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5기 아카이브 에디터 심지입니다. 여러분은 기지촌여성, 또는 미군 ‘위안부*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고, 사회적 관심도 그만큼
크죠. 하지만 그에 비해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 기지 주변에서 살아온 여성들, 이른바 ‘기지촌여성’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양공주’라는 모욕적인 말로 불리며 차별받아온 이들의 삶은, 국가 안보
와 경제 논리 속에서 외면되어 왔습니다.

“기지촌여성이란?” (출처: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
atch?v=ul8hniTh0DA)
- 햇살이 비추는 자리
햇살사회복지회는 평택 안정리에 있는 작은 단체입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20
년 넘게 기지촌에서 살아온 여성들 곁을 지켜왔어요. 그분들을 위해 공동식사를 준비하고, 병원에 같이 가고, 연극을 만들고, 노래를 부
르며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70대, 80대가 된 할머니들이에요. 우리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오셨지만 누구보다 강인하게 자기 삶을
이끌어오신 존경스러운 어른들입니다. 할머니들의 삶은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시작됐습니다. 인
신매매로 팔려왔던 분들도 계시고, 가족을 위해, 또는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
해 집을 나와 생계를 위해 기지촌에 들어오게 된 분들도 계십니다. 기지촌에서의 삶은 혹독했습니다. 국가의 주도적인 미군위안시설 운영과 기지촌의
착취구조 속에서 여성들은 성적·물리적·정신적·경제적 폭력을 마주하였습니다. 사
회적 낙인과 차별 속에 살아야 했고, 노년에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 2022년, 법원은 기지촌여성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
여성들은 오랜 침묵을 깨고 직접 국가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부터
기지촌 여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마침내 2022년
대법원에서 국가의 책임이 일부 인정되었습니다. 국가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성병관리소에 강제로 수용하고, 페니실린을 과다
투여하며 여성들을 통제·관리한 행위가 명백한 인권침해로 인정된 거예요. 이 판결은 법적인 의미를 넘어,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바
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 문화예술로 지난 세월을 증언하다

“연극 <숙자 이야기>” (출처: 햇살사회복지회 홈페이지)
“그때는 내가 가슴에 이따만한 돌을 가지고 있어서 무거웠어요. 그래도 햇살 다니면서 많이 나아진 거지. 노지향 선생님이랑 연극 하면서부터 이따만한 게 바스러진 거지.
... 그건 안 없어져. 지금도 있기는 있어” -수지- 햇살은 기지촌 할머니들과 함께하며, 그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을 해왔습니
다.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활동은 할머니들이 함께 만든 연극과 공연들이에요. "숙자 이야기", "문밖에서", "오프리밋(Off-Limit)" 같은 작품에서는 할머니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연기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시간
을, 연극이라는 매개로 함께 꺼내 놓는 일이었습니다. 무대에 선 할머니들은 상처만 품은 존재가 아니었어요. 그 시간은, 삶의 조각들을
스스로 마주하고 말할 수 있게 해 준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주체적으
로 풀어낼 수 있는 용기를 얻으며, 피해자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세
상에 전할 수 있었어요. - 기지촌여성평화박물관 ‘일곱집매’
이런 흐름 속에서 햇살은 2021년, ‘기지촌여성평화박물관-일곱집매’를 열게 됩니
다. 평택 기지촌 안에 있는 작은 박물관이에요. 한 할머니가 기부한 땅과 담보대
출, 그리고 여러 단체의 지원으로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햇살은 이 박물관을 통
해 기지촌의 역사를 다음 세대와 이어가고 있어요.

“경계 없는 마라톤” (출처: 에디터 촬영)
지난 10월 18일, “경계 없는 마라톤” 행사가 열렸는데요. ‘마라톤’이라는 말이 붙
었지만, 함께 산책길을 걸으며 기지촌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전시와 함께 응용연극 워크숍, 지역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킹 파티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 기지촌 할머니 한 분이 직접 샌드아트를 연
습해서 공연도 하셨답니다! - 당신의 일상으로 박물관을 초대할게요
이 날은 "그랜드마 햇살 가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전시와 후원 프로젝트도
시작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후원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
림을 키링, 티코스터, 책갈피 같은 굿즈로 제작해 ‘당신의 일상으로 박물관을 보내
는’ 시도예요. 박물관이 평택 외곽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방문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기
지촌의 이야기를 더 가까이에서 나누고 싶다는 고민이 담겨 있었죠. 작지만 정성
가득한 물건들로, 기지촌 할머니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도록 했답니
다.

