75). 헌법 제정 이후 한참 동안 공휴일제도는 헌법에 부합하지 않았다. 공휴일인 제헌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헌법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까닭이다.

     

    헌법은 시민의 법이다

    대개의 법령은 시민의 생활을 규율 대상으로 한다. , 시민은 법령을 준수해야 한다. 헌법은 다르다. 거의 모든 헌법 규정은 시민에게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에 의무를 지우는 내용이다. 국민의 기본 의무인 납세의 의무나 국방의 의무조차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라는 헌법적 제한에 따라, 시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 부과가 전근대적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법치주의에 따라 통제한다. 헌법은 제정 주체도 법률과는 다르다. 법률은 국회에서 제정한다(헌법 제53조 참조). 헌법은 대한 국민이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헌법전문, 헌법 제130조 제2). 헌법은 명실공히 국민의 법이고 시민의 법이다.

     

    국민은 주권자로서(헌법 제1조 제2) 하나의 의사를 가진 통일체이다. 시민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을 의미한다. 기본권의 주체인 모든 국민은 시민을 말한다. 어찌 보면 모순이다. 시민의 생각은 다 다른데, 그 의사를 하나로 모아 하나의 국가 의사로 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순적인 시민과 국민을 이어주는 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직업 정치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이고, 직업 정치인의 정치는 시민의 정치 활동을 전제로 한다. 시민의 참정권을 비롯하여 탄핵 제도는 다양한 헌법 제도는 시민의 대표를 시민이 통제하는 장치다. 국민은 개헌을 통해 민주주의 제도를 얼마든지 새로이 창설할 수 있다.

    시민은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누리면서 공적인 이익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존재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시민이라는 말은 시민의 공공적 성격을 강조하려고 민주를 덧붙인 것이다. 정치를 정치인에게만 맡겼더니 모든 시민의 권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서 직접 민주제 또는 협치’(거버넌스)를 통해 시민의 직접 결정 또는 참여가 필요하게 되었다.

     

    함께 쉬어야 함께 결정할 수 있다

    서구의 근대 입헌주의에서 피선거권은 물론 선거권도 돈 없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먹고 사는 문제로 골몰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만 돌볼 뿐 함께 살아가는 공적 문제를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오늘날 레저(leisure)는 취미 생활에 한정되는 느낌의 용어지만, 넓은 의미의 은 생계 외에 사적 활동과 함께 공적 활동을 보장하는 전제 조건이다. 혼자 쉬지 않고 함께 쉬어야 함께 결정해야 할 일을 상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호 유진오-제헌헌법 초고 (출처_국가기록원)

     

    제헌헌법이 품은 공익의 정신

    제헌헌법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라는 제5조가 눈에 띈다. 공공복리(公共福利)는 지금 헌법 제37조 제2항에도 등장한다. 공휴일(公休日)에 함께 쉰다는 공휴(共休) 의미가 담긴 것처럼 공공’(公共)은 국민의 삶과 시민의 삶이 결합한 개념이다. 공공복리는 사회 전체로서 공익(公益)과 공동의 이익으로서 공익(共益)을 함께 말한다.

    제헌헌법은 위의 제5조 외에도 전문(前文)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문구는 현재 헌법의 전문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제헌헌법 이래 대한민국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는 자유주의적 또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 그리고 문화적 민주주의까지 포괄한다. 제헌헌법의 기초자인 유진오는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가 제헌헌법의 기본이념이라고 말한다. 과거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 즉 각인의 자유를 정치적으로 확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도 각인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인의 자유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다.

     

    자유방임주의 체제에서는 우승열패(優勝劣敗)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약자는 도리어 자유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 것이다.

    - 유진오, 제헌헌법의 기초자

     

    제헌헌법 제5조는 제84조로 이어진다. , 대한민국의 경제질서가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시민들이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해야 함께 쉼이 가능해지고 거기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활성화한다. 시민들이 연대하여 공공의 복리를 보장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그것을 위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소수자 또는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앞장선다.

     

    경기도 조례와 공익활동 헌법 정신의 구체화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로고
     

    경기도에는 경기도 시민사회 활성화와 공익 활동 증진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어 있다. 그 목적은 경기도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공익 활동을 증진함으로써 경기도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조례 제1).

     

    시민사회는 시민, 법인 또는 단체 등 공익 활동을 하는 주체와 공익 활동의 영역이다(조례 제2조 제2). 공익 활동은 시민, 법인 또는 단체 등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공익성이 있는 활동으로 영리 또는 친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활동이다(조례 제2조 제4). 이때 시민은 지방자치단체의 구역 안에 주소를 가진 사람이어서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등록한 외국인도 포함한다(조례 제2조 제1).

     

    위 조례의 기본 원칙은 각 주체가 상호 간의 다양성, 자발성 및 창조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조례 제3조 제1). 헌법이 지향하는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정신의 구체화다.

     

    공화국은 군주가 통치하지 않는 국가의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들이 함께 결정하는 정치 체제다. 모든 시민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모든 영역에서 동등해야 하므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 또는 계층이 우위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는 체제다.

    국민 또는 시민은 주권과 기본적 인권의 주체로서 국가의 명령에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신민(臣民)이 절대 아니다. 헌법은 인권의 주체 자격에서 국적을 따지지 않고 외국인에게도 인권을 보장한다.

     

    헌법의 민주공화국은 지금의 현실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실천해야 하는 과제 개념이다. 조례가 제시한 다양성, 자발성, 창조성은 시민으로서의 실천 목표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 인권의 관계는 일차적으로는 시민과 국가의 관계다. 모든 국민, 즉 시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10조 제1).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제1).

    헌법에서 시민과 시민의 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민주공화국은 시민의 자발성과 창조성에 의존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새로운 공화주의에서는 국가의 공적(公的) 영역에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동(共同) 결정을 강화한다. 위의 조례에서 시민사회활성화위원회(조례 제7)와 경기도 공익활동지원센터(조례 제15)를 설치한 맥락이다. 위원회와 센터는 시민의 의사와 참여 그리고 활동을 매개한다. 이들 조직은 기존의 선출직 공직자 또는 일반공무원과 나란히 시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중간 조직으로서 공공적 민주 정치를 확장한다.

     

    민주공화국은 시민들을 나누지 않는다

    사실 시민들의 이해관계는 다르다. 때로는 상충한다. 그렇지만 시민들의 이해관계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은 시민들의 이해관계가 제로섬 게임 상태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반면, 권위주의 통치 체제는 오히려 시민들을 분리하여 통치(divide & rule)한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내국인과 외국인 등을 구별한다.

    민주공화국은 서로 다른 집단 사이에 반목이 생기지 않도록 제3의 길을 찾거나 조정과 타협을 끌어내려 한다. 시민들 사이 이해 충돌이 생길 때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일은 민주공화국의 공직자, 정치인, 시민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헌법은 시민이 직점 써 나가는 혁신의 법이다.

    이미지 제안] 시민들이 함께 토론하거나 집회하는 현장 사진

    헌법은 종이 위에 글자로 쓰인 법전이 아니다. 헌법은 시민이 매일매일 직접 써나가는 혁신의 법이다. 헌법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활짝 열려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고민은 누가 집권하도록 선택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민주시민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 삶만 돌보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스러운 삶에 무관심 하다거나 사회의 부정의에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 가면서도 동료 시민과 함께 끊임없이 말하며 곁에 설 수 있는 사람이다.

     

    개헌은 조문 수정이 아니라 시민의 실천이다

    우리는 제헌 78주년을 지나면서 제헌헌법을 계승하면서도 핵의 위험과 기후 위기의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하는 헌법적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제헌헌법은 최초의 헌법인 점에서 헌법을 제정한 후에 그것을 구체화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순서를 밟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의 개헌은 단순히 헌법 조문을 수정하는 일이 아니다. 시민들의 실천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국회의 법률로써 해결하려 노력하고, 그것만으로 해소할 수 없는 문제를 찾아 국민적 합의를 거쳐 헌법에 담아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헌 문제는 시민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바꾸지 않는 추상적인 수사(修辭)에 머물거나 시민의 삶과 동떨어진 국가 조직의 변경 사안에만 골몰하게 된다.

    시민의 민주주의적 결정은 의회를 통한 방법 외에도 때로는 유권자 범주를 넘어서는 시민들의 직접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또는 지역에 터 잡은 주민들의 직간접적 의사결정을 통해 다양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의사결정 구조의 재배치야말로 헌법적으로 결정할 사항이다.

     

    정치인이 개헌을 말할 때, 시민이 물어야 할 것들

    제헌의 주체가 국민 또는 시민이므로 개헌의 주체 또는 국민 또는 시민이다. 제헌절이 공휴일인 의미는 717일 하루의 휴일에 머물지 않는다. 공휴일이 된 제헌절은 민주시민이 함께 인간다운 삶과 쉼을 누리고 민주 공화주의의 정치를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늘 고민해야 하는 출발점이 되는 날이다.

    누군가 87년 헌법이 문제라고 말한다면, 그 헌법 탓에 국회에서 입법하지 못한 법률이 무엇이 있냐고 되물어야 한다. 특히 정치인이 헌법을 고치자고 말한다면, 다음을 따져 물어야 한다.

    · 그것이 나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는 일인지,

    · 그걸 위해 어떤 입법 활동을 했는지,

    · 개헌 이후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 목표하는 바를 성취할 것인지

    다양한 시민들의 의사를 결집한 국민의 의사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누가 대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곁의 사람들과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묻고 살피며 돌보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온다.

     

    내가 곧 헌법이 된다

    인간다운 존엄한 삶을 살 권리의 주체는 각자 시민으로서 다 다르지만,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 다를 수 있지만,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어야 나의 인간다운 삶이 전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 민주시민으로서 공익을 생각한다고 함은 내가 가장 마지막에 권리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자리에 서는 일이다. 내가 존엄한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완전무결한 사회가 아니다.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모든 사람이 존엄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는 아니다. 우리는 늘 국가 또는 사회의 부정의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때 내가 부정의에 대해 항의하고 소수자 또는 약자 편에 설 때, 내가 그리고 우리가 곧 헌법이 된다.

     

    제헌절, 우리 시대의 '제헌'을 시작하는 날

    1948년 헌법 제정 이후 78년이 지나는 시점임에도 우리는 1945년 해방 이전과 해방 직후 또한 한국전쟁과 권위주의 시대에 있었던 부정의의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더욱이 기후 위기와 같은 지구 차원의 문제 역시 풀어야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헌법의 밑바탕에 인권, 민주주의, 시민, 공익, 지방자치 등의 기초를 다지면서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그래야 공휴일(公休日)이 된 제헌절이 공존과 공생을 위한 시작일이 되어 우리는 우리 시대 제헌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공휴일이 된 제헌절
    아주대학교 법학과 오동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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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29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아파트는 어떻게 마을이 될 수 있었을까?

