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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미리캔버스 @PIXABAY
     
     
    
    데이트 폭력은 스토킹에서부터 항체적 폭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최근 사례들은 그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기도 성남에서는 아파트 보안 직원이 거주 여성을 지속적으로 스토킹하다 결국 구속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초기에 체포영장이 두 차례나 기각되자 프로파일러의 분석을 통해 재범 위험성과 강력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를 근거로 법원이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스토킹 행위라도 재범 가능성이 높을 경우 적극적인 사법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사건으로는 태권도 선수인 30대 남성이 연인 관계에 있던 여성을 집요하게 통제하다가 술자리 말다툼 중 뒷덜미를 잡아당기고, 신고를 막기 위해 휴대전화를 빼앗아 던진 뒤 얼굴에 발차기까지 가한 사례가 있습니다. 피해자는 안와골절로 수술까지 받아야 했고, 평소에도 위치 추적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감시와 집 비밀번호를 몰래 알아내 무단 침입을 당하는 등 지속적인 공포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스토킹과 데이트 폭력은 피해자의 안전과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 중대한 범죄로 비화할 위험이 높습니다. 결국 두 사건은 데이트 폭력이 단순한 연인 간 갈등이나 일시적 다툼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범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과 더불어, 경찰과 법원이 조기 개입하여 재범을 차단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데이트 폭력이란 무엇인가?
     
    데이트 폭력은 흔히 단순한 연인 간 다툼이나 갈등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사실상 연애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포괄하는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데이트라는 이름 때문에 사소한 갈등처럼 치부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신체적 폭행, 언어적 모욕, 정서적 괴롭힘, 경제적 착취, 성적 강요, 그리고 스토킹이나 감금과 같은 위협적 행위까지 포함됩니다.
     
    우선 신체적 폭력은 가장 눈에 띄는 형태로, 밀치기·뺨 때리기·머리채를 잡는 행위 등 직접적인 신체적 공격이 이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데이트 폭력은 이보다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 언어적·정서적 폭력의 경우, 반복적인 욕설이나 고성, 모욕적인 언행을 통해 상대방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정신적으로 위축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네 잘못이야”라고 문제의 원인을 일방적으로 전가하거나, 지속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행위도 심리적 폭력의 일환입니다. 경제적 폭력 역시 연애 관계에서 빈번히 발생합니다. 상대방의 경제 활동을 제한하거나, 금전 사용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심지어 돈을 갈취하거나 경제적 의존 상태를 악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피해자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결국 가해자에게 종속되도록 하는 위험한 수단이 됩니다. 더 나아가 성적 폭력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연인 관계라는 이유로 동의 없는 스킨십이나 성관계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히 성범죄에 해당합니다. 사귀는 사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신체 접촉은 ‘강제추행’이나 ‘강간’으로 처벌될 수 있으며, 실제 법원 판례에서도 이를 엄격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디지털 폭력이 점차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피해자의 휴대폰을 무단으로 확인하거나 위치정보를 추적하고, 사적인 사진이나 영상을 빌미로 협박하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딥페이크 기술을 악용해 피해자의 얼굴을 합성한 불법 영상물을 제작·유포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어 사회적으로 큰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데이트 폭력이 더욱 심각한 이유는 피해자가 이러한 폭력 상황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관계 때문에 거부 의사를 드러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니까 참아야 한다"라는 왜곡된 정서나, “헤어지자”는 말을 꺼낼 때 발생할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피해자의 침묵을 불러옵니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데이트 폭력은 일반적인 폭력 범죄보다 은폐율이 높고, 신고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다수 존재합니다.
     
    가해자의 성별은 남녀를 가리지 않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대체로 남성이 가해자, 여성이 피해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피해자들은 20~30대가 주를 이루며, 연애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게 의존하거나 신뢰를 보낸 상태에서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심리적 충격과 배신감이 일반적인 폭행 사건보다 훨씬 크고, 장기적인 정신적 후유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결국 데이트 폭력이란 연인 간 갈등의 수준을 넘어선, 관계의 친밀성과 의존성을 악용한 권력형 폭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다툼으로 축소하거나 ‘사적인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되며, 사회적으로 명백한 범죄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만 피해자가 안전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반복적인 가해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데이트 폭력이 미치는 악영향
     
    데이트 폭력은 피해자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심각한 파장을 미칩니다. 먼저 개인적 차원에서 피해자는 신체적 상처뿐 아니라 장기적인 정신적 후유증을 겪게 됩니다. 폭행으로 인한 골절, 상처, 흉터 등 신체적 피해는 눈에 보이는 상처이지만, 더 큰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상처입니다. 지속적인 폭언, 협박, 감시와 같은 정서적 폭력은 피해자의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며, 불안 장애,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가해자가 가까운 연인이기 때문에 신뢰와 애정의 배신감이 동반되어, 피해자는 대인관계 전반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가지게 되고 이후 정상적인 사회생활과 인간관계 형성에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경제적 악영향도 큽니다. 일부 가해자는 피해자의 재정 활동을 통제하거나 금전을 갈취함으로써 피해자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기도 합니다. 피해자는 치료비, 변호사 비용 등으로 추가적인 경제적 부담을 떠안으며, 직장 생활에도 집중하지 못해 경력 단절이나 소득 감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자립 기반을 잃고, 결국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데이트 폭력은 여러 문제를 낳습니다. 피해자가 신고를 주저하거나 고소를 취하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범죄가 은폐되고, 이는 가해자의 재범으로 이어질 위험성을 높입니다. 실제로 많은 데이트 폭력 사건이 심각한 살인이나 강력 범죄로 비화하는 경우가 있어 사회적 안전을 위협합니다. 또한 피해자가 학업이나 직장에서 이탈하면서 사회적 생산성 저하가 발생하고, 의료·사법·복지 등 국가 자원이 추가로 소모되는 부정적 효과도 큽니다. 무엇보다도 데이트 폭력을 단순한 연인 간 갈등으로 치부하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은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주고, 폭력이 용인되는 분위기를 조성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결국 데이트 폭력은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파괴하고, 경제적 자립을 약화시키며, 사회적 비용과 불안을 증가시키는 복합적 범죄입니다. 단순한 사적 문제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 강화, 사회적 인식 개선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데이트 폭력의 실태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데이트 폭력은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며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경찰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약 7만 건이던 신고 건수가 2023년에는 7만 7천여 건으로 늘었고, 2024년에는 8만 8천 건을 넘어 불과 2년 사이 1만 건 이상 폭증했습니다. 특히 단순한 폭행 수준을 넘어 성폭력이나 감금, 협박을 동반한 범죄의 증가세가 두드러지며, 피해의 양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가해자는 주로 2030대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피해자는 2030대 여성이 많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교제 폭력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체적 폭행에서 그치지 않고 디지털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피해자의 스마트폰 위치를 추적하거나, 사적인 사진과 영상을 빌미로 협박하는 방식이 빈번히 활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딥페이크 기술을 악용해 성적 영상물을 제작·유포하겠다고 위협하는 사례까지 나타나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피해자들은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해자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나 주변의 시선, 혹은 관계 유지에 대한 압박 때문에 폭력 피해를 숨기고 참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법제도의 미비점도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현행법상 데이트 폭력은 가정폭력처벌법의 보호 범위에 포함되지 않아, 피해자는 일반 폭력 사건과 동일한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이 때문에 경찰이나 법원으로부터 신속한 보호 조치를 받기 어렵고,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는 경우 피해자가 처벌 의사를 철회하면 사건이 무마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회유나 협박에 의해 끝내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결국 데이트 폭력은 단순히 연인 간의 갈등을 넘어선 구조적 범죄이며,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특수성이 존재합니다. 통계에 드러난 수치만 보더라도 그 심각성이 충분히 확인되지만, 신고되지 않은 은폐된 피해 사례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따라서 데이트 폭력을 개인 간 사적인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사회 전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경기도의 대응
     
    경기도는 최근 급증하는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범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피해자 안전망 강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보호가 미흡하다는 사회적 비판이 잇따르자, 경기도는 지자체 차원에서 선제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안심 패키지 지원 사업’과 ‘바로희망팀 운영’은 대표적인 대응 사례로 꼽힙니다.
     
    먼저 수원시는 여성 1인 가구와 범죄 피해자를 대상으로 ‘여성안심 패키지 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들이 집 안에서조차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한 생활 밀착형 지원책입니다. 지원 물품에는 창문 잠금장치와 휴대용 비상벨, 안심 경보기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상황에 따라 스마트 도어벨이나 홈 카메라 중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스마트 도어벨은 방문자가 초인종을 누르면 실시간으로 스마트폰 화면에 영상이 전송되어 신원을 확인할 수 있고, 홈 카메라는 집 내부를 원격으로 확인할 수 있어 침입이나 위협 상황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러한 장치는 단순한 방범 효과를 넘어, 여성들이 “혼자 사는 집”이라는 이유로 겪는 구조적 불안을 완화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지원 사업은 우선순위를 설정해 범죄 피해자, 저소득 여성 1인 가구, 한 부모 가정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제공되고 있어, 실질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집중 지원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한편, 안성시는 ‘바로희망팀’을 신설하여 가정폭력, 성폭력, 스토킹, 데이트 폭력 사건을 전담 처리하는 시스템을 마련했습니다. 기존에는 피해자들이 사건 발생 직후 경찰, 상담 기관, 법률 지원 센터 등 여러 기관을 일일이 찾아가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심리적 부담과 시간적 지연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로희망팀은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한 장소에서 상담, 안전 점검, 법률 상담, 복지 자원 연결, 심리 지원, 심지어 생계와 일자리 지원까지 제공하는 원스톱(one-stop)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팀 구성에도 전문성이 강화되어 있어, 경찰관이 현장 치안을 담당하고, 전문 상담사가 피해자의 심리적 안정을 돕고, 변호사가 법적 절차를 안내함으로써 피해자 보호와 권리 보장을 동시에 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경기도의 대응은 단순히 범죄 발생 후 사후 지원에 머무르지 않고, 범죄 예방과 피해 최소화라는 이중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여성안심 패키지는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여 범죄 발생 가능성을 낮추고, 바로희망팀은 범죄 발생 이후 신속하고 통합적인 대응으로 2차 피해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두 정책 모두 피해자들이 여러 기관을 전전하지 않고도 즉각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심리적 안정과 제도적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궁극적으로 경기도의 대응은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을 단순히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의 안전과 직결된 사회 범죄로 인식하고, 이를 지자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결하려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피해자들이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동시에, 향후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중요한 정책적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탈을 쓴 폭력, 경기도가 움직였다
    주야

    조회수 38

    2025-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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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 목소리로 만든 균형발전 정책
    - 왜 ‘주민참여’가 중요한가? -
     
     
     
    도시가 발전하려면 인프라와 예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민참여’입니다. 주민참여란, 행정기관이 일방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민이 직접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 방안을 함께 논의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의견 수렴을 넘어, 정책의 설계·집행·평가에 주민이 관여함으로써 정책의 실효성지속 가능성을 높입니다.
     