“그랜드마 햇살 가든 전시관1”(출처: 에디터 촬영) “그랜드마 햇살 가든 전시관2”(출처: 에디터 촬영)
전시관에는 할머니들의 그림과 함께,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문 건너편에 적혀있었
어요. 그리고 관람객들도 소망의 열쇠를 걸어두는 참여예술도 진행되고 있었습니
다. 마치 제 열쇠로 할머니들의 마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만 같았어요.

“할머니 작품 – 경희의 집 中”(출처: 에디터 촬영) “굿즈-경희의 귀염둥이, 강아지 까미”(출처: 에디터 촬영)
저는 할머니 작품 ‘경희의 집’에 등장한 강아지 까미를 데려왔어요. 기지촌 할머니
들의 작품이 더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기지촌 여성과 세상을 연결하는 다양한 공익활동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https://tumblbug.com/7sisters_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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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3
고통스런 역사, 그러나 기억해야 할 역사
-제14차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을 맞이하며-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던 1930년대 초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1945년 8월 15일까지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 점령지였던 중 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동티모르 등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군 문서에는 그 여성들을 ‘위안부’라고 표시했다. 피해여성의 수는 20여만 명을 비롯해 여러 추정치가 있으나 관련 자료가 전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수치를 알기 어렵다. 한국인 생존 여성들의 경우 동원 당시 나이가 11세의 어린 나이에서 27세까지로 보고되어 있으며, 14세~19세 때 동원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위안부’여성은 일본 육군성의 직접적인 지시와 정부 기관,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 등이 협력을 통해 강제 동원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UN 특별보고관은 이 문제를 명확하게 ‘전시 중 군대 성노예제(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로 규정하였다.
‘위안부‘여성들은 엄격한 감시와 통제 아래 하루에 많게는 몇십 명에 이르는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병사들로부터 폭력, 고문, 자살 강요 등의 학대를 받았다. 성병이나 임신, 질병 등이 확인되면 강제적인 시술이나 낙태를 받아야 했고 군인들을 통해 마약을 주사 받거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마약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위안소에 있던 여성들은 종전이 되자 자살을 강요당하거나 집단 죽임을 당하였고, 머나먼 타지에서 고국으로 생환하기 위해 갖은 어려움을 겪거나 귀환을 포기하기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위안소’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대다수가 성병, 자궁 이상, 불임, 가혹행위로 인한 외상 등이 확인됐고, 대인공포증, 불안, 수치심, 자기 비하 등의 심리적 후유증도 심각했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며 숨죽여 살아야 했고 그리하여 대부분 빈곤과 궁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본군‘위안부’피해 역사는 해방 후 알려지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이르러 윤정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초대 공동대표 1925 ~ )가 해방 후 돌아오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의문과 책임감으로 집념 어린 조사를 시작했고.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한국여성운동 단체들이 힘을 모아 1988년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아직 세상으로 드러난 피해자가 없던 당시,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1924~1997)의 기자회견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개설된 ‘정신대 신고 전화’를 통해 피해 사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과 피해자 접수가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정부의 관여를 계속 부인했고, 이에 정대협과 여성계는 1992년 1월 8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곱 가지 요구사항-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배상, ▲전범자 처벌, ▲역사교과서 수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을 촉구하며 첫 번째 수요시위를 시작했다. 이후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정대협 주최로 이어져 2011년 12월 14일에 1000회를 맞이하여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했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군‘위안부’역사에 대한 일본과 세계인의 반응
이러한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세계인의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물꼬를 튼 것이 미국 연방의회 일본군 위안부 사죄(HR121) 결의안이다. 2007년 7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클 혼다(Michael Honda)의원이 제기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미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 결의안은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명백하게 인정하고 사죄할 것과 끔찍한 범죄 행위에 대하여 현재와 미래 세대들에게 교육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를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새로운 국면를 맞이했다. 2008년 10월 30일, 유엔인권이사회(UNHRC)와 유럽의회 등 각국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피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증언과 국내외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단체의 헌신적인 활동, 재미 한인 사회의 노력이 함께 이룬 결과였다.