     

    30여 년 전인 1990년대 후반부터 시민사회에서는 아파트를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생활 공동체'로 바라보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특히 1998년 한 시민단체가 아파트공동체연구소를 설립해 아파트 분쟁 중재, 임대아파트 주민 권리 확대, 주민자치조직 활성화, 공동체 프로그램 개발 등에 나서며 이웃 간 단절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모델을 모색했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관리와 소유의 대상일 뿐 '마을'로 인식되지 않았지만, 시민사회는 꾸준히 아파트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기해 왔다.

     

    특히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임차인이라는 이유로 관리비 내역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고, 입주자대표회의와 같은 주민자치조직을 구성할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와 주민들의 노력 끝에 2000년 1월 임대주택법이 개정되면서 임차인대표회의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관리규약의 제·개정, 관리비 운영, 공용시설 유지·보수 등에 대해 임대사업자와 협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위스테이별내

    경기도 남양주에 조성된 국내 최초의 협동조합형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으로, 현재 491세대 약 1,400명의 주민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단순한 아파트를 넘어 주민들이 직접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하는 ‘마을형 주거 모델’을 실현하며 주목받아 왔다.

    단지 내에는 6개의 협동조합과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운영되고 있으며, 30여 개 동아리에서 300여 명의 주민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의 재능과 시간을 나누는 활동화폐 ‘별’을 운영하며 공동체 경제를 실험하고 있다.

    위스테이별내는 공동육아와 돌봄, 주민자치와 사회적경제가 어우러진 새로운 주거 공동체 모델로 평가받으며 한국 사회의 대안적 주거 문화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6월 8일, 서울 명동의 커뮤니티 공간 '동네마실'에서 열린 『아파트는 어떻게 마을이 되었나』 북토크 현장을 찾으며 자연스럽게 30여 년 전 아파트 공동체를 꿈꾸던 사람들의 고민이 떠올랐다. 그들이 상상했던 공동체의 모습이 오늘날 위스테이별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당시의 문제의식과 실천들이 20여 년의 시간을 거쳐 협동조합형 주거 모델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위스테이별내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주거 실험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져 온 아파트 공동체 운동과 주민자치의 흐름 위에서 탄생한 결과물처럼 보였다. 과연 위스테이별내 주민들과 협동조합은 어떻게 아파트를 공동체로, 마을로 만들어 왔을까?

     

    "8년 임대 아파트인데 의무 임대 종료 기간이 28년까지 2년 정도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조합이 만들어지고 입주하기 전까지 약 3년, 그리고 입주해서 지금까지 약 6년. 그 9년의 시간 동안 아파트 곳곳에서 마을을 만들며 살아왔습니다. 그 기억과 기록들을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협동조합형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인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이 그간의 공동체 활동을 기록한 단행본 『아파트는 어떻게 마을이 되었나』 출간을 기념하는 북토크의 시작이다.

    이날 사회를 맡은 이상우 상임이사는 "이 자리는 엄숙한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왔는지 편하게 대화하며 나누는 축제"라며 행사의 문을 열었다.

     

     

    이날 행사는 단순한 출판 기념회를 넘어, 수직적이고 단절된 공간으로 여겨지던 아파트가 어떻게 수평적이고 연결된 '마을'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자리였다. 40여 명의 주민 작가들이 직접 써 내려간 360페이지 분량의 생생한 기록은, 주거 불안 시대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공동체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절박함과 자부심이 빚어낸 10년의 기록

     

    위스테이별내 사회적협동조합 김경환 이사장은 환영사를 통해 책을 출간하게 된 두 가지 이유를 밝혔다.

    첫째는 '절박함'이었다.

    "우리는 의무 임대 기간 8년 종료를 2년 정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많은 성과를 내고 수직적 구조의 아파트에서도 수평적 마을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음에도, 이런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있었습니다. 이런 아파트를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둘째는 '자부심'과 '책임감'이었다.

    김 이사장은 "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협동조합 공동체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많은 시행착오와 모범 사례를 갖고 있다"며, "이 사회적 자산을 묻혀두기 아까워 또 다른 위스테이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지침서이자 매뉴얼로 이 책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책은 기획부터 원고 작성, 편집까지 모든 과정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491세대 1,400여 명의 주민 중 300여명이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로 참여하고 있으며, 그중 40여 명이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냈다.

     


     

    변호사에서 주거 혁신가로, 양동수 대표가 말하는 '시작’

     

     

    이날 북토크의 첫 번째 토크 세션 '시작의 이야기'에는 위스테이 모델을 설계한 사회혁신기업 '더함'의 양동수 대표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로펌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한국 사회의 가장 구조적인 문제인 금융과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겠다는 절박함에서 이 사업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난민, 이주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돕다 보니, 한국 사회가 점점 각자도생의 사회로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 전체가 점점 더 어려워지겠구나 싶었죠. 해외 사례를 보니 공동체 토지 신탁(CLT) 같은 좋은 제도가 많았지만 한국 법체계에서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임대주택 관련 법이 바뀌는 것을 보고, 일반 건설사가 아닌 사회적 경제 주체가 관여하면 훨씬 좋은 방안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양 대표는 위스테이별내 부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당시엔 허허벌판이었지만 뒤로 보이는 불암산과 청명한 날씨가 너무 좋았습니다. 여기서 뭔가를 하면 정말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그는 이후 국토부, LH와 협의하며 사회적 협동조합 방식, 지분 구조 설계, 커뮤니티 공간 확보 등 위스테이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형제 아파트의 연대, 그리고 주거 중립성의 실현

     

    이날 자리에는 위스테이별내의 '형제 아파트'라 불리는 고양시 위스테이지축 사회적협동조합의 전승욱 이사장도 참석해 축하를 전했다. 전 이사장은 "별내가 2년 먼저 시작하며 겪은 어려움과 시행착오, 이를 풀어가는 방법들이 책에 잘 정리되어 있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며, "집이 돈이 아니라 삶을 지켜주는 공간이자 이웃과 연결되는 플랫폼으로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행사의 깊이를 더한 것은 주거중립성연구소 '수처작주(隨處作住)'의 최경호 소장의 미니 강연이었다. 최 소장은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주거 문제, 특히 청년 세대의 '임대 세대화' 현상을 지적하며 위스테이 모델의 사회적 의미를 짚었다. 그는 현재 한국 사회의 주거 사다리가 끊어진 상황에서, 임대와 자가 사이의 이분법을 깨는 '주거 중립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30년, 40년을 저축해도 살 수 없는 집값을 빚내서 사게 하는 구조는 결국 다음 세대의 진입 장벽만 높일 뿐입니다. 임대와 자가 사이에 큰 구분이 없는 상황, 즉 '주거 중립성'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협동조합을 통해 간접 소유하면서도 임대차 관계를 맺는 위스테이가 바로 그 대안적 영역입니다."

    "협동조합을 통해 간접 소유하면서도 임대차 관계를 맺는 위스테이는 소유이면서도 소유가 아니고, 임대인이면서도 임대가 아닌 제3의 영역입니다. 이런 모델이 많아져야 임대로 살든 자가로 살든 큰 차이가 없는 사회가 됩니다. 또한, 위스테이처럼 다양한 평형이 섞여 있어야 노후에도 평생 살던 동네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이사하며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가 가능해집니다.”

     

    최 소장은 특히 '커뮤니티 시행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건축물만 짓는 시행사가 아니라, 갈등을 조율하고 공동체를 활성화할 수 있는 마을 활동가와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위스테이별내가 보여준 9년의 기록은 바로 그 커뮤니티 시행의 성공적인 사례입니다.”라며 위스테이별내가 커뮤니티 공간을 단지 외부와 나누고, 다양한 평형을 섞어 세대 간, 계층 간 어울림을 만들어낸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는 아파트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지역 사회와 호흡하는 진정한 의미의 마을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파트, 다시 마을을 꿈꾸다

     

    북토크 현장은 주민 작가들이 자신들의 얼굴이 새겨진 도장을 찍어주며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는 따뜻한 풍경으로 가득 찼다.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등 다양한 주거 공동체 관계자들도 참석해 연대의 뜻을 밝혔다.

     

    행사를 진행한 이상우 상임이사는 "위스테이별내의 아파트 공동체가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만의 섬으로 고립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청년과 시니어가 함께 어우러지고, 지역 사회와 소통하며 계속해서 흐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때로는 서툴고 때로는 치열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그 속에는 내 집을 넘어서 우리 마을을 고민했던 진심이 녹아 있습니다."

     

    김경환 이사장의 말처럼, 『아파트는 어떻게 마을이 되었나』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이웃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콘크리트 숲 속에서도 온기 넘치는 마을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다.

     

    의무 임대 기간 종료라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위스테이별내 주민들은 여전히 함께 밥을 먹고, 신문을 만들고, 책을 펴내며 마을을 가꾸고 있다. 이들의 치열하고도 따뜻한 기록이 앞으로 대한민국 주거 문화에 어떤 변화의 씨앗을 틔울지 기대해 본다.

     

    『아파트는 어떻게 마을이 되었나』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이웃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콘크리트 숲 속에서도 온기 넘치는 마을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다. 의무 임대 기간 종료라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위스테이별내 주민들은 여전히 함께 밥을 먹고, 신문을 만들고, 책을 펴내며 마을을 가꾸고 있다. 이들의 치열하고도 따뜻한 기록이 대한민국 주거 문화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파트는 어떻게 마을이 되었나: 위스테이별내 북토크 현장을 가다
    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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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26
  •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행사 포스터)

     

    안산(安山). 사람들은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안 산다, 안 산다' 하면서도 결국 사는 곳이 안산이라고.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뭔가 씁쓸한 진실이 담겨 있다. 집값이 싸서, 공장이 가까워서, 달리 갈 데가 없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모여든 사람들이 만든 도시. 그러나 나는 이 이름을 다르게 읽고 싶다. 안전하게(安全하게) 산다. 안전하게 살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의 도시. 그것이 안산이어야 한다, 그래서 59일의 행진은 말하고 있었다.

     

    (행사 진행 요원)

    오후 세 시, 두 갈래의 물줄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원고 앞 원고잔 공원 입구에서 한 줄기가, 중앙동 월드코아 광장에서 또 한 줄기. 바람이 조금 불었지만, 따뜻한 봄볕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깃발을 들고 있었다. 깃발이란 원래 선언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내가 이것을 원한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행진 전)
     
     
    (안전도시에 산다 깃발)                                                   (선두에 선 라퍼커션)
     

    라퍼커션의 드럼 소리가 먼저였다. 타악기의 진동은 공기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팍을 두드리고,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무릎을 움직이게 한다. 사람들이 걸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이윽고 자연스럽게, 마침내는 즐겁게. 선두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배치가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먼저 안전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 한마디 없이 그 줄 세움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뒤로 시민들이 이어졌고, 후미에는 노동자들이 든든하게 받쳤다. 안산시청 앞에서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그것은 이미 강이었다.