    2025년 주민참여 제안 공모가 짧게는 2026년부터 29년까지 정책에 반영하는 공고가 전국적으로 공고되었습니다.
     
    제가 거주하고 있는 의왕시에서는 2025년 8월 6일 의왕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2035 의왕도시기본계획 일부 변경 수립(안) 주민공청회'에서 의왕시의회 김태흥 부의장이 토론자로 나서 의왕시의 향후 도시계획 미래 발전 방향과 주요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시내 복지관, 평생학습관, 가족센터 등의 기관에서 선정한 시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각 기관에서 추천한 시민과의 인터뷰가 8월 14일 의왕시 가족센터에서 진행되어 현장 취재를 하였습니다.
     
     
      
    의왕시 가족센터, 주민의견조사 안내문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이날 참여한 시민은 1인 가구, 육아 부모, 다문화 가정으로 사단법인 의왕시장애아재활치료교육센터 강성하센터장이 진행하였습니다. 강센터장은 의왕시 복지분과 위원으로 “행정이 일방적으로 만든 계획이 아닌, 현장에서 나온 생생한 요구를 반영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고 강조하면서 올해 지속적으로 시내 기관, 마을공동체가 추천하는 시민과의 대화와 의견 제안 수렴의 시간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느끼는 필요와 제안
     
    1인 가구 – “혼자 사는 건 자유롭지만, 가끔 너무 조용해요”
     
    인터뷰이: 박 00(61세, 포일동 거주, 중장년 1인 가구)
    배경: 외지인, 무직, 25년째 혼자 생활.
     
    Q. 요즘 1인 가구로 살면서 가장 불편한 점은 무엇인가요?
    먹고사는게 문제, 그리고 아프거나 사고라도 나면, 누구한테 연락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예전에 독감으로 며칠 누웠을 때 밥도 못 챙기고 힘들었어요.
     
    Q. 의왕시에서 제공하는 1인 가구 지원정책을 이용해 본 적이 있나요?
    안전 점검 서비스나 건강검진 안내를 받긴 했는데, 좀 형식적이라는 느낌이었어요.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건 가족센터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취미 모임’이나 ‘동네 커뮤니티’ 같은 데서 사람들을 만나는 거예요.
     
    Q.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1인 가구 모임을 동네별로 만들고, 아플 때 바로 도움받을 수 있는 ‘응급 연락망’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40~60 대 1인 가구는 취미·건강·재취업까지 연계하는 프로그램이 꼭 필요합니다.
     
     
    육아 부모 – “아이 키우는 건 온 마을이 같이 해야 해요”
     
    인터뷰이: 이 00(40대 중반, 오전동 거주, 세 아이 엄마)
    배경: 첫째 13세, 둘째 8세, 셋째 28개월.
     
    Q. 육아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연령 별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많아 가족 전체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8개월 된 유아 프로그램이 없어 직접 도서관이나 놀이 기관을 찾는 일이 힘듭니다.
     
    Q. 28개 월 육아 프로그램은 어떤 점이 좋았나요?
    아이랑 같이 참여하는 ‘책 읽어주는 엄마’, ‘창의 미술교실’ 같은 건 정말 좋아요. 그런데 프로그램 시간이 대부분 오전이라, 직장 다니는 부모는 참여하기 어려운 게 아쉽죠.
     
    Q. 정책적으로 보완이 필요하다면?
    저녁이나 주말에도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해요. 그리고 육아 프로그램과 ‘돌봄 서비스’를 연계하면, 아이를 맡기고 바로 다른 일을 보거나 취미활동을 할 수 있어서 더 좋을 것 같아요.
     
     
    다문화 가정 학부모 – “아이의 언어와 마음을 동시에 돌봐주세요”
     
    인터뷰이: 죠00(40대, 부곡동 거주, 필리핀 출신, 20세,18세 자녀(따로 거주), 7세, 4세 자녀)
    배경: 한국 생활 20년 차. 주말부부
     
    Q. 다문화 가정으로서 교육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영어학원을 보내고 싶은데 비용과 안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돌봄서비스를 받지 못해 4세 아이를 돌보느라 많이 힘듭니다. 제가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으니 교육 정보나 서비스를 찾기가 어려워요.
     
    Q. 다문화 자녀 교육 프로그램을 이용해 본 적 있나요?
    네, 이용해 본 적 있어요. 그런데 태권도 학원처럼 종일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면 막내 아이를 맡기기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Q. 바라는 지원은 어떤 건가요?
    내년에는 취업을 하여 일을 하고 싶은데 전문직으로는 힘들 것 같고 돌봄서비스를 할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있는데 쉽지가 않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문화적으로 적응 안 되는 부분도 있고, 특히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지 않아 지역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지역주민 의견조사 인터뷰 진행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주민이 전한 이야기는 모두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맞춤형 지원’과 ‘연계성’을 강조했습니다. 1인 가구는 생활 안전망과 커뮤니티, 육아 부모는 시간대 다양화, 다문화 가정은 언어·문화 통합 지원, 돌봄 서비스 이용자는 개별화된 프로그램과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요구했습니다.
     
    의왕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지역에서 균형발전 정책은 책상 위 계획서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변화는, 그 계획이 주민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확인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오늘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주민 목소리로 만든 균형발전 정책
    럭비공

    조회수 119

    202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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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호의 해린' 공연이 진행된 정조테마공연장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 마음을 여는 첫 울림
     
    무대 위 조명이 은은하게 번져가는 그 순간이었다. 막이 오르기도 전에 먼저 찾아온 것은 북소리도, 춤사위도 아닌, 따뜻한 목소리들이었다. 영상 속에서 흘러나오는 오랜 벗들의 인사말.
     
    "고생 많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 짧은 말속에 스며든 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함께 웃고 울었던 수십 년의 세월,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어온 험한 길들, 그리고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굿판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구나.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음의 장단이 벌써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공연 팜플렛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제1장 ― 신명, 그 첫 만남의 떨림
     
    첫 번째 마당, 진도 북놀이가 시작되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북채가 가죽을 때리는 그 순간, 마치 심장이 한 박자 더 뛰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장단이 울려 퍼질 때마다 객석의 모든 이들은 하나가 되어 몸을 흔들었다. 나 역시 어느새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고, 발끝까지 전해지는 진동에 온몸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1985년 경기대 풍물패 '얼마당'의 청년 이성호가 상상이 되었다. 스무 살 청춘이 처음 북채를 잡았던 그 떨리는 순간부터, 지금 이 무대에 서기까지의 40년. 그 긴 여정이 장단 하나, 하나에 스며들어 있었다. 풍물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숨결이자,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영혼의 다리였다. 그 인연이 이제는 무대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공연 팜플렛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제2장 ― 해린, 그 이름에 깃든 이야기
     
    지승 스님이 정성스럽게 지어주신 ‘해린’이라는 호에는 잔잔한 물결 위로 햇살이 반짝이며, 만들어내는 물비늘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파도와 햇살이 끝없이 춤추고 있는 것처럼 이성호에게 ‘해린’이라는 호는 어울렸다.
     
    두 번째 마당 소리굿에서 그는 정말로 해린 그 자체가 되었다. 거친 목소리에 실려 나오는 살아온 이야기. 풍물 굿패에서의 추억들, 민주주의의 거친 현장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풍물의 울림, 동지들과 어깨를 맞대고 춘 그 수많은 밤들을 보는 듯했다.
     
    소리 하나, 하나가 삶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당당하게, 때로는 그리움에 젖어 들었다. 무대를 채우는 공기마저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같았다. 굿은 단순한 흥겨움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살아온 모든 순간을 품고, 앞으로 걸어갈 희망을 노래하는 깊은 언어였다.
     
     
    공연 팜플렛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제3장 ― 예의 길, 사랑의 춤
     
    세 번째 마당 부포 춤이 시작되자, 나는 숨을 멈췄다. 하얀 부포가 공중에서 꽃잎처럼 흩날릴 때마다, 무대 전체가 환상적인 빛으로 물들었다. 부포는 살아있는 것처럼 춤췄고, 그 속에서 이성호라는 사람의 영혼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굿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그 소중한 가르침이 부포의 원을 그리는 궤적마다 새겨져 있었다. 예술(藝)의 길을 걸으면서도 사람을 향한 예(禮)를 잊지 않았던 삶. 기교를 뽐내기보다는 마음을 전하려 했던 춤사위.
     
    부포가 하늘 높이 치솟을 때마다 나의 마음도 함께 날아올랐다. 이것은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한 풍물꾼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깨달음의 결정체였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삶에 대한 다짐이었다. 객석의 모든 이들이 그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공연 팜플렛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제4장 ― 삶의 터, 함께하는 울림
     
    마지막 판굿이 시작되자 무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다. 함께 한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어 장단을 풀어내는 그 순간, 신명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이 판굿은 그저 흥겨운 마무리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너무나 깊은 의미가 스며들어 있었다.
     
    매향리의 그 메마른 땅에서, 대추리의 눈물 젖은 들판에서, 용산참사의 아픈 현장에서, 세월호의 차가운 바닷가에서…. 그 모든 곳에서 풍물은 늘 사람들과 함께 울었다. 억울하게 떠난 영혼들을 기리고, 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목소리 없는 자들의 외침을 대신했다.
     
    굿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었다. 삶이자 투쟁이었고, 위로이자 연대였다.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오는 장단 소리는 곧바로 광장과 거리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써 내려온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역사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판굿은 진정한 '삶의 터'였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공연 사진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 한 사람의 발자취, 모두의 기억
     
    공연 내내, 그리고 여운이 가시지 않는 지금까지도, 나는 이성호라는 사람이 걸어온 길을 떠올린다. 1988년 수원 민주 문화운동연합에서의 첫 발걸음부터, 문화공간 삶터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만남, 풍물굿 패 삶터에서 함께 만들어온 수많은 감동의 순간들.
     
    정월대보름마다 이어온 지신밟기, 겨울밤을 따뜻하게 만든 달집 축제, 새해를 맞이하는 해맞이 축제까지. 30여 년 동안 지역의 굿판을 이끌어온 그 모든 발자취가 오늘 무대 위에서 되살아났다.
     
    매향리와 대추리, 강정마을, 용산참사, 세월호 현장에서도 절대로 멈추지 않았던 풍물의 울림. 심지어 러시아, 일본, 베트남, 독일까지, 국경을 넘어서도 굿의 감동을 전해온 그 놀라운 여정.
     