2014년 UN 인권위원회의 최종 권고문은 이러한 세계의 목소리를 집약하고 있다. 이 권고문은 일본의 제6차 국가보고서를 심의한 뒤 채택한 최종 견해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에 권고한 최종 내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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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하여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입법 및 행정 조치를 취해야 한다. 1. 전시 중에 일본군이“위안부”에 대해 저지른 모든 성노예 또는 기타 인권 침해 혐의가 효과적이고 독립적이며 공정하게 조사되고 가해자는 기소되고 유죄 판결 시 처벌을 받도록 한다. 2.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정의로운 접근과 완전한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3. 가능한 모든 증거들을 공개해야 한다. 4. 적절한 참고 자료를 포함시킨 교과서로 성노예제 문제에 대하여 학생과 일반 대중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5. 당사국의 책임에 대하여 공식 인정하고 공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 6. 위안부 역사를 부정하거나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는 비난받아야 한다. |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
유엔과 양심적인 세계인의 반응과 달리 일본 정부가 내민 것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이었다. 일본은 이 협정을 근거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인 배상 문제는 이미 종결된 사안’이라며 '도의적인 수준의 책임'으로 대응해왔다. 일본의 최고 재판소는 1990년대 제기된 위안부 피해자, 징용자 소송에서 "한국이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여 최종적으로 청구권을 소멸시켰으므로 더 이상 청구권은 없다"며 패소 결정을 내렸다.
이후 한국과 세계의 여론에 밀려 1992년,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과오 인정과 사과 발언이 있었고, 이어 1993년에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와 1995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를 통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공식 발언이 나왔다.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밝혀 위안부 문제의 책임이 군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1995년 7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했다. 기금은 한국 피해자에게 '쓰고 나이킨(償い金, 속죄금, 당시 언론은 위로금으로 해석)' 명목으로 지원했고, 국민 모금 방식으로 기금을 조성함으로 피해 여성들이 요구했던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 책임을 회피하려는 꼼수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한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게 바로 ‘2015 한일 위안부 협상’(이하 2015 한일 합의)이다.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일본 정부가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 방안에 합의하고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으나, '굴욕 협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TF’의 보고서는 이 합의의 문제점을 공식 확인했다. 국가 간 협약이기에 파기는 못하지만, 문제가 많은 굴욕적인 외교 협상이었다는 게 중론이었다. 한.미.일 간의 안보 협력 강화를 위해 한일 간의 걸림돌이 되었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한 외교 참사였다는 것이다. UN 인권위원회의 지적대로 무엇보다 협상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견이 배제된 채 이뤄졌다는 점, 그리고 평화의 소녀상 처리에 대한 이면합의가 존재한다는 점은 인권문제를 다루는 기본자세가 결여된 외교참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했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사실상 진정성 있는 사죄나 배상을 한 적이 없다. 겉으로는 외교적인 수사로 일관하며 뒤로는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는 것을 방해하고, 학생들에게는 위안부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국내외 극우 세력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피해자를 능욕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국회에서는 2026년 2월 12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서 위안부 피해 여성을 모욕하는 경우 처벌할 근거를 마련하였다.
계속해서 기억하고 언급해야 할 이 역사
명백한 증인과 증언, 증거가 존재하는 일본군‘위안부’역사를 대하는 일본 정부와 대비되는 국가가 있다. 바로 일본과 같은 2차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역에서 행해진 유대인 학살은 인류의 근현대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역사 중 하나다. 그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모아 그 유대인 학살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폴란드 바르샤바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재단(Auschwitz-Birkenau Foundation)을 2009년에 설립하였다. 이 재단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 유적의 보존과 관리 기금 조성을 맡고 있으며 수많은 유물·문서의 보존, 복원, 목록화하여, 고통스러운 기억을 미래 세대에 전하는 그것을 핵심 사명으로 삼고 있다. 2019년 12월 6일, 재단 설립 10주년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안젤라 메르켈 총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 역사는 (계속)언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현재와 미래에 모든 개인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으며, 그것이 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명예롭게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총리는 아우슈비츠를 방문할 때마다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브란덴부르크 문 남쪽)에 크기가 다른 2,711개의 격자형 콘크리트를 세운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이 약 1만 9,073㎡(약5,750평)의 광대한 면적에 조성되어, 전 세계인들이 방문하는 추모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나치 정권의 전쟁과 유대인학살에 대한 역사교육은 독일에서 의무화되어 있다.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전 세계인에게 밝힌 셈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일 년 내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추모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곳에는 수용되었던 이들의 신발과 가방, 그리고 머리카락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당시의 참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반지하실로 조성된 가스실과 화장장 화로를 보고 있으면 모두가 숙연해진다. 전쟁이 인간의 양심과 지성을 어디까지 파괴하는지 똑똑히 보여주는 역사적인 현장이다.