     
     
    (행진)
     

    나는 깃발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손으로 만든 깃발, 글씨를 써넣은 깃발, 그림을 그려 넣은 깃발. 깃발 컨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은 일동 지역아동센터가 만든 '우산 깃발'이었다. 우산. 비바람으로부터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그 단순하고 완벽한 상징. 어른들이 수십 장의 기획안과 정책 문서로 표현하려 했던 것을 우산 하나로 해냈다.

     
    (우산 깃발)
     

    안전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비가 올 때 곁에 우산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혼자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것. 산업단지에서 일하다 다친 이주노동자에게 말이 통하는 안내가 있다는 것. 노후 건물에 혼자 사는 노인에게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다는 것. 장애인이 휠체어를 밀며 이 도시의 어느 골목이든 막힘없이 갈 수 있다는 것. 이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걸었다.

     
     
    (몸 깃발)
     

    며칠 전, 조용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일이 있었다. 생명안전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꼭 12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12. 그 긴 시간 동안 유가족들은 거리에 섰고, 시민들은 광장에 모였고, 활동가들은 국회 앞에서 밤을 지새웠다. 법이란 선언이다. 이제 안전은 국가가 베푸는 혜택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할 권리라고 이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늦었다. 그러나 왔다. 그리고 온 것들은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시청 앞)
     

    안산은 희생자 250명이 학교에 다녔고, 골목에서 뛰어놀았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안산은 세월호의 도시였다. 슬픔의 도시, 기억의 도시. 그러나 안산 시민들은 슬픔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물었다. "세월호 이후 안산은 정말 안전해졌는가." 기억이 기억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고. 질문은 행동이 되었고, 행동은 130개의 지역 주체가 모인 시민추진위원회가 되었다. '304개의 노란 테이블' 시민대토론회가 되었고, 마침내 다섯 가지의 구체적인 정책 제안이 되었다. 이제 안산은 세월호의 도시가 아니라, 안전의 도시로 거듭나려 한다. 슬픔을 동력 삼아, 변화를 향해.

     
     
    (광장)
     
    (살판 식전 공연)
     

    안산문화광장 물의광장. 시장 후보들이 나란히 섰다. 더불어 민주당 천영미 후보, 국민의힘 이민근 후보, 조국혁신당 조안호 후보, 진보당 홍연아 후보. 서로 다른 정당,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섰다. 이주민 대표가 앞으로 나왔다. 언어가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이 도시에서 일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똑같이 안전해야 한다고. 장애인 대표가 나왔다. 도시의 턱을 없애달라고, 경사로와 점자블록이 방치되지 않는 도시를 만들어달라고. 노동자 대표가 나왔다. 산업단지에서 매년 반복되는 사고를, 더 이상 개인의 불운으로 처리하지 말아달라고. 시민 대표가 나왔다. 이 모든 요구가 선거철 공약이 아니라, 임기 내내 지켜야 할 약속이 되어달라고.


    (시장후보)
     

    다섯 가지였다.

    1. 도시 비전 및 행정계획 수립: 4.16 정신을 계승한 중장기 안전 전략 마련

    2. 시민안전센터설치: 시민과 소통하며 일상 속 안전 교육을 전담할 기구 마련

    3. 안전투자 적극 확대: 재난관리기금 조성 비율 상향 및 안전 인프라 예산 증액

    4. 안전영향평가제도화: 취약계층의 관점에서 정책의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점검

    5. 전담 행정조직 확대: 분산된 안전 부서를 통합하고 민관 협력 거버넌스 내실화

     

    생명·안전 가치를 담은 도시 비전 및 행정계획 수립. 시민안전센터 설치. 안전 예산과 재난관리기금의 적극적 확대. 안전영향평가 제도화. 생명·안전 전담 행정조직 확대와 민관협력 거버넌스 강화. 어렵지 않은 말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실제 예산이 되고, 조례가 되고, 담당 부서가 생기고, 취약계층의 목소리가 정책 설계 단계부터 반영되는 일은, 누군가 끊임없이 요구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걸었다. 그래서 전달했다.

     

    정치인의 약속이란 언제나 유효기간이 불분명하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이주민과 장애인과 노동자의 손에서 직접 건네받은 요구안을 들고 한 약속은 조금 다르다. 증인이 있는 약속은 그 무게가 다르다. 이날 광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그 약속의 증인이다.

     
     

     

    행진이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깃발은 접혔고, 드럼 소리는 멎었고, 광장은 다시 평범한 광장이 되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것은 도시의 표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변화다. 함께 걸었다는 사실, 같은 방향을 향했다는 기억, 우리가 원하는 것을 큰 소리로 말했다는 경험. 이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도시란 무엇인가. 건물과 도로와 행정구역의 합산이 아니다. 도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책임감의 총합이다. 내 옆집 사람이 오늘 안전한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무사히 집에 돌아가는지, 이주민 아이가 아플 때 말이 통하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이것을 묻고, 따지고, 바꾸려는 사람들이 함께 걸었던 59일의 안산은, 그래서 잠깐 더 나은 도시였다.

     

    안전하게 산다. 그래서 안산이다. 함께 걸었던 우리 모두의 바람이었다.

     

    *2026년 5월, 안산에서*
    안전하게 산다, 그래서 안산이다
    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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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26
  • 애인 노동권 현장에서 만난 권리를 만드는 노동

     

    장애인들이 지하철에서 비장애인들로부터 왜 기어 나왔냐라는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다 울어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말해요. ‘우리도 함께 살아가는 시민입니다.”

    매주 화요일, 휠체어를 탄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이 지하철 문턱을 넘는 순간 지하철은 한동안 멈춰 서고, 사람들의 시선은 한곳으로 몰린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고, 누군가는 대놓고 혐오의 말을 던진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지하철에 오르고 서울로 향한다. 그리고 거리에서 외친다.

    이것도 노동이다.”

     

    2025년부터 김포장애인야학 권리중심팀에서 일하고 있는 염은정 활동가는 장애인 노동권 운동을 노동의 개념을 바꾸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보통 노동을 생산성과 이윤으로 판단하잖아요. 그런데 장애인의 권리를 알리고, 인식을 바꾸고,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것도 노동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활동은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진 인권 감수성이 34년간의 교육개혁 운동을 지나 장애인 노동권 운동으로 이어졌다.

     

    학생 인권운동에서 장애인 노동권 운동까지

    1989년 전교조 교사들이 해직되던 시절,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염은정 활동가는 해직 교사들과 함께 교문 앞에 섰다.

    학생들과 소통도 잘되고, 공부도 잘 가르쳐주시던 선생님들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해고를 당한 거예요. 그때 처음에는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저 선생님들을 지켜야 한다라는 생각은 강했죠.”

    해직 교사들의 출근 투쟁을 돕기 위해 교문을 열어주고, 선생님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그 경험은 곧 학생 인권 문제로 이어졌다.

    당시 학교는 두발 규제와 복장 검사, 소지품 검사까지 일상이었다. 그는 속옷 색깔을 검사하고, 치마를 들쳐 속바지까지 검사하던 시대였다고 회상했다. 학생회 출마에도 성적 제한이 있었고, 학생들은 학교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래서 염은정 활동가는 학생회 성적 제한 철폐’, ‘두발 자유화’, ‘복장 자율화운동을 시작했다. 학교 안의 작은 문제 제기는 지역 다른 학교와의 연대로 이어졌고, 교육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참교육학부모회 활동과 교육 운동으로 30년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학생인권조례 제정, 친환경 학교급식 운동, 고교평준화 운동 등 굵직한 교육 현안 속을 쉼 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몸이 무너졌다. 이석증으로 쓰러지고, 이에 따라 운전 중 사고까지 겪었다. 활동을 잠시 멈추며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참교육학부모회 경기지부장까지 하면서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쉬면서 생각해 보니 현장과 조금 멀어진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 무렵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이 김포장애인야학이었다. 평소 장애인 평생교육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매주 화요일, 중증장애인과 지하철을 타는 이유

    그리고 지금 염은정 활동가는 매주 화요일이면 중증장애인 노동자들과 함께 서울로 향하는 지하철을 탄다. 서울시의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 폐지에 맞서 해고된 장애인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사람들에게 우리도 여기 함께 살고 있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동하는 것 자체가 캠페인이에요.”

    휠체어가 지하철에 오르려면 열차는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지하철이 지연된다고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눈살도 찌푸린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비로소 장애인의 현실이 드러난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안 보이게 만드는 사회였잖아요. 장애인 자식을 둔 부모는 무슨 죄라도 지은 듯 쉬쉬하며 밖에도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안 보이니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겼던 거죠.”

    <사진2, 사진3 : 김포장애인야학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과 염은정 활동가가 경기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결의대회에서 문화 공연과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거리로 나온다. 축제에서 공연도 하고, 투표소 접근권을 조사한다. 사회 속에 함께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장하는 것

    염은정 활동가는 처음 장애인 운동을 접하며, “저 자신도 오랫동안 장애인을 도움받아야 하는 존재로만 바라봤다라고 털어놓았다.

    우리는 도와주면 착한 줄 알고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먼저 물어봐야 하더라고요. 도움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동안 우리는 장애인의 선택권 자체를 빼앗아 온 사회였던 거죠.”

    그는 결국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시혜나 복지보다 장애인의 권리를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운동 현장에 들어와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동권 현실이었다. 비장애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작은 턱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엘리베이터 타면 집에나 있지 왜 돌아다니냐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 엘리베이터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결과물이거든요.”

    2000년대 초반, 장애인 이동권 운동은 생존의 문제였다. 리프트 추락사고가 이어졌고, 장애인들은 지하철 선로에 내려가며 싸워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지하철 엘리베이터다. 그리고 이 엘리베이터는 장애인보다 비장애 교통약자들의 이용률이 훨씬 높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더디게 변하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한다.”권리 중심 일자리의 의미

    현재 염은정 활동가가 가장 집중하는 것은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운동이다.

    김포장애인야학에는 현재 30명의 중증장애인 노동자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거리에서 권익옹호 캠페인을 하고, 문화예술 공연을 하고, 이동권을 모니터링하고, 시민들에게 장애 인권을 알리는 모든 활동 자체가 사회적 가치 생산이다.

    염은정 활동가는 말했다.

    국가가 UN이 정한 장애인권리협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말해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할 테니 우리의 노동으로 인정해 달라. 그런데 현실은 눈에 보이는 생산만 노동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노동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모의 짐인 줄 알았다노동이 바꾼 삶의 감각

    권리중심 일자리에서는 다르다. 비록 긴 시간은 일하지 못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받는다. 월급을 받고, 지역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인한다.

    그 변화는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다. 표정과 태도, 삶의 감각이 달라진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노동자분이 그러셨어요. ‘나는 평생 부모의 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번 돈으로 어버이날 선물을 사드렸는데, 부모님께서 펑펑 우셔서 둘이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라는 거예요. 그분이 자기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게 된 순간이잖아요. 내 존재가 쓸모 있다고 느끼는 거죠. 그 변화가 너무 커요.”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최저임금 밖에 놓인 사람들

    하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현재 중증장애인은 최저임금 적용 제외 대상이다.