    그의 삶은 예술이었다. 동시에 치열한 운동이었다. 무엇보다 사람과 함께 살아온 아름다운 연대의 역사였다. 그 모든 것이 오늘 밤 한 무대 위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공연 사진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 객석에서 흘러나온 진심
     
    공연 내내 객석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힘찬 박수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 무대 위의 주인공만큼이나 객석에 앉은 이들도 특별했다. 이성호와 함께 세월을 살아온 소중한 벗들, 같은 길을 걸어온 동지들, 그리고 그의 굿을 사랑해 온 모든 사람이었다.
     
    함께한 인연들이 보내는 뜨거운 눈물과 환호는 굿판을 더욱 벅차게 만들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이들이 하나의 큰 굿판 안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그 가운데 앉아 있던 나 또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뜨거운 울림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공연을 보았다'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경험이었다. 한 사람의 삶 전체가, 그 삶과 함께 해온 공동체의 소중한 기억들이,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일궈온 민주주의의 역사가 굿판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공연 후 인사 (위: 무대, 아래: 객석)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 늦은 깨달음과 새로운 다짐
     
    공연이 끝나고 여운에 젖어 있던 나는,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오늘 무대에서 풍물을 치던 그 사람이 바로, 수많은 현장마다 늘 앞장서서 함께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음을 기억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무지함이 부끄러웠고, 그런 나 자신이 미안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다짐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소중한 현장에서, 그와 함께 더 자주 마주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앞섰다.
     
    "굿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나금추 선생님의 그 소중한 가르침처럼, 이성호의 굿은 앞으로도 사람과 사람을 잇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며,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울리면서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는 더 평등하고 안전한 세상을,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며 살 것이다.
     
    그의 건강한 모습을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그의 굿이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심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굿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 이성호의 해린
    윤작가

    조회수 114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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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100. 세계의 기업이 무한한 재생에너지에 주목하는 것처럼, 우리는 ‘지속가능성’이라는 공공의 가치가 주목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 다양한 청년 공익활동가들의 지속 가능한 활동의 중요성도 대두되고 있는데요. 따라서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는 청년 활동가들의 현실과 미래 가능성을 들여다보기 위한 2025 청년활동가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이른바 “N년 뒤, 나는 여전히 활동가일까?” 간담회였는데요. 그 활기찼던 현장으로 같이 떠나보시죠!
     
     
    청년 활동가 간담회 <지속가능한 공익활동을 위한 질문 - N 년 뒤, 나는 여전히 활동가일까?>는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유명화 센터장의 개회사로 문을 열었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이번 행사는 청년 플로우 2기가 주관하였고 지속 가능한 공익활동에 관심 있는 30여 명의 청년들이 자리해 주셨습니다. 오늘을 통해 모두가 청년 공익활동 실태와 주요 과제를 도출하고 정서적 교류를 하길 희망하였습니다. 또한 청년 네트워크 구축과 청년 플로우 위원회의 활동도 내실화하기를 목표하였습니다.
     
     
     
    발제
    ● 강필준(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
     
     
     
    강필준 활동가(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가 "<공익활동가 지수>로 보는 청년 공익활동가의 현실"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이번 간담회는 두 가지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먼저 사단법인 시민이 2023년에 연구한 「한국 청년층의 시민사회 공익활동 현황조사」를 통해 청년들이 공익활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에서 진행한 「2025 공익활동가 지속 가능지수 연구」의 '공익활동가 지수' 항목을 바탕으로 청년 공익활동의 문제점들을 추려 이야기해 보는 토크 자료를 만들었고 청년 플로우 2기 논의의 주요 의제로도 채택하기로 하였습니다.
    발제는 강필준 활동가가 준비한 “<공익활동가 지수>로 보는 청년 공익활동가의 현실”이었는데요. 우선 청년 공익활동가 지표를 통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경제적 여건(평균 값)에서 급여는 2,170,000원(세전/2025), 부채는 18,270,000원(일반청년x1.5), 주거비용은 월 574,350원이었습니다. 최저임금 미만 활동가는 5명 중 1명, 기대출 평균 이율은 11.7%(시중은행 평균 4%)를 기록하였습니다. 사회적 여건에서 1인 가구 활동가는 65.2%(평균 56.9%), 평균 관계망은 6명(평균 3.7명), 활동 중점 업무는 의제 41%/서비스 58%를 기록하였습니다.
     
    나아가 공익활동가 지수를 토대로 청년 공익활동의 현실을 수치화하여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공익활동가 지속 가능지수는 2020년에서 2025년까지 60점대로 낮은 점수에 머물러있고 특히 청년 활동가는 올해 60.7점(전체 65.4)으로 활동 만족도/동료 관계/역량 등에서 비교적 낮은 점수를 기록하였습니다.
     
     
    플로어 중 한 명이 공익활동가 지수 측정 항목을 살펴보며 공감 가는 부분을 선별하고 있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특히 조직 문화(자율성/의사소통/민주적 의사결정)에서 평균 약 3.65로 전체 집단 중 제일 크게 낮은 점수를 보였습니다. 활동가 정체성/만족도도 가장 많이 하락하고 있는데요. 정체성(사명감/비전/자부심)과 만족도(적극성/지원/발전) 평균 수치는 3.58, 3.64로 전체 집단 중 제일 큰 점수 차이를 보였습니다. 반면 Z세대에 이를수록 급여 만족이 약 3.2점을 기록하며 전체 집단 중 제일 큰 점수 차의 만족도를 보였는데요.
    이를 통해 청년 활동가들의 경제적·사회적·심리적 어려움과 조직문화 과제를 고민하게 됐고 장기적 가능성이 있는 시민운동의 방향성을 마련하는 것에 크게 공감하게 됐습니다. 더 깊은 이야기는 패널토크를 통해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패널토크
    ● 사회자: 최승환(의정부 자연에너지 협동조합)
    ● 패널
    1) 김누리(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 이음)
    2) 강필준(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
    3) 유보희(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정책협력팀)
     
     
    “N 년 뒤, 나는 여전히 활동가일까?”라는 주제로 패널토크 중 김누리 패널이 발언을 하고 있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이어진 패널/플로어 토크에서는 “N 년 뒤, 나는 여전히 활동가일까?”라는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진행하기로 하였는데요. 앞서 살펴본 공익활동가 지수를 바탕으로 큰 공감대를 형성한 문항들을 선별해 토의하기로 하였습니다. 주요 내용을 Q&A로 정리하였습니다.
     
     
     
    1. 급여 액수는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보희) 연구 결과에서 만족도가 높아졌어도, 3.0점 대는 여전히 낮은 점수라고 생각해요. 시민운동이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고, 최저임금 보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단체 회원의 회비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의 특성상 회원이 줄어들면 운영비 부족이라는 한계는 늘 존재해왔어요. 혼자 활동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삶의 변화를 겪으면서는 적은 급여가 점점 더 크게 다가왔어요.
     
    김누리) 급여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 의아했어요. 한편 이해가 되는 건 비영리사업이고 청년의 낮은 연차로 볼 때 만족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 플로어) 노동 인식이 개선되면서 최저임금법을 준수하는 단체가 많아져 급여 만족도가 상승하지 않았을까요?
     
     
    2. 업무의 전체 흐름을 알고 계십니까?
     
    김누리) 일종의 잘 갖춰진 플랫폼이 없어 인수인계가 잘 안되는 경우가 많아요. 조직문화 워크숍을 진행할 수 있지만 보편적인 시민 단체의 문화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주먹구구식의 일을 지양하고 공통의 목표를 확실히 성립해 장기적으로 조율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강필준) 부서를 자주 옮겨 다녀서 업무 전체의 흐름을 익히기 힘든 경우가 많아요. 해결책으로는 서울시NPO지원센터 당시의 ‘활동가 도구상점' 같은 플랫폼이나 다른 중간지원조직의 체계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유보희) 소규모 조직에서는 모든 일을 함께 하고 있어서 전체 업무의 흐름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인원이 적은 거에 비해 1년 치 기존 사업도 많고, 시민단체 특성상 매번 발생하는 이슈에 대응하기 위한 사업이 추가되면서 예측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어요.
     
    최승환) 제가 있는 곳은 2명이 속한 단체라 홍보부터 결산까지 업무의 전반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힘에 부칠 때가 있어요.
     
    김누리) 활동 초반에는 또래 동료들과 왠지 비교되거나 특히 피드백을 받지 못할 때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어요. 특히 중간관리자의 애매한 업무 지시 등으로 내 업무 방향과 목표를 상실했을 때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어요. 사수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N 년 뒤, 나는 여전히 활동가일까?”라는 주제로 패널토크 중 유보희 패널(왼), 최승환 사회자(오)가 발언을 하고 있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3. 조직문화를 점검하는 공식적인 시간이 있습니까?
     
    강필준) 동행은 3명에서 14명의 조직으로 커진 상태인데요. 최근에 리더십 강의를 내부에서 진행하였는데 담당자도 잘 모르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외부 전문 코치나 단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승환) 보통 5인 이하의 단체들이 많아서 조직 문화가 생략되는 경향이 있는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플로어 1) 재단법인 아름다운 가게에서는 워크숍 등을 통해 미션/비전/핵심가치 등을 점검하고 각 부서/사업처/국 별로 일의 방식을 만듭니다. 컴퓨터 바탕화면 개선 등 아직은 초기지만 시작하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 플로어 2) 일 터질 때만 조직 문화를 개선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패널토크와 플로어 토크를 자유발언+오픈채팅방을 통해 이어가고 있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4. 활동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시나요?
     
    강필준) 최소한의 환경 보장이 된다면 청년 활동가들은 자부심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공익 활동은 내가 선택해서 참여하는 거잖아요.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최승환) 개인적으로 활동 단체에 후원금을 낼 때 자부심이 생겨요.
     
    5. 꾸준한 공익 활동을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최승환) 8년 동안 공익 활동을 하면서 좋은 환경에서 좋은 동료들과 같이 일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강필준) 활동가도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웃음) 국정기획 회의 등에서 청년 공익활동가의 이슈가 나와야 하고 사회적으로 관심받고 인정받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누리) 지리산 이음의 ‘변화를 만드는 사람’을 통해 청년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진행했던 것처럼 시민들에게 우리를 알리는 인터뷰나 사례들을 많이 모집하고 싶습니다.
     
    유보희) 공익 활동가도 이제는 직업으로 인정받는 시대에요. 그렇기에 우리의 활동이 노동으로 존중받고 그에 걸맞은 임금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를 위한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해요. 따라서 청년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관련 정책을 청년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N 년 뒤, 나는 여전히 활동가일까?”라는 주제로 패널토크 중 강필준 패널이 발언을 하고 있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 플로어 1) 같은 활동가라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가진 네트워크에 참여해 무언가 만들어 냈으면 좋겠어요. 특별법 제정 등의 즉각적인 효능감보다는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플로어 2) 세상에 대한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이 동기부여가 돼 공익 활동을 시작했지만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공익 활동을 기획하는 등에 도움이 되었고 직업으로써의 자부심도 생기게 됐습니다.
     