그 수용소 현장 벽면에 걸려있던 스페인 태생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1863~1952)의 글귀가 많은 방문객의 시선을 머물게 한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다시 겪게 될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역사가 고통스러운 역사지만 잊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 기억의 시도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일본대사관 앞 정기 수요집회로 시작되었다. 수요집회 1000번째 맞이하는 시점인 2011년 12월 14일,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여성을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조형물의 제작과 건립의 모든 과정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이후 평화의 소녀상(평화비)는 다양한 형태와 이름으로 국내외에 확산되어, 2026년 7월 현재, 국내 155곳, 일본과 미국, 중국, 호주, 독일 등 10개국 35곳에 세워져 있다. 이제 평화의 소녀상은 전쟁 중에 당한 성노예제 피해 여성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정의로운 해결과 전쟁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이다.
기억 문화는 기록문화와 함께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고 보편적인 가치와 원리를 추구함으로 인간 내면에 자리한 야만성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는 인류 문화의 두 축이다.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저장하고 되살리는 행위다.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 의해서 과거는 기억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됨으로 역사의 진보를 이루는데 기여한다. 기억 문화로서 평화의 소녀상은 과거 고통스러운 역사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 없는 평화 세상을 염원하는 인류의 소망을 담아내면서 세계적인 평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제14차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
매년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지킨다. 이날은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 사실을 처음 공개 증언한 날을 기려 정해졌다. 이후 2012년 타이완에서 열린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매년 8월 14일을 세계 기림일로 정했고, 한국에서는 2017년 법 개정을 거쳐 2018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정해졌다.
이날은 단순한 추모일이 아니다. 피해자의 용기와 증언을 기억하고 일본군 성노예제의 진실 규명, 사죄, 배상, 역사 교육을 촉구하는 날이다. 전시 성폭력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가 책임 있게 배우고 행동하자는 의미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할 기념일이다.
제14차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 총주제는 “그들의 굳센 바람, 우리의 힘찬 바람이 만나”로 정해졌다. 기억은 말에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 기억은 책임으로 이어져야 하고, 책임은 교육과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현실에서, 기림의 날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 서서 정의와 화해의 길을 묻는 날이 되어야 한다. 특히 다음 세대에게 이 역사를 정확히 전하는 일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시민의 책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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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광복 80주년의 의미
202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정확히 80주년
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광복절은 단순한 국가 기념일을 넘어, 억압과 폭력 속에서
도 자유와 독립을 갈망한 민중의 피와 눈물의 역사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정치적 독립
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올해 80주년은 더
욱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전쟁, 분단, 산업화, 민주화라는
험난한 길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역사 왜곡과 분단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렇기에 80주년은 과거를 단순히 기념하는 차원을 넘어, 앞으로 우리가 어떤 나
라를 만들어갈 것인가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주 간
과되었던 주제가 바로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 속에서 여
성들의 역할은 종종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총을 들고 싸우거
나, 첩보 활동에 나서거나, 해외에서 외교 활동을 이어가는 등 결코 작은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가정과 사회의 억압적 관습을 깨고 독립운동에 헌신
한 여성들의 행보는 오늘날 성평등과 인권의 시각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우리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다시금 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들은 역사의 공백 속에 묻힌 존재가 아니라, 독립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사적 역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직접적 무장 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입니다. 대표적으로 남자현 지사는 만주와 중국
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하며 일본 군인 암살과 폭탄 투척 계획을 주도했습니
다. 그녀는 "내 몸이 썩어 없어져도 조선 독립의 밑거름이 된다면 영광"이라며 생
을 바쳤습니다. 둘째, 문화·교육 활동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한 여성들입니다.