    생산성이 없으니, 최저임금도 줄 필요 없다는 거잖아요. 결국 인간의 가치를 생산성으로만 판단하는 사회예요라고 꼬집었다.

    염은정 활동가는 장애인의무고용제 역시 실효성이 부족하다라고 지적했다. 일부 공공기관과 기업은 장애인 의무 고용 대신 장애인 고용부담금을 내고 의무 고용을 회피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는 고용부담금이 최저임금 보다 낮게 산정돼 있어 고용보다 부담금 납부가 경제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이처럼 장애인 고용을 돈으로 해결하는 구조로는 안 바뀌어요. 정부도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 거죠. 궁극적으로는 장애인 일자리라는 말 자체가 사라지는 사회가 되어야 해요. 장애인도 떳떳한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요.”

    실제로 서울대병원의 경우 2020년부터 2025년까지 6년간 고용부담금으로 148700만 원을 내 공공기관 중 최다 납부액을 기록했다.

    <사진4 : 429일 혜화역에서 진행된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 모습이다.>

     

    이에 따라 매일 아침 8시 혜화역에서는 장애인 의무 고용을 요구하는 피케팅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2026520일 현재 1,079일째를 맞고 있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 사회로

    인터뷰 말미,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염은정 활동가는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에게 장애인 노동권 운동은 이제 시작이에요. 10년은 해야죠.”

    이석증을 앓고 난 후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이제는 밤샘 활동이 두렵기도 하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일에 미쳐 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겼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로 갔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인간은 아주 포괄적인 의미예요.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사회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말하는 장애인 노동권은 단지 일자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도움받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자 노동자로 인정하는 일.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다시 배우는 일이었다.

     

    해시태그 추가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 #중증장애인최저시급 #장애인의무고용 #김포장애인야학

     
    “이것도 노동입니다”…34년 교육운동가가 장애인 노동권 현장으로 들어간 이유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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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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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입 쫓겨나지 않는 공간이 공동체를 살린다

     

    1997612,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에서 12마일 떨어진 작은 섬 에이그(Eigg)에서 68명의 주민이 환호성을 질렀다. 수십 년간 외부 지주에게 퇴거 위협을 받으며 살아온 그들이, 마침내 자신들이 사는 섬을 직접 사들이는 데 성공한 날이었다.

    그 이후 에이그 섬에서는 이전에 불가능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새 주택이 지어졌고, 인구가 늘었으며, 세계 최초로 풍력·태양광·수력만으로 24시간 전력을 공급하는 재생에너지 전력망이 주민들의 손으로 구축됐다. 땅의 주인이 바뀌자, 섬의 미래가 바뀐 것이다.

     

    공익활동 단체가 가장 자주 부딪히는 현실적 문제 중 하나도 공간이다. 모임을 열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주민들이 찾아올 수 있는 거점이 없으면 아무리 뜻이 좋아도 활동을 이어가기 어렵다. 임차료가 올라 쫓겨나고, 재개발로 터전을 잃고, 지원 사업이 끝나면 공간도 사라지는 일이 반복된다. 공익활동의 지속 가능성은 단순히 재정이나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다. 어디서 뿌리를 내리느냐는 물리적 기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의 공동체 토지 매입 운동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수백 년간 소수 지주에게 집중돼온 토지를 주민들이 직접 사들여 공동체 자산으로 전환하는 이 운동은, 공간의 소유가 공동체의 자율성과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20년 넘게 실증해왔다.

     

    스코틀랜드의 경험은 한국의 도시재생·마을공동체 사업과 놀랍도록 닮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해법의 방향은 크게 다르다. 한국이 정부 주도의 시설 공급 방식으로 공동체 공간 문제에 접근하는 반면, 스코틀랜드는 공동체가 직접 땅과 건물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이 차이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가 이 글의 핵심이다.

     

    2. 스코틀랜드의 토지 문제 유럽에서 가장 집중된 토지 소유

     

     

    스코틀랜드의 토지 문제를 이해하려면 그 역사적 맥락부터 살펴야 한다.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토지 소유가 가장 극단적으로 집중된 나라 중 하나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하이랜드 클리어런스(Highland Clearances)'는 지주들이 양 방목을 위해 소작농들을 대규모로 강제 축출한 사건으로, 수만 명의 주민이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났다. 이 역사적 트라우마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토지 개혁이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역사적 정의의 문제임을 각인시켰다.

    2024년 기준으로도 스코틀랜드 농촌 지역의 83%는 여전히 사유지가 차지한다. 토지 개혁 전문가 앤디 와이트먼(Andy Wightman)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현재 스코틀랜드 사유 농촌 토지의 50%를 단 433명의 지주가 소유하고 있다. 이 토지 불평등 구조가 스코틀랜드 토지 개혁 운동의 배경이 된다.

     

    정치적 전환점은 1997년 스코틀랜드 의회 분권화였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2000년 봉건적 토지 보유제를 폐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2001년에는 국가복권 기금으로 1,000만 파운드 규모의 '스코틀랜드 토지 기금(Scottish Land Fund)'을 출범시켜 농촌 공동체가 토지를 매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 결정적인 법률인 '토지개혁법(Land Reform (Scotland) Act 2003)'이 제정되었다.

     

    이 법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공동체 우선 매입권(Community Right to Buy)'으로, 10,000명 이하 규모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지역 토지에 관심을 등록하면 해당 토지가 매물로 나왔을 때 우선 매입할 권리를 갖는다. 둘째, '크로프팅 공동체 매입권(Crofting Community Right to Buy)'으로, 크로프팅(소규모 자작농) 공동체는 토지가 매물로 나오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구매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후 2015'공동체 권한 강화법(Community Empowerment (Scotland) Act 2015)'으로 도시 공동체도 공공기관 소유 토지와 건물을 매입 또는 임차할 수 있는 권리가 추가되었고, 2016년 토지개혁법은 스코틀랜드 장관이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한다고 판단하면 지주에게 강제 매각을 명령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3. 에이그 섬 공동체 매입의 첫 씨앗

     

     

     

    공익활동 단체가 가장 자주 부딪히는 현실적 문제 중 하나는 공간이다. 모임을 열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주민들이 찾아올 수 있는 거점이 없으면 아무리 뜻이 좋아도 활동을 이어가기 어렵다. 임차료가 올라 쫓겨나고, 재개발로 터전을 잃고, 지원 사업이 끝나면 공간도 사라지는 일이 반복된다. 공익활동의 지속 가능성은 단순히 재정이나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다. 어디서 뿌리를 내리느냐는 물리적 기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가장 정면으로 다룬 사례가 스코틀랜드의 공동체 토지 매입 운동이다. 수백 년간 소수 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온 토지 소유를 주민들이 직접 사들여 공동체 자산으로 전환하는 이 운동은, 공간의 소유가 공동체의 자율성과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20년 넘게 실증해왔다.

     

    스코틀랜드의 경험은 한국의 도시재생, 마을공동체 사업과 놀랍도록 닮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해법의 방향은 크게 다르다. 한국이 정부 주도의 시설 공급 방식으로 공동체 공간 문제를 접근하는 반면, 스코틀랜드는 공동체가 직접 땅과 건물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이 차이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가 이 글의 핵심이다.

     

    3. 에이그 섬의 기적 공동체 매입의 첫 씨앗

     

    법과 제도가 갖춰지기 전, 에이그 섬은 이미 주민들의 힘으로 그 길을 열었다.

     

    에이그 섬은 1970년대부터 여러 사유 지주들 아래에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주민들은 퇴거 위협에 시달렸고, 건물과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섬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이 전혀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주민들, 하이랜드 카운슬, 스코틀랜드 야생생물 트러스트가 연대해 '에이그 섬 헤리티지 트러스트(Isle of Eigg Heritage Trust)'를 결성했다.

     

    19974, 당시 독일인 예술가였던 섬 소유자가 매각에 동의하면서 매입 캠페인이 본격화됐다. 150만 파운드(25억 원)의 매입 자금이 필요했다.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기부에 참여했고, 누군지 밝히지 않은 한 익명의 여성 기부자가 75만 파운드를 단독 기부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이랜드 앤드 아일랜드 엔터프라이즈(HIE)17천 파운드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1997612, 에이그 섬은 마침내 주민들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 이후의 변화는 숫자로도 드러난다. 당시 68명이었던 섬 인구는 202225주년 기념일 기준으로 110명으로 늘었고, 방문객 수도 두 배로 증가했으며, 새 주택이 건설됐다. 가장 인상적인 성취는 에너지 독립이다. 섬은 디젤 발전기 의존에서 벗어나 풍력, 태양광, 수력을 결합한 지역 전력망인 '에이그 일렉트릭(Eigg Electric)'을 구축해 세계 최초로 이 세 가지 재생에너지만으로 24시간 전력을 공급하는 지역이 됐다. 이 전력망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도 주민들이다.

     

    에이그 섬의 성공은 이후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수백 건의 공동체 매입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2002년에는 기가(Gigha) 섬이 4백만 파운드에 공동체 매입을 완료했고, 그 이후 섬 인구가 92명에서 170명으로 늘었으며, 공동체가 운영하는 세 기의 풍력 발전기가 호텔, 상점, 레스토랑, 숙박 시설 등 지역 사업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4. 법과 기금이 만든 생태계 제도화된 공동체 매입

     

    에이그 섬이 선구자적 사례라면, 그 이후에 만들어진 제도적 기반이 운동 전체를 확산시켰다.

     

    스코틀랜드 토지 기금(Scottish Land Fund)은 현재 스코틀랜드 정부가 재원을 대고 내셔널 로터리 커뮤니티 기금(National Lottery Community Fund)과 하이랜드 앤드 아일랜드 엔터프라이즈(HIE)가 파트너십으로 운영한다. 5,000파운드에서 최대 100만 파운드까지의 보조금을 지역 공동체가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는 데 지원한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10년간 스코틀랜드 토지 기금은 300개 이상의 공동체 조직에 5,000만 파운드(850억 원) 이상을 지원했다. 지원 대상은 농촌에 그치지 않는다. 에든버러의 코르스토핀 커뮤니티 센터(Corstorphine Community Centre)2023년 스코틀랜드 토지 기금으로 96만 파운드를 지원받아 에든버러 시의회로부터 건물을 매입했고, 글래스고파트릭의 아넥스 커뮤니티는 248천 파운드 지원으로 37년간 임차해온 건물의 소유권을 확보해 지역 건강·복지 허브를 영구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수치는 운동의 규모를 보여준다. 스코틀랜드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스코틀랜드에서 공동체 소유 자산은 853개이며, 503개 공동체 그룹이 이를 소유하고 있다. 이 자산들이 포괄하는 토지 면적은 213,803헥타르로, 스코틀랜드 전체 면적의 2.7%에 해당한다. 2000년에 비해 161,832헥타르 이상 늘어난 수치다. 지난 10년간 스코틀랜드 나머지 지역의 공동체 소유 토지 면적은 두 배 이상 늘었다.