    + 플로어 3) 사실 공익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관련 대외활동을 하면서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실망감이 들기도 하였고요. 이젠 방향성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익 활동을 스펙, 단기 성과물, 급여 등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행동의 본질에 집중해 장기적인 효과를 거뒀으면 좋겠어요.
     
    + 플로어 4) 현실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시민 단체의 근로계약서 미작성, 임금 미보장, 근로 인식 후퇴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소속감은 있지만 오히려 활동 후 단체보다는 외부에서 더욱 챙겨줄 때 섭섭함이 생기는 것 같아요.
     
    + 플로어 5) 세대가 다른 활동가들하고도 소통해야 서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각자 주장만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공익활동을 위해서는 멘토와 멘티처럼 서로의 연결을 통해 지지하고 배우고 공감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간담회에 참여한 플로어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참여자 인터뷰
     
    마지막으로 플로어 세 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서00(녹색연합), 문**(이천청년정책발전소), 이@@(경실련)께서 참여해 주셨습니다.
     
    1. 참여하게 된 계기와 꿈꾸는 사회는 무엇인가요?
     
    이@@) 정책 분야와 관련해 센터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아 오게 됐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 있는 청년들을 위한 정책이 많아지는 사회가 오길 바랍니다.
    문**) 이천의 청년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만큼 좋은 기회가 있어서 참여하게 됐어요. 후세가 살기 좋은 세상을 바랍니다.
    서00) 활동 지속 법을 고민하다가 오게 됐습니다. 모든 생명이 고통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꿉니다.
     
    2. ‘공익’은 사회적/자아적 관점에서 어떤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서00) 환경 보존의 사회적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아적으로는 사랑하는 것들과 잘 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문**) 공익은 청렴, 결백, 봉사의 가치를 지닙니다. 개인적으로는 보람을 느끼기 위함입니다.
    이@@) 공익은 같이 발전하는 공동체 가치가 있습니다. 내면적으로는 스스로 배워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간담회 현장에서 청년활동가들 간의 열띤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3. 공익 활동에 있어 가장 큰 고민과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서00) 임금 미지급과 같은 현실적 문제가 고민됩니다. 이들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문**) 급여입니다. 활동이 지속되려면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급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정치를 하거나 영향력 있는 청년 활동가들이 등장했으면 합니다.
    이@@) 세대가 다른 공익활동가들의 소통입니다. 서로 아우르고 화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4. 청플 위원과 네트워크가 구축된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요?
     
    서00) 청년들이 가볍게 소통하는 네트워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심리 상담도 받아보고 싶어요.
    이@@) 활동가 역량 개발 프로그램이나 다른 단체와 교류하는 기회도 갖고 싶어요.
    문**) 청년이니까 축제 개최와 같은 재밌는 활동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기성세대와 청소년의 중간 역할도 하고 싶어요.
     
    5. 공익활동에 관심이 없는 청년들을 유입시키기 위한 해결책은 무엇이 있을까요?
     
    서00) 따분하고 어려운 것이 아닌 매력적인 활동임을 알려주면 되지 않을까요?
    이@@) 대학생들은 어떠한 가치로 되돌아오는 걸 원할 수 있어요. 사회 문제와 연관 짓는 것도 좋지만 자기 계발 등의 특정한 무언가를 안겨줘야 해요.
    문**) 현실적으로 급여, 재미와 같은 특정한 보상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체사진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희소식은 유명화 센터장께서 내년 지방선거에 맞춰 청년 정책이 더욱 반영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는 자리를 많이 마련하겠다는 포부를 밝히셨다는 점인데요. 이 기회를 통해 청년들의 입지가 강화되고 정치(공익) 활동의 주인이 되는 순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미래세대인 이른바 MZ 활동가들이 오랫동안 꿈을 이어가면서 공익 현장도 발전해 세상의 푸른 봄이 사시사철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현장스케치] RE100 시대, 청년 공익활동도 재생할 수 있어요!
    초스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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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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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 작은도서관 오현정 관장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마을활동도 공익이다 시리즈 1]
     
    “마을에서 일 벌이는 여자, 오현정”
    ㅡ도서관부터 ESG 네트워크까지, 그녀가 만드는 연결의 지도
     
     
    “책을 좋아했어요. 술 마시는 대신, 책 읽는 놀이터 하나쯤은 있었으면 했죠.”
     
    서울살이를 접고 화성으로 내려왔을 때, 그는 낯설고도 허전한 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놀이터도, 사람도, 책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기로 했다. 작은 도서관 ‘만세 도서관’. 처음엔 ‘내 아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정작 아이는 사춘기여서 오지 않았다. 대신 동네 아이들이 왔다. 엄마들이 따라왔다. 그렇게 오현정의 마을살이는 시작됐다.
     
     
    만세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 중인 시니어 봉사자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처음엔 아무도 안 왔어요. 프로그램을 준비해도… 그래서 책을 들고나갔어요. 상인들에게, 주민들에게, 길 위의 사람들에게.”
     
    에코백 하나로 시작한 책 배달은 책수레가 되었고, 이웃과의 대화가 되었고, 결국엔 마을의 얼굴을 바꾸는 손길이 되었다. 벽화도 그렸다. 각국의 국기를 함께 그리고, 쓰레기가 넘치던 길목에 맥문동을 심었다. “남의 나라 국기 아래엔 쓰레기를 못 버릴 테니까요.” 농담 같지만, 깊은 배려가 깃든 전략이었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는 마을을 바꾸고, 활동가들을 모았고, 네트워크가 되었다. 오현정은 화성 마을만들기네트워크의 사무국장을 거쳐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지금은 경기도 마을만들기네트워크의 상임대표로 활동 중이다.
     
    “어떤 정권이 바뀌었고, 갑자기 마을공동체센터를 직영하겠다고 했어요. 그때 우리 활동가들이 직접 시장실에 들어가 담판을 지었죠. 성명서에 주민들의 이름을 담아.”
    시민이 행정을 견인한 순간이었다.
     
     
    깨끗한 마을 만들기 활동 홍보 배너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그녀는 공모사업을 ‘포기’한 적도 있다.
     
    사업비를 위해 하려던 일을 거꾸로 맞추고 있는 나를 보게 되면, 우리는 방향을 잃어요. 그래서 기꺼이 포기했어요. 우리가 갑이에요. 활동가들이요.” 그 말에선 단호함과 자유가 동시에 들렸다.
     
    화성은 도농복합 도시다. 아파트 단지의 촘촘한 네트워크와 농촌의 오랜 단연차들이 교차한다. 그는 이 복합성 안에서 마을마다의 고유한 결을 존중하며, 소외되지 않도록 손을 뻗는다. 그리고 지금, 그는 ESG 시민네트워크를 구상하고 있다. 행정과 기업, 시민사회가 함께 테이블에 앉는 구조다. “기업의 사회 공헌과 시민단체의 실천이 연결되면, 활동가에게도 인건비가 생기고, 시민 기금도 자라나요. 우리가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어요.”
     
     
    마을 속 SDGs 활동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오현정의 활동엔 늘 ‘사람’이 있다.
     
    상처도, 회복도, 시작도, 모두 사람에서 온다. 유방암 수술 이후, 활동을 쉬었을 때도 “동료들이 매일 집에 와서 밥을 먹여줬어요. 그 덕에 금방 나았죠.” 가끔은 번아웃이 오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곁에서 “같이 하자"라고 말해주는 동료가 있어 다시 일어난다.
     
    마을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회의할 땐 다들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만, 끝나면 ‘밥 먹자’고 해요. 그게 마을이에요.”
    갈등을 모른 척하지 않고, 회의실에서 풀고, 안 되면 내려놓는다. “우리가 돈 벌려고 하는 일 아니잖아요. 안 하면 그만이죠.”
     
    그가 꿈꾸는 건,
     
    서로 돌보는 마을. “셰어하우스요. 각자 방은 있지만, 공유 부엌에서 함께 밥 먹고, 안 오면 ‘왜 안 와?’ 하고 연락해 주는. 그런 곳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평생교육협동조합도 준비 중이다. 나이와 경력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배움으로 성취를 느끼게 하는 곳. “시니어가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이 마을을 배우는 곳.” 
     
     
     
    작은 도서관에서 시작해, 평생교육대상 수상자이자 마을 정책 기획자까지. 하지만 그는 말한다. “처음엔, 그냥 내가 놀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고민은 안 해도 돼요. 그냥 시작하면 돼요. 실패하면 포기해도 돼요. 그걸로 충분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친 활동가들에게 말한다.
    “쉬어도 돼요. 마을은 혼자 지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없어도 누군가는 지켜줄 거예요. 이미 만들어놓았으니까, 그걸로 충분해요.”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마을에서 일 벌이는 여자, 오현정
    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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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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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80주년 특별전] 여성독립운동가 12인 목소리 전시회 포스터 /출처: 이회영 기념관 
     
     
    
    ● 광복 80주년의 의미
     
    202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정확히 8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광복절은 단순한 국가 기념일을 넘어,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자유와 독립을 갈망한 민중의 피와 눈물의 역사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정치적 독립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올해 80주년은 더욱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전쟁, 분단, 산업화, 민주화라는 험난한 길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역사 왜곡과 분단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렇기에 80주년은 과거를 단순히 기념하는 차원을 넘어, 앞으로 우리가 어떤 나라를 만들어갈 것인가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주 간과되었던 주제가 바로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 속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종종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총을 들고 싸우거나, 첩보 활동에 나서거나, 해외에서 외교 활동을 이어가는 등 결코 작은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가정과 사회의 억압적 관습을 깨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들의 행보는 오늘날 성평등과 인권의 시각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우리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다시금 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들은 역사의 공백 속에 묻힌 존재가 아니라, 독립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사적 역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직접적 무장 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입니다. 대표적으로 남자현 지사는 만주와 중국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하며 일본 군인 암살과 폭탄 투척 계획을 주도했습니다. 그녀는 "내 몸이 썩어 없어져도 조선 독립의 밑거름이 된다면 영광"이라며 생을 바쳤습니다. 둘째, 문화·교육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여성들입니다. 김마리아, 박인덕 등은 여성 교육 운동을 통해 식민지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를 키우려 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여성에게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는 혁명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셋째, 국제 무대에서 외교적 활동을 벌인 여성들입니다.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면, 그 외에도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린 여성들이 존재했습니다. 김알렉산드라(고려인 독립운동가)는 러시아 혁명과 연계해 활동했고, 정정화 지사는 임시정부의 자금을 전달하며 항일 외교의 실질적 지원을 했습니다. 이렇듯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단순한 보조적 역할을 넘어, 독립운동 전선의 다양한 층위에서 주체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총칼 앞의 용맹뿐 아니라, 문화·교육·외교 전선에서 ‘조국의 독립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몫’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 유관순 (1902~1920)
     