김마리아, 박인덕 등은 여성 교육 운동을 통해 식민지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미래
를 이끌 차세대를 키우려 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여성에게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는 혁명적 의미를 가졌습니다.셋째, 국제
무대에서 외교적 활동을 벌인 여성들입니다.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의 상징적 인
물로 남았다면, 그 외에도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린 여성들이 존재했습니다. 김알렉산드라(고려인 독립운동가)는 러시아 혁명과 연계해 활동했고, 정정화 지사
는 임시정부의 자금을 전달하며 항일 외교의 실질적 지원을 했습니다. 이렇듯 여
성 독립운동가들은 단순한 보조적 역할을 넘어, 독립운동 전선의 다양한 층위에서
주체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총칼 앞의 용맹뿐 아니라, 문화·교육·외
교 전선에서 ‘조국의 독립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몫’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 유관순 (1902~1920)
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 병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며 어려
서부터 교육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제 식민 지배
로 민족의 자존심이 짓밟히던 상황이었고, 유관순 역시 어린 나이부터 나라 잃은
설움을 체감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와 함께 기독교 신앙을
지켰으며, 이는 이후 독립운동에 나서는 데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15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한 유관순은 신여성으로 성장하며 민족 문제에도
관심을 키웠습니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화학당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고종 황제의 서거가 전국적 분노를 불러일으
킨 가운데, 유관순은 “나라를 되찾는 데 여성도 앞장서야 한다”는 신념으로 행동
에 나섰습니다.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시위에 참여한 그는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 시위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였으며,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수십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 역시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비극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체포된 유관순은 서대
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이끌며 독립 의지
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 만세운동을 벌였고, 일
본 간수들에게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1920년 9월, 만 18세의 나이로 순
국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죽음은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본
당국은 장례조차 통제했지만, 민중들은 그녀를 ‘대한의 딸’, ‘조선의 잔다르크’라
부르며 기렸습니다. 그녀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3·1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하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 남자현 (1872~1933)
남자현은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웠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강한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찍 결혼했
으나 남편을 병으로 잃고 홀로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 침탈
이 본격화되자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남자현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지원하는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식량과 자금을 마련해
전달하는 것은 물론, 직접 무기를 다루며 항일 무장투쟁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당
시 여성으로서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그는 “나라 없는 여성에게는 가정도, 삶도 없다”며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
본군 고관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1932년에는 하얼빈에서 일본의
대사와 관리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후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동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단식을 이어간 끝에 1933년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남자현
지사의 투쟁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첫째, 여성으로서 ‘직접 무장투
쟁’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이는 독립운동이 단지 남성의 몫이 아니었음을 증명했
습니다. 둘째,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철저히 희생했으며, 심지어 자
녀에게조차 “나는 조국을 위해 살다 갈 것이다”라는 신념을 남겼습니다. 남자현
지사는 비록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나, 실제로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의 생애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 정정화 (1900~1991)