     

    202412월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스코틀랜드 토지 기금 지원 사례들을 보면, 던운의 오크뱅크 커뮤니티 인은 147천 파운드를 지원받아 지역 선술집과 레스토랑을 공동체 공간으로 재개방할 예정이고, 오크니의 스트롬니스 커뮤니티 발전 트러스트는 138천 파운드를 받아 공동체 센터 소유권을 확보했다. 로컬샤의 발마카라 커뮤니티 트러스트는 162천 파운드로 산림청 소유였던 야영지를 매입해 지역 커뮤니티 자연 공간으로 보존한다.

     

     

    5. 소유가 만드는 차이 왜 토지 매입이 공동체를 바꾸는가

     

    단순히 공간을 쓰는 것과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에이그 섬과 기가 섬, 수백 곳의 스코틀랜드 공동체 매입 사례가 보여주는 차이는 명확하다.

     

    첫째, 임차와 달리 소유는 장기적 계획을 가능하게 한다. 임대 공간에서는 계약 갱신 여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10, 20년을 내다보는 투자와 프로그램 기획이 어렵다. 에이그 섬 헤리티지 트러스트가 섬 전체를 소유하면서 비로소 장기적인 주택 건설, 재생에너지 인프라 구축, 인구 유입 계획이 가능해졌다.

     

    둘째, 소유는 지역 자원의 수익을 공동체 내부에 머물게 한다. 기가 섬의 풍력 발전기 수익은 지역 사업체를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외부 지주에게 임대료를 납부하는 구조에서는 지역에서 창출된 수익이 외부로 유출되지만, 공동체 소유 구조에서는 그 수익이 지역 내 재투자로 순환된다.

     

    셋째, 소유는 주민의 의사결정 권한을 만든다. 에이그 섬은 매입 직후 워크숍과 주민 공청회를 열어 새 주택을 어디에 지을지, 기반 시설을 어떻게 개발할지를 주민들이 직접 결정했다. 공간의 소유자가 됐을 때 비로소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에 대한 진정한 결정 권한을 갖게 됐다.

     

    넷째, 소유는 외부 충격에 대한 회복력을 높인다. 사유 지주가 섬을 팔거나, 지가가 급등하거나, 재개발이 추진될 때 임차인에 불과한 공동체는 속수무책이다. 반면 공동체가 소유권을 갖고 있으면 외부의 투기적 압력으로부터 지역을 보호할 수 있다.

     

    커뮤니티 랜드 스코틀랜드의 린세이 찰머스(Linsay Chalmers) 이사는 스코틀랜드 토지 기금이 "농촌 인구 감소와 도시 쇠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다른 접근 방식들이 실패한 경우에도 종종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6. 한국의 현황과 비교 공간은 있지만 소유는 없다

    한국의 도시재생과 마을공동체 사업은 2013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제정 이후 본격화됐다. 전국 각지에 '도시재생 거점시설', '마을공동체 공간' 이라는 이름의 시설들이 만들어졌다. 커뮤니티 공간, 주민 카페, 공동 작업장 등 형태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 공간들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공간은 정부 보조금으로 조성되지만 공동체가 소유하지 않는다. 지방자치단체 소유 건물을 공동체에 위탁하거나, 임차 형태로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시재생 사업 기간이 끝나면 지원이 중단되고, 공간 운영을 담당할 주민 주체를 찾지 못하면 시설이 방치되는 사례도 생긴다.

     

    뉴스타파의 도시재생 10주년 기획 보도에 따르면 사업 기간이 끝난 후 방치되는 거점시설 문제가 전국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위탁할 주민 그룹을 찾지 못해 지자체가 직접 시설을 운영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마을공동체 활동을 연구한 학자들은 공동체가 시설의 '이용자'에 머물고 '소유자'가 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가 지속 가능성을 저해한다고 지적한다.

     

    스코틀랜드와 한국의 차이는 여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코틀랜드는 공동체가 직접 자산을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법률과 기금을 설계했다. 공동체가 땅이나 건물의 실제 소유자가 될 때, 비로소 장기적 관리와 지속 가능한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국의 경우 공간 제공에는 적극적이지만, 그 공간의 소유권을 공동체에 이전하는 데는 소극적이다.

    물론 맥락의 차이도 있다. 스코틀랜드는 농촌 과소화와 대지주 문제가 결합된 특수한 역사적 조건 위에서 운동이 전개됐다. 한국의 도시 밀집 환경에서 토지 소유의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 지가가 높고 개발 압력이 강한 도시에서 공동체가 토지를 직접 매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러나 도시재생 연구자들이 제안하는 '시민자산화' 개념, 즉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 등이 도시재생 사업지 내 자산을 실제로 매입하거나 장기 임차하는 방식은 스코틀랜드 모델과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소유 여부가 지속 가능성을 결정한다는 인식이 한국에서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7. 경기도 공익활동 생태계에 남기는 질문

     

    스코틀랜드 사례에서 경기도 공익활동 생태계와 연결되는 시사점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공간의 안정성이 활동의 지속성을 결정한다. 경기도 31개 시·군에서 활동하는 공익단체들이 가장 많이 직면하는 문제 중 하나가 공간 문제다. 임차료 부담, 재개발, 지원 사업 종료 후 공간 상실이 반복된다. 스코틀랜드는 공동체가 소유하는 자산, 즉 쫓겨나지 않는 공간이 공동체 지속성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경기도 내 유휴 공공시설의 장기 임차나 자산 이전, 또는 공동체 기금을 통한 소규모 자산 매입 등을 공익활동 지원 정책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둘째, 공동체 소유는 외부 충격에 대한 면역력이다. 지가 상승, 재개발, 정책 변화로 공간을 잃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잃는 게 아니라 그 공간에 축적된 관계망과 활동 역사를 잃는 것이다. 공동체가 자산 소유권을 가질 때 그 역사가 보존된다. 아카이브 에디터들이 공익활동 현장을 기록하는 것처럼, 그 현장 자체가 지속될 수 있는 물리적 기반도 공익 생태계의 일부다.

     

    셋째, 제도적 지원이 운동의 확산을 결정한다. 에이그 섬의 선구적 매입이 운동 전체를 촉발했다면, 스코틀랜드 토지 기금과 토지개혁법이 그 운동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다. 시민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공동체가 공간을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법적 권리와 재정적 지원이 결합될 때 운동은 체계적으로 성장한다. 한국에서도 공동체 자산 확보를 지원하는 제도적 기반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마무리 땅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

     

    1997년 에이그 섬의 68명 주민이 1.5백만 파운드를 모아 자신들이 사는 섬을 샀다는 것은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되찾는 행위였다. 세계 어디에서도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는 100% 재생에너지 전력망을 주민 스스로 구축한 것도, 그 소유권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간이 없으면 공동체의 이야기도, 활동도 사라진다. 경기도에서 공익활동을 이어가는 단체들이 기록하는 이야기들이 오래 남으려면, 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공간도 지속되어야 한다. 스코틀랜드는 그 지속성을 소유에서 찾았다. 공동체가 땅을 갖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의 미래가 자기 손 안에 있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영국 법률 Land Reform (Scotland) Act 2003 : https://www.legislation.gov.uk/asp/2003/2/contents

     

    Isle of Eigg Heritage Trust 공식 홈페이지 Community Buyout : http://isleofeigg.org/ieht/community-buyout/

     

    Isle of Eigg 공식 홈페이지 :

    https://isleofeigg.org/

     

    Scottish Housing News 에이그 섬 공동체 매입 25주년 : https://www.scottishhousingnews.com/articles/25-years-of-community-ownership-marked-on-isle-of-eigg

     

    Press & Journal 에이그 섬 25주년 : https://www.pressandjournal.co.uk/fp/news/highlands-islands/4401513/eigg-marking-25-years-of-community-buyout-and-inspiring-others/

     

    The Conversation 에이그 섬 공동체 매입에서 배울 것 : https://theconversation.com/what-other-communities-can-learn-from-this-islander-buy-out-in-scotlands-hebrides-75896

     

    스코틀랜드 정부 공식 통계 Community Ownership in Scotland 2024 : https://www.gov.scot/publications/community-ownership-in-scotland-2024/

     

    스코틀랜드 정부 커뮤니티 소유 면적 변화 : https://www.gov.scot/publications/community-ownership-in-scotland-2024/pages/area-in-community-ownership-changes-over-time/

     

    스코틀랜드 정부 Scottish Land Fund : https://www.gov.scot/policies/land-reform/scottish-land-fund/

     

    National Lottery Community Fund Scottish Land Fund : https://www.tnlcommunityfund.org.uk/funding/programmes/scottish-land-fund

     

    Scottish Housing News 스코틀랜드 토지 기금 갱신 : https://www.scottishhousingnews.com/articles/renewed-land-fund-vital-for-continued-community-ownership-success

     

    HIE 202412SLF 지원 : https://www.hie.co.uk/news-and-blogs/news/2024/december/06/community-groups-receive-slf-funding/

     

    TFN 스코틀랜드 토지 기금 지원 보도 : https://tfn.scot/news/community-groups-get-2million-from-scottish-land-fund

     

    Land Matters Who Owns Scotland 2024 : https://andywightman.scot/2024/03/who-owns-scotland-2024-a-preliminary-analysis/

     

    Law Society of Scotland 토지개혁 25: https://www.lawscot.org.uk/members/journal/issues/vol-66-issue-01/land-reform-25-years-in-perspective/

     

    뉴스타파 도시재생 10, 방치된 거점시설 : https://www.newstapa.org/article/hgFPz

     

    커뮤니티 랜드 스코틀랜드 Isle of Eigg Heritage Trust : https://www.communitylandscotland.org.uk/members/isle-of-eigg-heritage-trust/

     
    공간없이 공익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스코틀랜드 토지개혁 운동이 한국 공익활동에 주는 시사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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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03
  • 평범한 일상이 권리가 되는 안산을 꿈꾸며

    안산시 장애인권리보장 정책실현 시민대토론회를 다녀와서

    2026429|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

    (투쟁을 하는 장애인, 하트를 하는 정치인)

    [ 토론회 순서 ]

    좌 장 권달주 (상록수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

     

    발 제 안산시 장애인 정책의 현재와 대안

    김병태 (()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안산시지부 지부장)

     

    사례장애인 이동권은 삶이다 오성현 (상록수IL센터 동료상담가)

    사례장애인 학습권 보장하라 임영채 (경기IL센터협의회 안산시지부 동료상담가)

    사례우리도 일하며 살고 싶어요 김문경 (상록수IL센터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 노동자)

    사례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멋에 산다 임현수 (전국장애인탈시설연대 경기지부장)

    토론안산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역할 이재민

    토론장애인 평생교육 김선영 (안산나무를심는장애인야학 교장)

    토론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 조례의 필요성 조은소리

    토론안산시 장애인 탈시설 권리 보장을 위한 정책과제 전유리

    토론발달장애인 지원 정책, 이동권의 행정 장벽 철폐와 주거 선택권의 확장 김정아

    토론장애인건강보건관리종합계획의 의의와 한계, 안산 지역에서의 실천 과제 팔도

     

    종합토론 질의·응답

     

     

     

    우리나라에서 휠체어가 다니기 제일 좋은 곳

    우리나라에서 휠체어가 다니기 가장 좋은 곳은 어디일까?