    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 병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며 어려서부터 교육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제 식민 지배로 민족의 자존심이 짓밟히던 상황이었고, 유관순 역시 어린 나이부터 나라 잃은 설움을 체감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와 함께 기독교 신앙을 지켰으며, 이는 이후 독립운동에 나서는 데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15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한 유관순은 신여성으로 성장하며 민족 문제에도 관심을 키웠습니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화학당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고종 황제의 서거가 전국적 분노를 불러일으킨 가운데, 유관순은 “나라를 되찾는 데 여성도 앞장서야 한다"라는 신념으로 행동에 나섰습니다.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시위에 참여한 그는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 시위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였으며,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수십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 역시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비극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체포된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이끌며 독립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 만세운동을 벌였고, 일본 간수들에게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1920년 9월, 만 18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죽음은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본 당국은 장례조차 통제했지만, 민중들은 그녀를 ‘대한의 딸’, ‘조선의 잔다르크’라 부르며 기렸습니다. 그녀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3·1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하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 남자현 (1872~1933)
     
    남자현은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웠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강한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찍 결혼했으나 남편을 병으로 잃고 홀로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남자현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지원하는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식량과 자금을 마련해 전달하는 것은 물론, 직접 무기를 다루며 항일 무장투쟁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여성으로서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그는 “나라 없는 여성에게는 가정도, 삶도 없다"라며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본군 고관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1932년에는 하얼빈에서 일본의 대사와 관리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후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동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단식을 이어간 끝에 1933년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남자현 지사의 투쟁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첫째, 여성으로서 ‘직접 무장투쟁’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이는 독립운동이 단지 남성의 몫이 아니었음을 증명했습니다. 둘째,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철저히 희생했으며, 심지어 자녀에게조차 “나는 조국을 위해 살다 갈 것이다”라는 신념을 남겼습니다. 남자현 지사는 비록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나, 실제로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의 생애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 정정화 (1900~1991)
     
    정정화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사상을 접했고,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많은 여성들이 거리 시위에 참여했으나, 정정화는 단순한 시위 참여에 머물지 않고 임시정부와의 연결 고리를 자처했습니다. 1920년대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운영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자금난이었는데, 정정화는 국내에서 모은 독립운동자금을 중국으로 전달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지만, 그는 어린 딸을 데리고 위장해 국경을 넘나들며 자금을 전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심부름’이 아니라 임시정부 존립의 핵심을 떠받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정정화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을 돌보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라는 위치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운동가’로서의 자각을 갖고 행동했습니다. 실제로 훗날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나는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아니라, 나 자신이 독립운동가였다"라고 밝힌 것은 여성 독립운동의 주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광복 이후에도 정정화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광복 후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잊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이들의 공적을 알리기 위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1991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우리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정신을 간직했습니다. 정정화 지사의 삶은 여성의 역할이 단순히 보조적이라는 편견을 넘어섰습니다. 그녀는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자금·외교·생활 전반을 지탱한 보이지 않는 중심축이었으며,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표적 상징으로 평가됩니다.
     
     
    ● 김마리아 (1892~1944)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서양식 교육을 받으며 민족의식을 키웠습니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그는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교육과 계몽을 통한 독립운동을 결심했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기독교계와 학생운동을 통해 민족 문제를 접했고, 점차 정치적 투쟁으로 방향을 확장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그는 도쿄 유학생 시위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귀국한 김마리아는 국내 여성들을 규합해 대한민국 애국 부인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단체는 여성들의 조직적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독립군 자금 모금과 애국 계몽 활동을 펼쳤습니다. 여성들이 단순한 가정의 역할을 넘어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선 상징적 사례였습니다. 1920년대 이후 김마리아는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연계했습니다.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을 병행했으며, 미국에서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미주 지역 교포 사회와 기독교계 네트워크를 활용해 국제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 이어졌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위험인물”로 분류했고, 체포와 감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마리아는 독립운동사에서 여성 지도자로 평가됩니다. 그는 무장투쟁 대신 교육과 조직, 국제 외교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사회적 역할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여성운동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됩니다.
     
     
    ● 윤희순 (1860~1935)
     
    윤희순은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겪은 여성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유학자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 전통적인 여성의 삶을 살았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특히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을미사변 이후, 그는 의병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윤희순은 단순히 의병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병가와 격문을 지어 민중의 저항 의지를 고취했습니다. 그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문학적 수단을 항일운동의 무기로 삼았으며, 이는 일종의 ‘문화적 무장투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와 노래는 남성 의병들에게 전해지며 투쟁 의지를 불태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윤희순은 직접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품과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자들을 간호하며 후방 지원에도 헌신했습니다. 그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자리가 부엌과 가정에 한정되었던 시대를 넘어, ‘의병장과 같은 여성’으로 활동했습니다. 1907년 정미의병 이후 일제가 무력 진압을 강화하자 윤희순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도 의병 잔여 세력을 규합하며 항일 투쟁을 지속했지만,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193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내가 죽어도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윤희순은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최초의 의병 여성 지도자로 평가되며, 후대에 ‘의병장 할머니’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 오늘날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공로를 기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역사 정의의 문제입니다. 첫째, 역사적 균형의 회복입니다. 그동안 독립운동 서술은 남성 중심적이었고, 여성의 활동은 부차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다시 조명하는 것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입니다. 둘째, 성평등의 관점에서 본 재조명입니다. 여성들은 식민지 상황뿐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 구조라는 이중 억압 속에서도 싸워야 했습니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여성 해방의 기초를 닦은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셋째, 청년 세대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오늘날 자유와 민주주의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일은 현재 세대가 누리는 권리와 자유의 뿌리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단순히 기념식에 머무르지 말고, 기억의 확장을 해야 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불러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교육과 문화 속에서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자라서 더 잔혹하게 죽었다, 그러나 끝까지 싸웠다
    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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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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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구미 건설현장 온열질환 산재 사망, 진상규명·재발방재대책 촉구 기자회견'사진 / 출처: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2025년 7월 7일, 경북 구미시의 한 아파트 신축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20대 베트남 국적 이주노동자가 폭염 속에서 쓰러져 끝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구미 지역에는 35도를 웃도는 폭염 특보가 발효되어 있었으며, 체감온도는 40도를 넘는 등 매우 위험한 작업 환경이었습니다. 사망한 노동자는 낮 1시 이후 작업을 중단한 한국인 노동자들과 달리 오후 4시까지 작업을 지속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는 작업 도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며, 동료들이 신고해 119가 현장에 도착했지만 병원 이송 도중 사망하였습니다. 병원 측은 체온이 40.2도에 달했으며, 급성 온열질환으로 인한 심장 쇼크와 호흡 곤란이 사망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산재 사고를 넘어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인권 사각지대를 드러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해당 사업장은 '폭염 시 야외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고용노동부의 지침을 일부 이행했지만,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이를 철저히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내국인 노동자와의 작업 시간 차별이 있었고, 현장에서 냉방 장비나 충분한 휴식처 등 기본적인 보호 장비도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이 노동자는 고용허가제 하에 단기계약으로 체류 중이었으며, 한국어 소통이 어려워 작업 지시나 안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됩니다. 폭염 경보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관리자나 사업주는 그에게 제대로 된 휴식이나 대체 작업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노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인권 침해 사례로 보고 있으며, 고용노동부와 경찰에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고는 이주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소모품'처럼 다뤄지고 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건설업, 농축산업, 제조업 등 고위험 분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 안전장비 부족, 언어 장벽 등의 이중고를 겪고 있으며, 이는 온열질환이나 안전사고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시간·환경 기준을 국내 노동자와 동일하게 적용해야 하며, 특히 재난 상황에서는 이들의 건강권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노동계 또한 “사업장 변경 제한 등 구조적인 억압 제도를 개선하지 않는 한,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히 폭염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제도적·구조적 차별 속에서 이주노동자의 생명이 방치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 제도 개선과 현장 점검 강화가 시급하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습니다.
     
     
     
    ● 이동노동자 인권 증진을 위한 주요 정책
     
    가. 이주노동자 인권 보장 정책토론회
    2025년 7월 17일, 국가인권위원회 광주사무소와 전남노동권익센터는 광주광역시청 대회의실에서 ‘이주노동자 인권 보장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번 토론회는 전국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 침해 사례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제도 개선에 반영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토론회에서는 특히 ‘사업장 변경 제한 제도’의 구조적 문제점이 집중 조명되었습니다. 한국의 고용허가제 하에서 이주노동자는 원칙적으로 사업장을 변경할 수 없으며, 이는 ILO(국제노동기구)와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해 온 문제입니다. 발제자들은 이러한 제도가 이주노동자를 ‘사업주에게 종속된 신분’으로 만들며, 강제노동과 다름없는 현실을 초래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이주노동자의 여권을 압수하거나, 이직을 막기 위해 협박·감금을 동반한 사례들이 현장 사례로 공유되었고, 이는 명백한 국제 인권 기준 위반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제 인권 기준에 부합하는 법적·제도적 개선안이 절실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이주노동자를 단순노동력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고, 실질적 보호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나. 지역 참여형 권익 증진 사업
    경기도를 비롯한 여러 지자체는 2025년 ‘지역 참여형 이주노동자 권익증진 사업’을 통해 이동노동자의 권리 보호와 정착 지원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민간단체, 노동조합, 이주 단체 등 지역사회 주체들과 협력하여 이주노동자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경기도는 특히 이주노동자 밀집 지역에 ‘현장 상담소’를 운영하여 노동권 침해 사례를 직접 접수하고, 전문 상담사와 통역사를 배치해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용 안정성 강화, 산재 처리 지원, 의료 지원, 주거 안전점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맞춤형 지원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해당 사업은 중앙정부의 정책과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지역 현실에 맞는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며, 특히 공공기관의 접근성이 낮은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업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포괄적 보호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중요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 전국 단위 요구안 및 연대 활동
    2025년 5월 노동절을 전후해, 이주노동자 단체들과 민주노총은 공동으로 ‘이주노동자 10대 정책 요구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요구안은 현재 이주노동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포괄적으로 반영하며, 실질적인 제도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주요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업장 변경의 자유 보장, 임금 체불 방지 및 강제 송금 폐지, 안전한 기숙사 제공, 산업안전 규정의 실효성 확보, 체류권 보장 및 추방 위협 중단, 이주노동자 전담 상담소 확충, 모국어 통역 시스템 구축, 폭력·성희롱 피해자 보호 체계 마련, 노동조합 가입 권리 보장, 공공의료 접근성 확대 등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같은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대규모 집회, 캠페인, 국제 연대 활동도 벌이고 있으며,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 인권이사회에도 관련 실태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과의 연대는 이주노동자 이슈를 ‘주류 노동운동’의 핵심 의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이에 따라 정부와 국회의 관심도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 온열질환 예방을 위한 정부·지자체 대책
     