정정화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사상을 접했고,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당
시 많은 여성들이 거리 시위에 참여했으나, 정정화는 단순한 시위 참여에 머물지
않고 임시정부와의 연결 고리를 자처했습니다. 1920년대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
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운영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자금난이었는데, 정정화는 국내에서 모은 독립운동 자금을 중국으로 전달
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지만, 그는 어린 딸을
데리고 위장해 국경을 넘나들며 자금을 전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심부름’이 아
니라 임시정부 존립의 핵심을 떠받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정정화는 임시정부 요
인들의 가족을 돌보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라는 위치에 머
물지 않고, 스스로 ‘운동가’로서의 자각을 갖고 행동했습니다. 실제로 훗날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나는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아니라, 나 자신이 독립운동가였다”고
밝힌 것은 여성 독립운동의 주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광복 이후에도 정정화
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광복 후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잊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이들의 공적을 알
리기 위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1991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우리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는 정신을 간직했습니다. 정정화 지사의 삶은
여성의 역할이 단순히 보조적이라는 편견을 넘어섰습니다. 그녀는 독립운동의 현
장에서 자금·외교·생활 전반을 지탱한 보이지 않는 중심축이었으며, 여성 독립운
동가의 대표적 상징으로 평가됩니다. ● 김마리아 (1892~1944)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서
양식 교육을 받으며 민족 의식을 키웠습니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그는 여성
으로서 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교육과 계몽을 통한 독립운동을 결심했습니다. 일
본 유학 시절, 그는 기독교계와 학생운동을 통해 민족 문제를 접했고, 점차 정치
적 투쟁으로 방향을 확장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그는 도쿄 유학생 시위
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귀국한 김마리아는 국내 여성들을 규합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단체는 여성들의 조직적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독
립군 자금 모금과 애국계몽 활동을 펼쳤습니다. 여성들이 단순한 가정의 역할을
넘어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선 상징적 사례였습니다. 1920년대 이후 김마리아는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연계했습니다.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을 병행했으며, 미국에서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미주 지역 교포
사회와 기독교계 네트워크를 활용해 국제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알렸습니다. 그러
나 그의 삶은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 이어졌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위험 인물” 로 분류했고, 체포와 감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광복을 보
지 못한 채 194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마리아는 독립운동사에서 여성 지도자
로 평가됩니다. 그는 무장투쟁 대신 교육과 조직, 국제 외교 활동을 통해 독립운
동의 기반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사회적 역할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여성운동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됩니다. ● 윤희순 (1860~1935)
윤희순은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겪은 여
성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유학자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 전통적인 여
성의 삶을 살았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특히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을미사변 이후, 그는 의병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윤희순은 단순히 의병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병가와 격문
을 지어 민중의 저항 의지를 고취했습니다. 그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문학적 수단을 항일운동의 무기로 삼았으며, 이는 일종의 ‘문화적 무장투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와 노래는 남성 의병들에게 전해지며 투쟁 의지를 불태우
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윤희순은 직접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품과 자금을 조달
했습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자들을 간호하며 후방 지원에도 헌신했습니