    정답은 공항이다.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 때문에 공항 바닥은 반질반질하다. 턱도 없다. 경사로도 있다. 엘리베이터가 아주 넉넉하다. 모든 이동 동선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건 휠체어 타는 장애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캐리어를 끄는 비장애인이 불편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씁쓸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오래도록 이런 세계에서 살아왔다.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편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조건이 되는 세계. 그러나 그 '다른 누군가'는 처음부터 설계의 이유가 아니었던 세계.

    429,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안산시 장애인권리보장 정책실현 시민대토론회'는 그 씁쓸함에 정면으로 맞서는 자리였다. 회의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래 참아온 사람들 특유의 조용한 단단함이 있었다. 

    기다림이라는 이름의 차별

    발제를 맡은 김병태 지부장이 첫 말을 꺼냈다. "장애인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헌법과 UN 장애인권리협약이 보장하는 당당한 권리의 주체입니다." 안산에 살아가는 32천여 명의 장애인 시민들이 예산의 효율성이라는 벽 앞에서 더 이상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이동권 사례를 발표한 오성현 님의 말은 그 선언을 삶의 언어로 번역해주었다.

    "어쩌다 시간에 맞게 딱 콜이 잡히는 날에는 정말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기분 좋은 날입니다."

    하모니콜. 안산시의 특별교통수단이다. 관내 평균 대기시간 28, 관외 38. 출퇴근 시간대에는 최대 2시간을 기다린다. 하루 이용 횟수는 4번으로 제한되어 있다. 눈비가 오면 더 오래 기다린다. 오성현 님은 퇴근도 못 한 채 휠체어에서 잠이 든 날이 있다고 했다.

    비장애인에게 이동은 그냥 나가는 것이다. 장애인에게 이동은 계획이고, 기다림이고, 운이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같은 시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발제에서는 차량 1대당 운전원 2.5명 확보와 일일 16시간 운행 전면 보장, 수도권 즉시콜 시스템 도입, 와상장애인 전용 특별교통수단 도입이 요구됐다. 또한 모든 버스정류장과 보도의 배리어프리 전수조사, 소규모 상업시설 경사로 설치 비용 전액 지원도 제안됐다. 이것들은 요청이 아니라 권리다. 공항 바닥이 반질반질한 것처럼, 당연해야 할 것들이다.

     

    배움과 일, 그리고 존엄

    임영채 님이 조용하게 말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데, 우리에게 배움은 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안산에서 장애인이 교육받을 수 있는 공간은 '안산나무를심는장애인야학' 단 한 곳뿐이다. 장애 성인의 54.4%가 중졸 이하의 학력에 머물러 있다.

    배움이 닫히면 지역사회로 나가는 문도 함께 닫힌다. 장애인 평생교육지원센터 신설과 문해교육 기본교육과정 지원, 이것은 교육부의 일이 아니라 안산시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다.

    권리중심맞춤형공공일자리에서 일하는 김문경 님의 말은 달랐다. 이전 직장에서 그는 늘 눈치를 봐야 했다. 낮은 임금과 비장애인 중심의 환경 속에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일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존엄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실현하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토론에서는 안산형 권리중심 맞춤형 공공일자리 조례 제정이 제안됐다. 최중증장애인 100명 고용, 12개월 근로계약, 3년 위탁 보장. 숫자들이지만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얼마 전, 수어 통역을 했던 농인 이야기가 생각났다. 공공일자리 주차요금 징수 업무에 농인이 지원했다. 주차장을 오가며 요금을 받는 일이다. 요즘은 카드로 결제하니 말이 필요 없다. 카드 받고, 계산하고, 인사하면 끝이다.

    그런데 안 된다고 했다.

    수어 통역을 통해 일단 해보고 문제가 생기면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안 된다고 했다. 말이 안 들리면 일을 못 한다는, 설명되지 않는 논리. 농인은 말을 못 듣는 게 아니라 다르게 소통할 뿐인데.

    공항 바닥이 반질반질한 건 설계의 문제다. 농인이 주차요금을 못 받는다는 건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너무 많은 곳에서 상상하기를 멈추어 있다.

    시설 밖 세상으로

    임현수 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그는 어릴 적 경기도 광주의 '향림원'이라는 시설에서 살았다. 20132월의 어느 밤, 선생님이 장애인 동료들을 벽에 세우고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역시 빗자루와 글루건 심으로 발바닥과 손바닥을 맞고 발이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2015년 다른 시설로 옮겨졌지만 폭력의 그림자는 그대로였다. 시설 밖으로 나가 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원장은 욕을 하며 탈시설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마침내 2024102, 그는 세상으로 나왔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제가 결정하고 제가 책임지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매일 느낍니다."

    탈시설 5개년 로드맵, 지원주택 조례 제정, 활동지원 24시간 보장, 자립생활센터 역량 강화. 이것들이 실현될 때, 임현수 님 같은 사람이 10년을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토론회 마지막, 지방선거 후보자가 물었다. 탈시설 비율이 몇 퍼센트냐고. 담당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시설에 있는 사람이 정확히 몇 명인지, 자립을 원하는 사람은 몇 명인지 통계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몇 퍼센트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숫자가 없다는 것은 존재를 세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지 않은 것은 보지 않은 것이다. 보지 않은 것은 없는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저녁 7시 수업을 듣고 싶었던 친구에게

    토론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 친구가 떠올랐다. 수어 교실에서 만난 전동휠체어를 탄 그 친구. 회사에 농인 동료가 생겨 수어를 배우러 온다고 했다.

    저녁 7시 수업인데 그는 항상 5, 6시에 와 있었다. 궁금해서 물었다. 오후 4시에 퇴근하자마자 하모니콜을 부른다고 했다. 퇴근 시간대에는 콜이 잘 안 잡힌다고. 저녁도 거른 채 빵 하나로 끼니를 때우며 일찍 오는 게 낫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는?

    9시에는 콜이 더 안 잡힌다고 했다. 11시에 콜이 잡혀서 집에 간 적도 있다고. 추운 겨울, 온기 하나 없는 복지관 입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러면 일찍 가지, 라고 내가 말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렵게 왔는데 수업은 다 듣고 가고 싶어요."

    추석에는 혼자 전철을 타고 수원 스타필드에 다녀왔다고 했다. 처음으로 혼자 나들이를 한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다. 전동휠체어는 무거워서 아무도 들어줄 수 없다. 보도 턱에 막혀 집으로 돌아간 날도 많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토론회를 끝까지 들어보며 작년에도 했던 말들이 올해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아마, 내년에도 반복될 것이다. 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자는 말들이 구호로만 머무는 한.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언젠가 이 질문들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늘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더 행복하게 살 것인가'.

    공항 바닥이 반질반질한 건 캐리어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처음부터 휠체어를 위해 설계된 도시가 생겨날 것이다. 그 도시에서는 장애인 이동이 로또가 아닌 당연한 일상이 될 것이다. 농인이 주차요금을 받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거창한 미래가 아니다. 그냥 평범한 일상이다. 그 평범함이 모든 사람에게 권리가 되는 안산을, 나는 오늘도 꿈꾼다.

     

    2026429,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평범한 일상이 권리가 되는 안산을 꿈꾸며
    관리자

    조회수 157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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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따라온 게 아니라 휠체어와 함께 길을 만들며 여기까지 왔어요.”

    그의 이야기는 이 한 문장에서 시작한다. 늦게 시작한 공부와 일, 아이를 키우며 멈춰야 했던 시간, 그리고 다시 장애인 활동가로 살기까지, 그는 휠체어로 스스로 길을 내며 살아왔다. 상록수장애인자립생활센터 총괄팀장이자 동료상담가 조은상 활동가를 소개한다.

     

    동료상담가라는 말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소개부터 부탁해요.

    저는 안산 상록수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하 ‘IL’)에서 동료상담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장애인이라고 하면 도움과 서비스를 받는 사람을 상상하잖아요. 자립생활센터 동료상담의 정신은 장애인을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바라보는데요, 장애인 당사자가 또 다른 장애인 동료와 하는 상담이죠. 단순히 비슷한 처지끼리 하는 대화가 아니라, 기존의 전문가 중심 상담 모델로부터 해방된 고도의 정치·사회적 치유와 임파워먼트Empowerment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정신과 의사나 사회복지사가 장애인을 진단과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상담이죠. 동료상담은 그런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로부터의 해방된 평등한 관계 모델이라 할 수 있어요. 장애인 스스로가 자기 삶의 전문가라고 선언하는 거죠. 자격증의 권위가 아니라 장애를 안고 살아온 생존의 역사자체가 상담의 강력한 도구죠. 상담의 목표 역시 상담가가 아니라 내담자 스스로 자기결정권으로 설정하고요.

     

    동료상담은 상담자와 내담자가 대등한 관계로 진행해요. 한쪽이 가르치거나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나도 그랬다는 공감을 서로 나누는 거죠. 이 모든 과정이 자립생활 모델과 결합해요. 내면의 힘을 길러서 결국 시설이나 집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스스로 살아가게 하는 힘. 더 나아가 개인의 변화를 넘어, 사회의 책임과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동력이 되고요.

     

    ~ 자립생활센터(IL)가 어떤 곳인지도 소개해 주셔야겠어요.


    장애인복지관과 비교해 볼게요. 이전엔 서비스를 받거나 이용하러, 즉 이용자로서 장애인복지관을 드나들었어요. IL센터에서는 장애인이 행동의 주체가 돼요. 이용 시설이 아니라 장애인이 직접 일하고 활동하고 사회를 바꾸기 위해 움직이는 단체죠. 환경과 사회를 장애물이 없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사회 변혁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을 돕는 것을 넘어서 사회를 바꾸는 일이에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일은 삶의 운동이자 삶의 일부예요.

     

    IL의 가장 기본 정신이 권리옹호, 자기결정권과 자기선택권인데요. 어디서 살지,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와 같은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부터 인생의 큰 항로까지,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해요. 거기엔 실패할 권리도 포함돼 있고요. ‘장애인을 위한 의사결정 과정에 장애인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는 당사자주의고요. IL 센터 내부의 소장부터 주요 의사결정 인력까지 과반수 이상이 장애 당사자인 것도 그 때문이고요.

     

    장애가 있다고 사회와 격리된 시설에서 살아야 할까요? IL은 비장애인과 똑같이 지역사회 안에서 어우러져 사는 것을 지향해요. 물리적 건물만이 아니라 교육·노동·문화생활 등 모든 사회적 기회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목표죠. 장애인이 문제가 아니라 장애인을 문제로 보는 사회적 장벽(Social Barrier)’이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이 운동의 핵심은 개인의 재활이나 극복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있는 거죠.