    가. 고용노동부 폭염 안전 특별대책반 운영
    2025년 7월 9일, 고용노동부는 여름철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됨에 따라 건설업·물류업·조선업 등 야외 고위험 사업장을 대상으로 ‘폭염 안전 특별대책반’을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올해 들어 기후 변화로 인해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극심한 더위와, 이로 인한 온열질환 사고가 우려되면서 마련된 조치입니다. 특별대책반은 전국 주요 산업현장을 중심으로 현장 점검을 시행하고 있으며, 특히 “2시간마다 최소 20분 이상 휴식”과 같은 기본 안전 수칙의 이행 여부를 집중적으로 감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침은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폭염 시 근로자 건강보호 지침’에 근거한 것으로, 실외 노동자들의 신체적 부담을 최소화하고, 열사병 등의 사고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또한, 대책반은 33도 이상 기온이 지속될 경우 적용되는 ‘폭염특별안전관리지침’의 준수 여부를 중점 점검하고 있습니다. 이 지침은 고온 시 작업시간 단축, 냉방 휴게시설 제공, 작업장 내 냉방장비 운영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미이행 시 과태료 등 행정처분 대상이 됩니다. 아울러,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질식 재해 가능성도 동시에 점검하고 있어, 폭염 외 위험요소에 대한 복합적 대응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 예산 및 물품 지원 확대
    정부는 폭염 대응을 위한 현장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예산도 대폭 확대하였습니다. 기존의 폭염 대응 예산 200억 원에 더해, 2025년에는 추가로 150억 원을 확보하여 총 350억 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기 쉬운 50인 미만 중소사업장을 우선 대상으로 하여 이동식 에어컨, 제빙기, 산업용 선풍기 등 폭염 대응 장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들 장비는 7월 말까지 각 현장에 배치될 예정입니다. 또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원콜(One-Call) 서비스’를 통해 기업의 요청 시 현장에 필요한 안전장비를 신속히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서비스는 단순한 장비 제공을 넘어, 산소·가스 측정기, 환기 시스템, 개인 호흡보호구 등 현장 특성에 따른 맞춤형 안전장비를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시스템입니다. 아울러 산업안전공단은 이동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폭염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노동자에 대해서는 별도의 우선 지원 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작업 특성과 건강 상태를 고려한 폭염 대응 매뉴얼도 보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대응은 단발성 지원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인 산업안전 체계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방향성
     
    그렇다면 앞으로 더 무더워질 날씨에 발맞추어 이동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바뀌어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2025년 여름, 경북 구미에서 이주노동자가 폭염 중 사망한 사건은 단순한 산재가 아닌, 한국 노동 현장의 구조적 차별과 인권 부재를 드러낸 상징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부는 고용노동부의 특별대책반 운영, 폭염 장비 지원 확대 등 다각적인 대응에 나섰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제도 변화는 미비합니다. 특히 이주노동자와 이동노동자는 고용형태나 체류 신분에 따라 폭염에도 차별적 처우를 받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단순한 관리 부실이 아닌 인권의 문제입니다.
     
    우선적으로, 폭염 고위험 노동자에 대한 법적 보호 기준 마련이 시급합니다. 현재의 폭염 지침은 권고 수준에 불과하여, 사용자의 자율에 맡겨지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이를 산업안전보건법 등 관련 법령에 명시하고, 일정 온도 이상에서는 의무적인 작업 중지와 냉방 휴식 제공을 법적으로 강제해야 합니다. 플랫폼 노동자와 여성 이주노동자처럼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도 포함한 법적 보호의 범위 확대가 필요합니다.
     
    둘째, 현장 인권 감시 체계의 실질화가 요구됩니다. 노동 감독관의 인원 및 권한을 대폭 확대하고, 특히 이주노동자 밀집 사업장에는 외국어 통역 능력을 갖춘 전문 인력이 상시 투입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노동자 본인의 참여가 보장된 작업환경 감시 체계를 도입하여, 일방적 점검이 아닌 협력형 안전 관리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고용허가제를 비롯한 제도 개혁을 통해 이주노동자 인권보호를 제도화해야 합니다. 사업장 변경 제한은 이주노동자를 ‘신분 종속’ 상태로 몰아넣는 구조로, ILO 협약과 국제 인권 기준에 어긋납니다. 체류권 보장, 자유로운 직장 이동, 폭력·착취 피해자 보호 체계 마련 등 실질적인 권리 보장이 이뤄져야 하며, 이에 대한 이행 여부를 정기적으로 점검할 국가 차원의 기구 마련도 시급합니다.
     
    넷째, 온열질환 대응 인프라의 지속적 확충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생수나 제빙기 제공을 넘어, 이동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접근 가능한 ‘휴식처’, ‘그늘막’, ‘응급의료체계’ 등을 공공 인프라로 확보해야 합니다. 서울시의 생수 나눔 캠페인처럼 지역 특화 대응도 중요하지만, 전국적으로 통일된 기준과 예산 지원 체계가 병행되어야 실효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폭염 대응 논의는 기후 위기 시대 노동권 보호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노동자의 건강은 생명’이라는 원칙 아래, 단기적인 재난 대응을 넘어서 기후변화에 따른 새로운 산업안전 기준과 노동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의 관점에서 기후정책과 노동정책을 통합하는 접근이 요구됩니다. 더 이상 이주노동자의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적 개혁과 인권 중심의 정책 설계가 절실합니다.
    

     

     

    “일하다 죽었다”…노동자에게 여름은 왜 더 치명적인가
    주야

    조회수 493

    202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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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쑤~~” 민요나 판소리를 부를 때 자주 쓰는 추임새다. 흥을 돋우고 소리꾼을 응원하며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마법의 소리다. 안산에는 한 20년 “얼쑤!”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광폭 시민 활동가 얼쑤 김미숙의 일문일답 추임새를 들어 보자. “각자도생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로, 얼쑤!”
     
     
    후원하고 활동하는 단체 목록을 세어보니 26개더라. 조금만 소개해 달라.
     
    안산YWCA의 평생회원이자 현재 회장이다. 활동비를 받는 자리가 아닌 비상근 활동가다. 4.16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안산평화연대 공동대표, 안산 기후위기 비상행동 공동대표기도 하다. 오라는 데 많고, 가야 할 데도 많다. 사랑하는 4.16합창단 소프라노 단원, 시화호생명지킴이와 안산환경운동연합 활동가이자 강사이며 (사)안산공동체미디어 단원FM에서 환경 방송 ‘얼쑤의 얼쓰Earth’를 진행하고 있다.
     
    안산·시흥 지역 노동자들의 생활안정과 권익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사)일하는 사람들의 생활공제회 ‘좋은이웃’의 생활안정팀에서 오래 활동하고 있다. 올해는 캄보디아 노동자들과 만나 잔치 음식도 해 먹고 지지하는 만남을 6번 진행하는데, 8월에는 여행도 간다. 양계장에서 일하는 한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는 한 달에 휴일이 두 번뿐이다. 이동의 자유도 이웃과의 소통도 없다. 외부에서 병원균이 옮겨 와 닭이 조류독감에 감염될 수 있다는 이유다. 모임에서 뭐가 좋았냐 물으니, 올 때 전철도 타고 나무도 보고 자동차도 보고, 사람들과 얘기한 거라고 하더라.
     
     
     
    안산환경운동연합 활동사진(왼), 안산YWCA 활동사진(오) / 사진출처: 얼쑤
     
     
    단원FM 활동사진(왼), 4.16합창단 활동사진(오) / 사진출처: 단원FM, 4.16합창단
     
     
    단체 상관없이 제일 신경 쓰는 건 탈핵이다. YWCA가 2년마다 집중 과제를 선정하는데 10년 넘게 ‘탈핵’이 있다. 우리 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환경운동연합, 안산YWCA 등이 버스 한 대로 월성 원전 이별 퍼포먼스에 갔다. 후쿠시마 핵폭발 사고는 정말 무서웠다. 핵에너지가 안전하고 경제적이라 하지만 잘못된 정보다. 고장도 잦고 터지면 끝이다. 탈핵과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운동이 중요하다. 안산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에서는 작년에 발전 수익으로  사회 기여를 1억 원 했다. 발전 수익을 낼 수 있고,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 귀한 사례다. 그래서 안산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 홍보위원으로 활동하며 햇빛발전에 대해 홍보하고 조합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열심히 권유하고 있다.
     
     
    월성 원전 이별여행 / 사진출처: 얼쑤
     
     
    여성 단체 YWCA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아이를 낳고 나니 환경이 망가진 게 보이더라. 내가 배워서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무언가 기여하고 싶었다. 당시에 돌도 안 된 아기의 사교육을 위해 선생님을 집으로 부르는 주변 사람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와 직접 재미있게 놀고 싶어 아이를 안고 도서관, 서점, 미술관을 다녔다. 아이 교육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어 찾아간 게 YWCA였다.
     
    처음 권유받은 게 NIE(Newspaper In Education) 지도사였다. 당시 N.I.E.가 붐이었다. 신문을 활용한 교육 자료로 아이들의 생각을 키우는 활동이다. 심화 과정 수료 요건이 60시간인가 80인가 봉사 후 보고서 제출이었다. 5살 딸아이를 데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N.I.E. 교육 봉사를 했다. 2년, 3년 계속하니 ‘검증된 강사’ 소리 들으며 강의 요청을 받았다. 새로 문을 연 지역아동센터나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작은 도서관에서 봉사 수업을 하다 보니 입소문이 나고 점점 강사 경험이 쌓였다. ‘시화호생명지킴이’라는 단체도 찾아가 교육을 받고 지역에 봉사하게 되었다. 지금 내 주업이 강사다. 독서 강사, N.I.E. 강사, 환경 강사 등으로 영역이 넓어졌다.
     
     
    아이 잘 키우려던 엄마가 광폭 시민 활동가가 된 어떤 전환점이 있었나?
     
    4.16세월호 참사였다. 단체라고는 YWCA, YMCA, 시화호생명 지킴이, 환경운동연합 정도만 알다가 4.16 참사를 계기로 수많은 시민과 연결되었다. 안산에 연대하는 작은 시민단체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이상하게 여겼던 이 사회가 그래도 여기까지 굴러온 건 이분들 덕분이겠구나, 알겠더라. 시간이 되면 달려가 힘을 보태고, 행동하고 후원하게 됐다. 내 삶이 '각자도생'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로 전환했다.
     