다. 그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자리가 부엌과 가정에 한정되었던 시대를 넘
어, ‘의병장과 같은 여성’으로 활동했습니다. 1907년 정미의병 이후 일제가 무력
진압을 강화하자 윤희순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만주 지
역에서도 의병 잔여 세력을 규합하며 항일 투쟁을 지속했지만,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193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내가
죽어도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윤희순은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최초의 의병 여성 지도자로 평가되며, 후대에 ‘의병장
할머니’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 오늘날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공로를 기리는 차원이 아닙니
다. 이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역사 정의의 문제입니다. 첫째, 역사적 균형의 회복
입니다. 그동안 독립운동 서술은 남성 중심적이었고, 여성의 활동은 부차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성 독립운동
가를 다시 조명하는 것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입니다. 둘째, 성평등의 관점
에서 본 재조명입니다. 여성들은 식민지 상황뿐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 구조라는
이중 억압 속에서도 싸워야 했습니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여성 해방의 기초를 닦은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셋째, 청년 세대에게 주는 교훈입
니다. 오늘날 자유와 민주주의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일은 현재 세대가 누리는 권리와 자유의 뿌리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단순히 기념식에 머무르지 말고, 기억의 확장을 해야 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불러내고, 그들의 이야
기를 교육과 문화 속에서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라 할 수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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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0지난 4월 21일 안산에는 아주 특별한 생일잔치가 있었다. 풀뿌리 여성단체이
자 전국에 하나뿐인 ‘함께크는여성울림’의 창립 10주년을 축하하는 좌담회였
다. 안산 고잔동의 울림 교육장이 “세상을 향한 큰 울림 함께 걸어온 10년
이야기” 꽃으로 가득했다. 김혜정(우공) 전 대표와 조창아(짱아) 신임 대표의
육성으로 여성단체 ‘울림’을 들어보자
자기소개부터 부탁한다. 우공: 10년간 울림 활동가이자 2년의 전임 대표 자리를 벗어나서 회원으로
살기 시작한 지 2개월째인 우공이라고 한다.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
어서 완전히 활동가의 탈을 벗지 못했지만 어쨌든 마음은 자유로운 개인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짱아: 나는 지난 2년간 울림의 이사였다가 올해 대표이사까지 맡게 돼 막중
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내가 대표를 맡기 전후로 내란 불법 계엄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덕분에 활동가로 갑자기 성장한 대표라고 소개하겠다. 울림이 뭐지? ‘함께크는여성울림’을 소개해 달라. 우공: 안산에만 있지만 회원이 다른 지역과 해외에도 있는 전국구 여성단체
다. 일상의 차별과 성 역할에 갇혀 살던 여성들이 모여 떠들고 설치고 자유롭
게 말하는 안전한 공간이자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지역의 작은 배움
터다. 이름 그대로 나만 잘 나가는 게 아니라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하는 곳
이고 더 큰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다. 짱아: 온오프라인으로 모이는 13개의 회원 소모임이 활발하다. 성평등 가치를
담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운영, 지역사회의 인권 관련 현안, 세월호 참사 등
안산의 민주시민 단체와 연대 활동한다. 12.3 계엄의 밤 이후 123일 동안 ‘비상행동’과 함께 윤석열 파면을 끌어냈다. 올해 4월 울림 10주년 기념 자료
집을 펴내고 좌담회를 비롯한 기념 사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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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함께크는여성울림’의 창립 과정이 궁금하다. 우공: 여성단체 활동 경험이 있는 세 사람이 주축이 되어 만들었다. 2014년
부터 사회적 기업 등 여성 공동체 설립을 위한 공부를 했다. 지인들과 발기인
을 모으고 돈을 모아 2015년 2월에 안산에서 74명으로 창립총회를 하고 4월
에 법인설립을 완료했다. 돈이 없어서 페인트칠 벽지 등 실내장식을 회원들이
손으로 다 했다. 목재로 된 글자 하나까지 발로 뛰어 찾아서 ‘함께크는여성울
림’ 현판을 달았다. 당시 안산에 여성노동자회와 YWCA 두 여성단체가 있었다. 차별점이 뭔가?
우공: 여성노동자회는 일하는 여성들이 중심에 있고 YWCA는 기독교적 이념
에 기초해 평화운동, 청년운동을 함께하는 좀 더 포괄적인 여성공익 운동단체
다. 각각 엄청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생활 중심형 여성단체”를 만
들고자 했다. 여성취업률이 꾸준히 늘어나고는 있지만 단시간 시간제 노동과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도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지역을 기반으로
사적 공간에 있는 여성들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공적 활동과 연결되는 통
로가 필요했다. 한마디로 울림은 일상에 밀착된 여성운동 단체다. 지금은 회원이 얼마나 되나? 많이 들고났을 거 같다. 우공: 현재 200명쯤 된다. 한 해 보통 30명씩은 들어왔지만 나가는 사람도