     

    어떻게 이런 엄청난 데에 발을 들이게 되었을까요?

     

    처음엔 아는 언니 따라왔죠. 사진 동아리 포커스휠에 나가면서도 별로 적극적인 회원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센터에서 동료상담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고 동료상담을 진행해본 게 첫 출발이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센터활동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집단동료상담 리더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이 크게 바뀌었어요. 제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죠. 내가 불쌍하고 불행한장애인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구조적 모순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거죠. 장애인 동료상담가들이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그전에는 직업을 갖기 위해 자격증도 따고 사회가 원하는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면 센터 활동과 동료상담을 하면서 왜 자립생활 운동을 해야 하는지, 왜 이 일을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는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까지 센터에서 간사부터 팀장, 센터장까지 경험했고, 지금은 상록수IL센터 총괄팀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IL센터이지만 일에 집중하다 보면 가끔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갈등이 생길 때도 있어요. 그래서 현장의 동료들을 만나면서,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를 계속 스스로 돌아보게 돼요.

     

    공부를 늦게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장녀로 태어나 돌 무렵에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걷지 못하게 됐어요. 동생이 셋이었으니 넉넉지 않은 형편에 부모님은 저만 집중해서 돌보기 어려웠을 거예요. 입학할 나이가 됐지만 학교까지 이동하는 것도 어려웠고, 동생들을 희생시킬 순 없지 않냐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그럴 때마다 부모님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아무 말 못 하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집에서 가정교사를 통해 조금씩 공부했지만 늘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책을 읽었어요.

     

    20대에 직업 훈련원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워 취업을 하고 보니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20대 후반에 검정고시를 시작했어요. 결혼하고 보니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하는 건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힘들다는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느낌이 더 컸어요. 방송대 교육학과를 계속 장학금 받으며 졸업했어요.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서로 과제를 알려주고 시험 정보를 나누면서 함께했던 경험이 컸어요. 그때 공부는 혼자보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는 것이라는 걸 느꼈어요.

     

    장애 여성으로서 전에 하신 일과 사회 생활을 들려주실 수 있어요?

    장애인이라고 하면 부모가 희생하거나 당사자가 희생하거나 그런 구조잖아요. 공부 기회를 놓치고 사회에 나갔기 때문에 저는 더 열심히 배우고 일했어요. 장애인기능대회가 있었는데 나가서 금메달을 땄어요. 이제 세계 대회를 나갈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연습했고 프라하 세계 장애인 기능대회 나갈 티켓도 땄어요. 그런데 저한테 기술 가르쳐준 선생님들이 그렇게까지 할 거 있냐고 반대하시더라고요. 처음부터 하지 말라고 하든지, 장애인에 대한 기대가 아예 없구나, 상처를 많이 받았죠. 튀지 않고 착한 장애인이길 원했던 것 같아요.

    제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그랬어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작업장이었는데, 수녀님들이 제 결혼을 걱정하고 반대했어요. 부모님도 심하게 반대해서 5년을 미루다 결혼했어요. 동료상담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도 비슷했어요. 장애 여성은 교육, 결혼, 출산, 일 등 여러 선택에서 뒤로 밀리고 편견의 대상이에요. 직장에 다닌다고 하면 놀라고, 집이 깨끗하다고 놀라고, 아이를 키운다고 해도 놀라요. 장애인은 돌봄을 받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해요. 저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그 평범함이 오히려 특별한 일이 되는 느낌이 있어요.

     

    비장애인 여성도 두려워하는 결혼인데 참 씩씩하게 사셨어요. 아이 낳고 키우며, 또 워킹맘으로 살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30대 후반에 아이를 가졌을 때도 일을 쉬지 않았어요. 배가 불러서 운전하기 힘든데 사장님이 나와서 같이 밥이라도 먹자며 부르셨어요. 당시엔 생소했던 강아지 옷 만드는 일이었는데 일이 많아서 새벽 7시에 나가서 야근이 많았어요. 한번은 폭설이 내려 청계 터널에서 2시간을 갇혀 있었는데, 다음 날 보니 타이어가 터져 있더라고요. 저는 천주교 신자인데 아이랑 저랑 정말 주님이 살려주셨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었어요.

     

    결혼할 때도 그랬어요. 장애인이 어떻게 살 거냐, 아이는 어떻게 키울 거냐. 저도 아이는 낳지 말자 생각했었죠. 일을 계속하고 싶었고 양육에 자신도 없었죠.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하면서, 일만 하는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를 갖기로 했어요. 임신과 출산 과정은 쉽지 않았어요. 이동도 어렵고 병원 가는 것도 힘들었어요.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는 일을 할 수 없었어요. 맡길 곳이 없어서 제가 아이를 돌보게 되었어요.

     

    Q ‘착한 장애인이라는 기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족 안에서 화목하게 살기 위해서는 많이 참아야 했어요. 장애인이기도 하고 여성이라는 점이 겹치면 어떨까요? 장애인 여성은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양보한다는 기대가 있어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많아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자존감은 많이 낮아져 있었어요.

     

    잘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남들보다 사회생활도 그렇고 뭐든 다 늦었으니까 나는 더 빨리 잘해야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었어요. 이걸 맏딸 콤플렉스라고 하죠? 부모님한테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고, 장애인이라 못한다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딱딱 다 잘 해내려고 했어요. 하지만 10IL활동을 하며 조금씩 달라졌어요.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서로 힘들게 하잖아요. 이제는 못 하는 건 못 한다고 말해요. 어머니에게도 이번에는 못 간다고 말하게 되었어요. 그럴 힘이 생겼죠.

     

    Q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이를 키우다가 어느 순간 다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한 언니가 등록금을 내주며 공부를 꼭 하라고 말했어요.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버지도 응원해 주셨어요. 마흔이 넘어 다시 공부할 때 아버지가 정말 좋아하셨어요. 엄마가 보내준 김치 통 사이에 아버지가 학비에 보태라고 몰래 30만원이 든 봉투를 넣어두셨는데, 김칫국물에 젖은 그 봉투를 보고 마음이 짠했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Q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기나 삶의 전환점이 있었나요?

    2014년에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저를 많이 도와주던 언니도 돌아가시고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였어요. 그 시기에 세월호 참사도 있었고요. 솔직히 우울함도 있었어요. 제가 사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그 사건이 너무 크게 다가왔어요. 그냥 뉴스에 나오는 사건이 아니라 내 아이의 일처럼 느껴졌어요. 앞으로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이래도 되는가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힘든 시기를 통과하며 지역에서 하는 집회나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됐어요. 큰 역할은 아니지만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어요. 연대하고 같이 있는 사람,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Q 장애인에게 일은 어떤 의미라고 보십니까?

    일은 삶을 바꾸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센터에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일자리에 참여하는 분이 내가 번 돈으로 가족들에게 짜장면 한 그릇을 사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라던 말을 잊을 수 없어요. 큰 변화라고 느꼈어요. 일하고 돈을 벌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게 장애인의 삶의 위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살게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중증 장애인에게 일자리는 단순한 수입 이상의 의미를 가져요. 사회의 구성원으로 지역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가 더 커요.

     

    그래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420일을 장애인의 날이 아니라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라 불러요. 시혜적 성격을 거부하고, 장애인 권리(이동권, 탈시설, 교육 등)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날이죠. 올해도 326일에 청와대 앞에서 ‘223.26 전국장애인대회 및 4.20 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출범식을 열었어요. 최옥란 열사 기일에 열린 223.26 대회였죠. 효자동 복지센터 인근에서 출발해서 광화문 광장까지 행진했고 집회하고 열사분들 추모제도 했어요.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전국에서 모여요.


    Q 앞으로의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지금까지 활동하고 또 아이를 기르면서 앞만 보고 살아온 것 같아요. 그런데 작년부터인가 앞으론 어떻게 살지? 이런 고민이 들었어요. 앞만 보고 가지 말고 소소하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과 차도 마시고 서로를 지지하고 나누면서 사는 삶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어요. IL센터의 활동가로 동료상담가로 목소리를 내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면서 살아야죠.

     

    돌아보면 누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온 게 아니라 그때그때 부딪히며 길을 만들어 온 것 같아요. 앞으로도 큰 계획보다는 지금처럼 살 것 같아요. 필요한 자리에 가 있고 연대하며 살고 싶어요.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살았다 싶어요. 앞으로도 휠체어와 함께 제가 길을 만들며 살아갈 것 같아요.

     

     

    “휠체어와 함께 길을 만들며 여기까지 왔어요.”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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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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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활동의 지속 가능성 문제 - 재원을 어디서 만드는가

    공익활동을 지속하는 데 있어 가장 현실적인 장벽 중 하나는 재원이다. 공익적 가치를 추구하는 단체가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어도, 사람을 고용하고 공간을 유지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많은 공익활동단체들이 정부 보조금과 위탁사업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서, 예산이 삭감되거나 사업이 중단되면 단체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반복된다.


    한국의 공익 생태계에서 이 문제는 오래된 숙제다.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기부금 총액은 16.8조 원으로 증가했지만, 개인 기부금 증가폭은 크게 둔화된 것으로 조사됐다. 기부참여율과 평균기부금액 역시 202161.2%, 324,000원에서 202359.8%, 262,000원으로 모두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부의 구조다. 한국의 기부는 전국 단위 대형 모금 단체나 특정 구호·복지 기관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의 공익활동을 위해, 내 이웃들의 필요를 위해 지역 차원에서 자원을 모으고 운용하는 구조는 아직 취약하다.

    이러한 문제를 110년 전 이미 생각하고 해결책을 만들어낸 사람이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변호사이자 은행가였던 프레더릭 해리스 고프(Frederick Harris Goff). 그가 1914년 세운 클리블랜드 파운데이션은 오늘날 '커뮤니티 파운데이션(Community Foundation)'이라는 글로벌 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죽은 손의 자선과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의 등장

    고프는 자선적 기부금이 시대에 뒤떨어진 취소 불가능한 유언장에 묶여버리는 이른바 '죽은 손(dead hand)' 문제를 없애고자 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기부를 하면 그 돈을 설립자 의도에 따라 특정 목적에만 쓰도록 묶이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흘러 사회가 변해도 기부금은 낡은 목적에 고정된 채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고프는 이것을 '죽은 손의 자선'이라 부르며, 지역 사회가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금 구조를 고안했다.

    이처럼 클리블랜드 파운데이션의 기부는 특정 사업이 아닌 파운데이션에 투자함으로써 시간이 흘러도 세대를 넘어 지역사회 변화와 필요에 부응하게 하는 것이 핵심 원칙이다. 이러한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모델은 이후 미국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클리블랜드 파운데이션이 설립된 지 5년 만에 시카고, 보스턴, 밀워키, 미니애폴리스, 버팔로 등에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이 생겨났다.