    우리 집이 단원고등학교 근처 빌라 101호다. 302호가 단원고 2학년 4반 고 박수현 군의 집이었다. 2002년 3월에 이사 와서 제일 처음 사귄 이웃이 수현이 엄마 영옥 언니였다. 언니는 “배추전 먹으러 와.” “떡볶이 했으니 올라와.” 하고많은 날 우리를 불러주거나 음식을 갖다주었다. “밥이 똑떨어졌어, 밥 한 공기 줄 수 있어?” “언니 달걀 좀 주세요.” 이게 우리 일상이었다. 수현이가 고2 때 우리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외동인 딸에게 수현이는 가장 가까운 오빠요, 놀이 상대이었다. 수현이는 연년생인 누나의 가방을 들어주고, 밤이 늦으면 누나 마중을 나가는 동생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2014년 4월 16일, 집에서 컴퓨터로 N.I.E. 수업 자료를 만들다 인터넷 속보를 본 거다. 세월호와 단원고, 이걸 보는 순간 수학여행 간 수현이 생각이 나 바로 영옥 언니한테 전화했다. “걱정하지 마, 다 구했대. 그래도 다 젖었을 테니 깨끗한 옷 챙겨서 지금 형부랑 내려가는 중이야.” 그랬다. “너무 다행”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놀란 가슴에 배는 고픈데 먹고 싶은 게 없어 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먹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애들을 못 구했다는 거다.
     
     
    세월호가 내 이웃의 일이자 내 일로 연루되었군요.
     
    그날 아이가 학교에서 오길래 “수현이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모른대. 우리 같이 학교로 가볼까? 사람들이 모여 소식을 듣는 것 같아.” 말하며 단원고에 갔다. 4월 16일, 무사귀환을 간절히 바랐던 첫 번째 촛불 기도회로 4.16활동이 시작됐다. 멈출 수가 없었다. 영옥 언니가 진상 규명이라든가 서명 활동을 계속하니 나는 뭐라도 언니를 도와야 했고 돕고 싶었다. 참사 4일째, 남편과 아이랑 셋이 진도 체육관에 갔다. 영옥 언니와 은희 언니와 유가족이 된 지인들을 보았다. 두 언니는 당시 내 인생의 롤 모델이었다. 울고 소리 지르고 쓰러지고, 민간 잠수사가 어떻고, 왜 찍어, 카메라 뺏고, 막 드잡이하고, 그걸 다 보았다. 사복 경찰이 진짜 많았다.
     
     
    얼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 사진출처: 얼쑤
     
     
    감히 그분들만큼 큰 아픔, 슬픔에 빠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 슬픔을 같이 겪었다. 너무 끔찍한 세월이었다. 영옥 언니가 진도에 계시면서, “뉴스에서 나오는 거 저거 다 거짓말이야”라며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뜨거운 폰을 얼마나 눌러댔던지 오른쪽 집게손가락이 아파서 아직도 잘 못 쓴다. 소식을 전하는 과정에서 거의 20년 가까이 지낸 지인하고 의절하는 일도 있었다. 참사 후 며칠 안 돼서 노란 리본 이미지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쓰는데, 저작권에 걸린다고 1인당 몇백만 원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딸 학교 보내기 전에 노란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주고 뒤통수를 찍어서 그걸 지금까지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있다. 못 바꾸겠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세월호 참사는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군요?
     
    그렇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언니와 함께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했다. 대학을 왜 가는지 몰랐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갔더라면 더 일찍 진보적인 사상을 접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텐데, 모르고 살아 너무 안타깝더라. 나는 부당한 일을 보면 조용히 떠나는 식으로 살았다. 일만 하다 결혼했고, 아이 낳고서야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는 거리를 둘 수 없는 내 일이었다. 우리 애는 수현이네 집에서 먹고 놀기 좋아했다. 오빠 놀아 줘, 하면 수현이는 뭐 하고 놀까, 물어보며 다리에 미끄럼을 태워주는 오빠였다. 수현이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유치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커서 오빠랑 결혼한다고 했다. 수현이가 부모님에게 무언가 사 달라고 하면 “넌 1층 장모님한테 가서 얘기해라” 놀림받을 정도였다. 그런 수현이가 우리 곁을 떠나 너무 안타까웠다.
     
     
    참사가 아이한테도 큰 영향을 미쳤을 거 같은데 괜찮은지?
     
     
    2014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단식농성장을 찾은 얼쑤 가족 / 사진출처: 얼쑤
     
     
    아이가 한동안 수현이를 입 밖에 못 내더라. 딸은 모태신앙이었는데 참사 후 하나님은 없다 했다. 수현이 오빠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거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수업 중에 자꾸 다른 책을 읽었다. 왜 그러느냐니까 “내일 죽을지도 모르잖아. 지금 안 읽으면 모르고 죽잖아.” 그랬다. 수현이 오빠를 며칠 만에 찾았냐 하길래 일주일쯤이라 했더니, 배 안에서 하루만 살고 죽었으면 좋겠다더라.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럽고 무섭고 춥고 보고 싶고 그랬겠냐고. 딸아이는 여주로 고등학교를 갔는데, 어느 날 택시 기사가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안산이라 했더니 ‘세월호!’ 라며, “말 잘 듣는 애들은 가만히 있어서 다 죽고, 말 안 듣는 애들만 살았다”라고 하더란다. 아이가 “그 기사를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라면서, 그 자리에서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세월호의 기억은 여전히 아이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있었다.
     
     
    시민 활동가로서 바쁜 중에 4.16 합창단 활동도 한다.
     
     
    4.16합창단 공연장에서 얼쑤 가족(왼쪽부터 친언니 만주벌판, 얼쑤님 어머니, 얼쑤)과 단원고 2학년 5반 이창현 군 엄마 최순화님 / 사진출처: 얼쑤
     
     
    4.16합창단이 생길 때부터 마음이 갔는데 몇 년 전에야 결합했다. 친언니 ‘만주벌판(별명)’도 단원이다. 좋은 목소리와 건강한 정신을 주신 엄마도 합창단 행사로 자주 본다. 아픔이 있는 곳에서 노래로 폭넓게 연대하니 참 좋다. 최근엔 전태일 의료 센터 건립을 위한 공연도 했다.
     
     
    현재 가장 마음 쓰는 활동이나 고민도 좀 나누자.
     
     
    2025 안산YWCA 김미숙 회장(얼쑤) 취임식이 진행되었다. / 사진출처: 얼쑤   
     
     
    아무래도 YWCA 회장이라는 중책이 마음 쓰인다. 지금 회원 증모 기간인데, 이걸 내가 잘 못한다. 대신 남편이 평생회원에 가입하게 했고, 내년에 우리 딸 돈 벌면 평생회원 가입시키려 한다. YWCA는 기독청년여성회(Young Women Christian Association)이다. 나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이 왜 필요한가, 계속 질문한다. 내가 나가는 교회와 한국 기독 교회들이 정말 예수를 따르는지, 세상의 빛과 소금인지,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을 때 함께 좋아해 주는가, 의심스러웠다.
     
    남편은 교회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내가 “왜 교회를 비판하지 않아?”라고 하면 그는 "나는 좋은 것만 들으려고해, 부분적으로 동의되지 않는다 해서 굳이 기분나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라는 식이다. 답답함을 느끼지만, 그 말이 또 틀린 건 아니다. 나는 일부 교회가 없어져도 된다고 본다.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게 아니니까. 헌금도 교회 말고 사회로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인데, 남편은 다르다. 그가 우리 가정의 주 수입을 담당하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내 수입은 사회로 12조 13조도 낸다. YWCA가 있어서 사회 정의나 연대의 갈증이 해소되고 내 신앙을 이어가는 거 같다.
     
     
    YWCA 활동가로서 정체성을 좋아하는군요?
     
    그렇다. 7월 초 YWCA 신입 직원 교육이 있었다. 작년에 못 해서 올해 교육 대상이 꽤 많았다. 사람들은 삼성이나 SK에 입사 지원할 때 그 회사에 대해 공부한다. 그런데 모 법인에 대해서는 모르고 오는 사람이 태반이다. 회장으로서 YWCA의 100년 역사와 안산YWCA의 40년 역사를 강의하며, “YWCA를 알고 나면 내가 참 좋은 기관에서 일하고 있구나, 자부심을 느낄 거예요.”라고 말해 줬다. YWCA가 교회는 아니지만, 이젠 교회보다 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목소리와 행동을 계속해야 한다.
     
     
    안산YWCA 소속으로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연대활동을 하고 있는 얼쑤님 모습 / 사진출처: 안산시민사회연대, 4.16안산시민연대
     
     
    YWCA 회장으로서 자부심 뿜뿜인데, 어려움은 없는지?
     
    역사 인물 최용신 선생은 안산의 자랑이자 YWCA의 자랑이다. YWCA에서 공부하고 농촌 계몽 운동(을) 하셨는데, YMCA로 아는 사람들이 있더라. 최근에는 내가 어느 단체에 가니 안산 YMCA에서 오신 얼쑤라고 소개를 해서 ‘YWCA’라고 바로잡곤 한다. 최용신 기념관 관련 기사에도 몇 년에 한 번씩 YMCA라고 나온다. 재작년에도 메일로 항의했다. 시에서 발행한 책자도 스티커로 다 수정하게 한 적 있다. 남성이 디폴트인 사회라 여성 단체를 더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얼쑤 / 사진출처: 얼쑤
     
     
    ‘회장님’, ‘이사님’ 호칭 보다 ‘얼쑤’가 좋다. 사람들은 ‘얼쑤’ 말고 ‘회장 김미숙’을 쓰라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야 어쩔 수 없지만, 활동가로서는 ‘얼쑤’가 편하다. 지금까지의 내 활동을 보고 “대단하다, 기왕이면 학위를 좀 업그레이드해서 더 많이 강의하고 돈도 더 받아봐”라고 말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러면 지역에서 적은 돈만 줄 수 있는 데서 누가 활동하나.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더러는, “왜 그렇게 활동이 많냐", “정치할 거냐” 한다. 정치하란 말은 10년 전부터 들었지만, 내 대답은 같다. 너무 열심히 하다 병나서 죽을 거라고. YWCA 회장만으로도 ‘거룩한 부담감’이 큰데 더는 아니다.
     
    효순이 미선이 저금통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우리 딸이 재작년엔가 “엄마 생일 선물 뭐해줄까?” 하다가 “엄마는 물건은 안 좋아하니까 엄마 이름으로 기부해 줄게.” 그러더니 효순이 미선이 평화공원 짓는 데 딸이 5만 원을 기부해 준 적 있다.
     