    오늘날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의 정의는 명확하다.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은 특정 지역의 사회적 개선을 주된 목적으로 기부금을 통합 투자하고 지원금을 지급하는 시민사회의 도구다. 전 세계에 약 1,700개가 존재하며, 그중 700개 이상이 미국에 있다.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이 다른 재단과 구별되는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특정 개인이나 가족이 아닌 지역사회 전체를 위해 설립된다. 둘째, 다양한 기부자들의 기금을 통합 운용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 셋째, 기금의 사용 방향은 지역사회 리더십이 결정한다. 정부 보조금도 아니고, 대기업의 단발성 사회공헌도 아니다. 지역이 스스로 자산을 키우고 지역을 위해 사용하는 구조인 것이다.

    미국 재단 협의회(Council on Foundations)가 집계한 2023년 데이터에 따르면, 참여 커뮤니티 파운데이션들은 1,52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160억 달러 이상의 기부를 받고, 190억 달러에 가까운 보조금을 지급했다고 알려진다.

    기부를 설계하는 방식 : 기부자 조언 기금(DAF)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운영에서 빠질 수 없는 개념이 바로 '기부자 조언 기금(DAF, Donor-Advised Fund)'이다. DAF는 기부자가 재단에 기금을 납입하면 즉시 세금 혜택을 받고, 이후 원하는 시점에 지원할 단체와 금액을 추천하는 방식을 말한다. 재단이 자금을 운용하고, 기부자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반영하며 기부를 이어갈 수 있다.

    이 구조는 단순히 편리한 것을 넘어, 기부를 '일회성 행위'에서 '지속적 관계'로 전환 시킨다. 기부자는 재단과 파트너가 되어 지역사회 현안을 이해하고, 자신의 기부가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 추적한다. 기부가 재산 이전이 아니라 시민적 실천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미국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의 기부자 조언 기금 자산은 2022년 기준 전체 자산의 약 36%를 차지한다. 이는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이 운용하는 자산의 상당 부분이 기부자들의 적극적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테크 기부문화의 허브 : 실리콘밸리 커뮤니티 파운데이션(SVCF)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의 현대적 성공 사례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 사례는 실리콘밸리 커뮤니티 파운데이션(SVCF, Silicon Valley Community Foundation)이다. SVCF는 캘리포니아 산마테오와 산타클라라 카운티를 핵심 지역으로 삼아 운영되며, 구글, 애플, 메타 같은 세계적 테크 기업들과 그 기업에서 부를 일군 개인들이 밀집한 실리콘밸리의 자원을 지역 공익에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실리콘밸리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은 2023년 기준 8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며 정치적인 좌우를 가리지 않는 기금 지원 조직이다. 규모도 인상적이다. 2023SVCF5,500개 이상의 비영리단체와 지역사회 조직에 총 458,000만 달러(6조 원)의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이 중 31억 달러는 베이 에어리어 10개 카운티의 단체들을 직접 지원했다. 이는 캘리포니아주 어떤 단체보다 많은 금액이다.


    SVCF는 미국에서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기부 재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게이츠 재단과 달리 SVCF는 특정 지역에 집중하는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SVCF의 핵심 지원 분야는 금융 안정성, 영유아 발달, 주거 문제다. 실리콘밸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극심한 주거 불안정과 소득 격차 문제를 안고 있다. SVCF는 이 모순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위해 설립됐다.


    2024SVCF는 지역사회 행동 보조금 프로그램을 통해 산마테오와 산타클라라 카운티에서 역사적으로 차별받고 자원 접근이 제한되어 있던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115개 비영리단체를 지원했다. 예술·문화, 환경 보호, 지역 언론, 보건 서비스, 사회 운동 등 다양한 분야가 포함되었다.

    DAF를 통한 기부 방식도 특징적이다. SVCF가 보유한 DAF 가운데 상당수는 잔액이 25,000달러 이하로, 거액 자산가가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는 비교적 개방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한 SVCF는 기부자들이 2년 이상 지급 추천을 하지 않을 경우 해당 자금을 지역 공익 기금으로 전환하는 정책도 운영하며, 기금이 실제로 지역에 흘러가도록 적극 관리한다.


    데이터 기반의 백 년 지원 : 뉴욕 커뮤니티 트러스트(NYCT)


    또 다른 사례로는 1924년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중 하나인 뉴욕 커뮤니티 트러스트(NYCT, The New York Community Trust)를 들 수 있다. 뉴욕시, 롱아일랜드, 웨스트체스터를 주요 지원 지역으로 삼아 100년 가까이 운영되어온 이 재단은 규모와 역사 모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2024년 뉴욕 커뮤니티 트러스트는 10,546개 단체에 총 2390만 달러(2,700억 원)의 보조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단순히 많은 금액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지원받는 단체 수가 1만여 개라는 것은 뉴욕의 수많은 소규모 비영리단체들이 이 재단을 통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NYCT의 특징은 데이터와 연구에 기반한 지원 방식이다. 교육, 주거, 이민자 지원, 환경, 보건, 장애인 서비스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뉴욕시의 현안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어느 분야에 자원이 부족한지 파악해 전략적으로 지원한다. 모든 지원 내역과 수혜 단체 정보는 공개되어 투명성을 보장한다.


    NYCT2024년 연간보고서가 집중한 주제는 '돌봄 노동자'였는데, 보육을 위한 운동, 24시간 교대근무 종료 캠페인 등 돌봄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피지원 단체들의 활동을 조명하며, 더 접근 가능하고 공정한 지역 사회를 위한 핵심 의제로 다루었다. 매년 다른 주제를 설정해 지역사회의 핵심 현안을 공론화하는 방식은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이 단순한 자금 전달자를 넘어 지역 공론장의 설계자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NYCT의 지원 철학은 개별 수혜자 지원을 넘어 시스템 변화, 정책 영향, 분야 전체의 개선을 지향한다. 즉 근본 원인을 다루고 확장 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업을 우선시한다.


    한국과 비교, 무엇이 다르고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미국의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모델과 한국의 기부 생태계를 비교하면 몇 가지 구조적 차이가 드러난다.

     

    먼저 규모와 지역성의 차이다. 미국에는 약 900개의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이 있으며, 이들은 연간 148억 달러 이상을 지원하고 1,127억 달러 이상의 자선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각 파운데이션은 자신이 속한 지역을 위해 특화된 방식으로 운영된다. 반면 한국의 공익 기부는 전국 단위 대형 단체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지역 단위에서 자산을 형성하고 지역 필요에 맞게 운용하는 구조는 아직 부족한 단계다.

     

    둘째, 세제 구조의 차이다. 미국의 DAF 시스템은 기부자가 기금을 납입하는 즉시 세금 혜택을 받고,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나눠서 지원할 수 있다. 이 구조는 특히 주식이나 부동산 등 비현금 자산의 기부를 촉진한다. 반면 한국의 세제 지원 구조는 기부 즉시 사용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아, 장기적 자산 형성과 운용을 지원하는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모델이 뿌리내리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에도 지역 기부문화를 활성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BTS 멤버 제이홉이 고향인 광주 북구에 동참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끌었던 고향사랑기부제가 바로 그것이다. 2023년부터 본격 시행된 고향사랑기부제는 기부자가 특정 지자체에 기부하면 세액공제와 답례품을 받는 방식으로, 지역 자원의 지역 환류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다만 기금의 운용 방식, 지역 시민사회와의 연계, 장기적 자산 형성 측면에서는 아직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모델과 격차가 크다.

    지역이 만든 기금, 지역으로 흐른다

     

    미국의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모델에서 한국의 공익활동 생태계가 참고할 수 있는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성이 기부의 동력이 된다. SVCF가 실리콘밸리 거주자들의 거대한 기부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내 이웃의 문제를 내가 해결한다"는 지역적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31개 시·군에서 생산되는 공익활동 콘텐츠와 정보가 지역 주민들의 기부 동기와 연결될 때, 더 강한 지역 기부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둘째, 투명성과 데이터가 신뢰를 만든다. NYCT가 매년 어디에 얼마를 지원했는지 전체 목록을 공개하는 것처럼, 공익 자원의 흐름이 투명하게 공개될 때 기부자의 신뢰가 높아진다. 한국에서 기부 문화 저평가의 주요 이유로 '기부금 횡령·유용 사례가 많아서'(54%)'기부 기관의 신뢰도가 낮아서'(51%)가 꼽혔다. 이 신뢰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데이터 기반의 투명한 공개다.


    셋째, 기부 참여의 문턱을 낮추되 기금의 지속성을 높인다. SVCFDAF 기금 중 3분의 1 이상이 25,000달러 이하의 소규모라는 것은, 부자만의 기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소액이라도 지역 공익을 위한 기부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그 기금이 장기적으로 지역 내에서 운용되도록 설계하는 것이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의 핵심이다.

    이처럼 1914년 프레더릭 고프가 클리블랜드에서 시작한 작은 아이디어는 110년이 지나 전 세계 1,700개의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으로 자랐다. 그 아이디어의 핵심은 간단하다. 지역의 자산이 지역을 위해 쓰일 때, 그리고 그것이 세대를 넘어 지속될 때, 공익 생태계가 자생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공익활동 생태계가 정부 보조금 의존 구조를 넘어서려면, 지역 사회 내에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자원 흐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 자료


    클리블랜드 파운데이션 공식 홈페이지 ? Overview :
    https://www.clevelandfoundation.org/about-us/overview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리서치앤트레이닝 인스티튜트 - Community Foundation Census 2023 :
    https://www.cfrti.com/researchavailable


    Council on Foundations - 2023 CF Insights Survey Results :
    https://cof.org/cfinsights/results


    Community Foundation Awareness Initiative :
    https://www.commfoundations.com/communityfoundations


    실리콘밸리 커뮤니티 파운데이션(SVCF) - 2023년 보조금 보도자료 :
    https://www.globenewswire.com/news-release/2024/03/29/2854793/0/en/Silicon-Valley-Community-Foundation-granted-more-than-3-billion-to-Bay-Area-nonprofits-in-2023


    SVCF - 커뮤니티 행동 보조금 보도자료 2024 :
    https://www.svcf.org/about/news-media/press-releases/silicon-valley-community-foundations-community-action-grants-supported-more-than-100-local-organizations-in-2024

     


    SVCF - 2023-24 연간보고서 :
    https://www.svcf.org/annual-reports/2023


    뉴욕 커뮤니티 트러스트(NYCT) - 2024 보조금 목록 :
    https://thenytrust.org/about/financials-annual-reports/grants/

     


    NYCT - 연간보고서 및 재무 :
    https://thenytrust.org/about/financials-annual-reports/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 2024년 기부금 총액 분석 :
    https://research.beautifulfund.org/13835/


    더나은미래 - 2023년 기부 금액·참여율 현황 :
    https://futurechosun.com/archives/104818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 기부 참여율과 기부금액 변화 통계 :
    https://research.beautifulfund.org/16076/


    목회데이터연구소 넘버즈 - 한국인의 기부 현주소 :
    http://www.mhdata.or.kr/bbs/board.php?bo_table=koreadata&wr_id=352

    지역이 스스로 키우는 공익-미국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모델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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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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