    그때그때 마음 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위해, 내 할 만큼만 한다.

    

     
     
     
    “회장님”보다 활동가 “얼쑤”가 좋아요!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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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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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복지홈, 삶을 바꾸는 새로운 실험의 장
     
    사진1_공간복지홈개관식 / 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지난 6월 27일, 경기 남양주시 다산 포레스트 2단지에 특별한 공간이 문을 열었다. 이름은 ‘공간복지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복지시설’과는 전혀 다른 얼굴의 소통과 쉼의 공간이었다.
     
    공간복지홈은 경기주택도시공사(GH)가 추진한 모델로, 공공임대주택 단지 내 유휴공간을 커뮤니티 중심의 복지 플랫폼으로 전환한 공간이다. 다산 포레스트 2단지에는 약 900세대가 거주하고 있는데, 고령자 복지주택(116세대)을 비롯해 노인복지관, 경로당 등과도 가까워 세대 통합형 복지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이 공간의 진짜 의미는 ‘주민 스스로 공간을 만들어가는 구조’에 있다.
     
    입주자들이 단순히 이용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이 함께 설계하고 운영하며, 지역 내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주체가 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현재는 협동조합 세 곳이 참여하여, 지역 일자리 창출과 지속가능한 복지 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지역 커뮤니티의 허브로 기능하고 있다.
     
    공간복지홈의 대표 공간 중 하나는 ‘다산38국수’다.
    
    사진2_다산38국수
     
    
    ‘국수나무’ 브랜드로 잘 알려진 미나리협동조합이 운영을 맡고 있으며, 3,8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제공한다. 벌써 지역 맛집으로 알려져 평일 점심시간이면 긴 줄이 늘어선다. 입주민뿐 아니라 인근 주민과 근로자들도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단순한 식당이 아닌, 대화와 만남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식당 맞은편에는 ‘오늘도가게’라는 공유가게가 자리하고 있다. 남양주 별내동의 협동상회협동조합이 운영을 맡았으며, 지역 생산품과 간단한 먹거리를 상시 판매하고 있다.
     
     
    
    사진3_오늘도가게
     
    
    오늘도가게에서는 오픈채팅 기반의 공동구매 플랫폼 운영도 준비하고 있다. 주민들이 직접 필요한 물건을 제안하고 함께 구매함으로써 생활비는 줄이고, 관계는 키워가는 방식을 함께 만들어갈 것이다.
     
    이름부터 감각적인 ‘지구한조각’은 환경과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체험 공간이다.
    
     
    사진4_지구한조각
     
     
    운영 주체는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으로 국내 최초 협동조합형 아파트인 ‘위스테이별내’를 기획·운영해온 협동조합이다. 이 공간에서는 환경 워크숍, 제로웨이스트 체험, 소규모 주민 모임 등 지역의 가치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내 손안에 작은 정원, 나의 작은 지구조각’이라는 반려 식물 분재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세대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5_분재워크숍
     
    
    이 공간을 대표하여 운영하고 있는 그린디자이너 이경래 작가는, “이곳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녹색 터전’입니다. 자연의 섬세한 변화와 주민들의 일상이 맞닿아, 서로를 보살피고 존중하는 커뮤니티가 자라납니다. 작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숨결이 되고,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경험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여는 씨앗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전하였다.
     
    이 작가의 말처럼 공간복지홈은 도시 환경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생태적 쉼터로도 기능하고 있다.
     
    그중 옥상정원은 도시 열섬 현상을 완화하고, 주민들에게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녹색 휴식 공간을 제공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넓은 옥상 정원은 주민들이 자유롭게 산책하거나 바람을 쐴 수 있는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다. 추후 이곳은 주민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과 지역 농산물을 소개하는 마을 장터가 열리고, 마을 정원사를 양성하는 귀한 교육의 장이 될 예정이다.
     
    또한, 눈길을 끈 건 건물 외벽에 설치된 ‘수직정원’이다. GH는 스마트 환경연동시스템(SGIS)을 도입해 온도, 습도, 미세먼지, 이산화탄소 등의 수치를 실시간 감지하고 정원을 자동으로 제어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한다.
    
     
    사진6_수직정원
     
    
    이는 단순한 장식이나 상징을 넘어서 도시 기후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는 친환경 설계 요소로 기능하고 있으며, 외벽 온도 저감, 공기질 개선 등 실제 측정 가능한 결과를 낳고 있다.
     
    공간복지홈은 아직 실험 중인 공간이다.
    이곳은 ‘복지’를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식사, 장 보기, 대화, 체험, 쉼’과 같이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더 깊고, 따뜻하게 연결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서 복지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 가까이에서 살아 숨 쉬며, 보다 쉽게 다가올 것이다.
    
     

     
     
     
    다산에 생긴 따뜻한 동네 사랑방, 공간복지홈
    미리내

    조회수 263

    202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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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이브란 기록물을 수집해 주제에 맞게 정리하고 보존하는 행위입니다. 특히 오래전부터 각 분야의 콘텐츠 산업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아 왔는데요. 따라서 올해부터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도 경기도의 공익활동을 다양하게 아카이빙하여 온라인 자료관 ‘톺’을 활성화하는 활동가들을 양성하였습니다. 특히 수료식을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진행하며 민주주의의 기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아카이빙하여 전시하였는지 배웠는데요. 그 유익했던 현장을 같이 방문해 보실까요?
     
     
    단체사진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민주화운동기념관은 국민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기리며 체득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M1, M2 전시관과 교육동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M1에서는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통해 일상의 민주주의를 돌아볼 수 있고 M2에서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물을 마주하며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의 문제를 고심해 볼 수 있습니다. 교육동에서는 민주주의를 소재로 한 도서/사진/영상 전시와 교육이 열립니다.1)
     
     
    <민주화운동기념관>
     
    ● M1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동선의 시작에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시대별 국민의 모습을 마주합니다. 걷다 보면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만들어 낸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닿게 됩니다. 주변의 여러 장소, 사물, 노래를 바라보며 민주화운동의 기억을 떠올리고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에 관해 묻고 답한 뒤 공공예술을 관람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2) 이를 통해 민주 시민에게 필요한 지식과 소양을 기를 수 있었고 특히 숲과 닮은 향을 맡으며 왠지 모를 치유와 희망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 M2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박종철 열사가 사망했던 조사실은 가파른 나선형 계단 위에 한 뼘 남짓의 창문, 외시경, 빨간/노란 방 등과 함께 고문 현장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칠성판, CCTV, 멍석말이 고문 도구와 간첩 조작 피해 등의 기록을 통해 1970-80년대 국가의 탄압과 6·10 민주항쟁 등 시민들의 저항과 연대의 사료들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204개의 스피커에서 들리는 찢어질 듯한 대공분실 입구의 철문 소리와 대공 부서에서 걸려 오는 전화 소리 등을3) 통해 공포와 고통을 느끼며 민주주의는 피로 써진 역사임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국민이 수호하고자 했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고찰하게 됐습니다.
     
     
    <아키비스트 수료식>
     
    ● 4차시 교육 소감
     
     
    소감나누기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 교육생 소속 단체: 이룸문화교류협회,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고양아카이브016, 한국라이브봉사단, 부천여성청소년재단, 경기마을공동체미디어연대, 협동조합커뮤니티플랫폼 이유
     
     
    수료식에 앞서 현장 학습을 끝낸 소감과 함께 아카이브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였는데요. 공통 의견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현세대를 위해 1987 민주화 운동에 끊겨있지 말고 90년대 이후, 최근까지 이어지는 또 다른 시민사회의 이야기들을 통해 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영상 작업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경기 북부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프로젝트를 하고 싶습니다. 예로 파주 북부의 인구 소멸과 빈집 프로젝트의 아카이빙을 깊게 하는 실습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협동조합커뮤니티플랫폼 이유)
    3. 기념관을 민·관이 함께 설립한 것처럼 민관 협의체 등과 같이 꾸준히 협력하며 진행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총 교육 과정 소감
     
    다음으로는 1~3차시의 교육 과정을 수료하며 느꼈던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에 대해 토의해 보았습니다. 공통 발언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 좋았던 점
    1. 전문적 내용을 다뤄 지역 활동의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2. 이론교육이 좋았습니다.
    3. 아키비스트 역량이 공익활동가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4. 우리들의 네트워크가 생겨 좋았습니다.
     
    ※ 아쉬웠던 점
    1. 거리 등 참여에 어려움이 있어 남·북부 별도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2. 이전에 들었던 내용도 있어 아쉬웠습니다.
    3. 아카이브 활용법 강의 시간이 짧아 아쉬웠습니다.
    4. 강의 첫 시간에 참여자 네트워크를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5. 아카이브 실습 프로젝트 과정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활동 계획
     
     
    활동계획 토론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끝으로 아키비스트의 향후 활동 계획에 관해 토론해 보았습니다. 우선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는 올해 탄핵과 내년 지방선거에 맞춰 ‘민주주의’와 관련된 포럼 및 온 오프라인 활동을 계획 중이라고 밝혔는데요. 해당 프로젝트의 시초가 오늘의 민주화운동기념관 방문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앞으로 포럼에서 패널 참여, 구술 기록, 취재 등을 통해 시군별 혹은 분야별로 경기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제안하거나 변화를 위한 노력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민주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도 노동, 인권, 성 평등 등의 다양한 주제들로 활동할 계획이라고 하는데요. 또한 민주주의 관련 시민단체 네트워크와도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한 교육생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는데요. 공통으로 협의가 이뤄진 내용들을 담아보았습니다.
     
    1. 프로젝트에 필요한 온라인 마케팅/홍보 방식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2. 실습 시 자문과 심화 교육 등을 통해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 센터에서 아카이브 활동을 위한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형태의 공유/협업 플랫폼을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4. 지역의 문제를 지자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했는지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5. 시민사회의 기초 조사를 위한 현장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6. 서로의 과거 활동과 욕구에 대해 알아보고 필요한 교육과 회의를 진행해야 합니다.
    7. 기금 모금, 프로젝트 계획 등 각 단체에서 할 수 있는 것들도 포함해 우리의 콘텐츠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수료식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감각의 전시의 향연이었던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의 배움은 필히 미래의 아키비스트에게 큰 자양분이 됐을 텐데요. 앞으로 이들은 경기도 시민사회 속에 녹아들며 ‘톺’에 담긴 양질의 가치를 맘껏 펼치고자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너무나도 쉽게 기록이 버려지는 세상 속에서 아카이브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주인공이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는데요. 개개인의 기록과 아카이브의 서사를 통해 사회에 빛을 밝히는 ‘공익 스토리텔링’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1, 2, 3) 출처: 민주화운동기념관 전시 안내 자료
    

     

     

    [현장스케치] 아키비스트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초스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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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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