많아 생각보다 증가 속도가 느렸다. 그리고 초창기에 “도와주세요”, 읍소해서
100명 채워준 이들이 시간이 가면서 떠나갔다. 사돈의 팔촌 회원들 빼면 한
50명으로 시작해 10주년에 200명까지 왔다. 상당수 회원들이 기존 회원의 소
개로 오니, 울림은 회원들이 함께 키운 단체가 맞다. 두 분 삶에 울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는 울림의 장점을 자랑해 달라. 짱아: 가장 든든하고 신뢰하는 여성들의 집합체다. 울림을 빼면 나를 설명할
수 없을 거 같다. 울림 활동 7년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가 커졌다. ‘성평등
한 민주사회 실현을 위해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생활 중심형 여성운동’이라는
모토 그대로였다. “울림이 뭐 하는 곳인 줄도 모르고 좋은 사람 따라왔다가
배우게 되고 실천으로 연결됐다.” 이런 고백 많이 들었다. 나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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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 회원 소모임을 자랑하고 싶다. 페미니즘모임, 4.16세월호참사기억모임, 걷기인증모임, 산행모임, 글쓰기및합평모임, 영어모임, 그림모임, 우쿨렐레모
임, 환경모임 등 여성의 관심사만큼이다 다양하다. 홈페이지제작모임, 코딩모
임 등 IT관련 관심도 늘고 있다. 정치 성향 상관없이 관심 분야로 모여 놀며
배우며 활동한다. 소모임에서 어울려 회의나 여성대회 등 큰 행사에 참여하기
도 하고 연대 집회로도 연결된다. 나도 처음 울림에 발을 들인 건 활동가들의
인성이 좋아 보여서였다.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별을 품은 사람
들’에서 세월호 기억확동을 하며 내적 외적으로 성장을 경험했다. 우공: 개성 넘치고 재능 있고 멋진 여성들이 울림의 자랑이다. 울림은 여성들
이 서로 연결되는 만남의 장이자 사랑방이다. 사람이 연결되면 거기에 재미난
이야기와 다양한 정보가 오가고 활동을 만들어내고 참여와 연대도 이루어진
다. 아쉬움은 내가 이슈 파이팅 활동에 많이 참여하지 못한 점이다. 연대체들
과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울림도 나도 더 확장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다. 이제 새 대표가 잘해줄 거라 믿는다. 각자 여성운동에 몸을 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우공: 나는 좀 늦게 발을 들인 편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세 딸 중 둘째로 남자가 없는 집에서 자라 그런지 여자라고 차별받은 경험은
많지 않았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몸담았지만, 당시 여성운동에는 별 매력을
못 느껴 안타깝게도 페미니즘 세계를 모르고 20대를 지나쳤다. 그런데 결혼
한 지 일주일도 안 돼 가부장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걸 바로 느끼게 되면서
성차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났다. 아이 낳고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 재미가 없
고 무의미해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더라. 직업상담사 자격을 따고 1년간 봉사했다. 경력 중단 여성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과 현실의 괴리가 컸고, 여성들과 상담하다 보니 직
장 내 성희롱과 가정폭력 얘기를 많이 듣게 되더라. 야, 여성에게는 취업보다
폭력 문제가 더 심각하구나, 깨닫고 관련 공부를 하게 됐다. 30대 후반 본격
적으로 여성운동 판에 들어간 게 안양여성의전화였다. 젠더폭력에 대응하는
상담도 중요하지만, 성차별 세상을 바꾸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싶어 사무국 일을 주로 했다. 그때 처음으로 안산에도 이런 단체가 있으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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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 생각했고 결국 뜻 맞는 활동가들과 울림을 만들 수 있었다. 짱아: 2018년에 김혜정 사무국장을 만나게 되면서 울림에 가입했지만 별 활
동은 없었다. 순천에서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안산으로 돌아오면서 글쓰기 소
모임을 만들어서 울림 활동가들과 더 가까워졌다. 울림 3년 차에 이혼했다. 나 혼자 사는 집에 울림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차 마시고 밥 먹고 술도 마
시며 외로움을 덜어 주었다. 그러다 소모임 ‘별을 품은 사람들’에 들어가면서
이전에 피하던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마주하게 됐다. 그때까진 내 슬픔이 가장
컸는데 생각의 전환이 오더라. 외로워서 슬프고 남편이 떠나서 슬프고, 그런
슬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지더라. 그러니까 내 슬픔에 매몰됐을 땐 해결
되지 않더니 다른 아픔에 동참하니까 내 슬픔이 작아지고 연대가 주는 위로
가 아주 크게 다가왔다. 도망치지 않고 슬픔의 한가운데에 서는 법을 배운 거
같다. 그러다 울림 이사 제안도 수락했고 대표이사 제의도 수락하지 않았나,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계엄 사태 한 달쯤 지났을 때 대표이사 투표가 있었다. 시국이 내가 빨리 대
답하게 했다. 우리 사회 어떡하지, 울림 어떡하지, 모두 내 문제로 다가왔다. 새로 시작한 생업을 하며 대표이사를 맡고 매주 광화문 집회에도 나갔다. 그
때 절박하게 느꼈다. 정치와 내 삶이 따로 있지 않구나. 내 삶을 뒤흔드는 게
정치구나, 내란 시기에 날마다 그런 각성을 했다. 내가 실천을 조금이라도 하
지 않으면 정말 우리나라 전체 이 선박이 좌초되는 건데, 내가 지금까지 사회
가 어떻게 돌아가든 내가 할 게 없다 생각하고 내버려뒀구나, 부끄러웠다. 개
인적인 상황 국가적인 상황 울림의 상황이 다 하나로 연결됐다. 울림의 신임 대표로서 취임 2개월의 소회가 궁금하다. 짱아: 2월 6일에 취임했지만, 작년 12월에 이미 대표이사 투표가 있었고 내
마음의 결정은 아마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한 것 같다. 돌봄으로부터
자유로워서 가능했다. 그때 활동가들이 10주년 기념 자료집을 준비하고 쓰고
있었다. 그 작업을 도우면서 이 힘든 일을 왜 하느냐고 조심스레 문제를 제기
했다. 울림 10년 역사를 네 명의 활동가가 책으로 엮기엔 역부족이라 생각했
다. 그만큼 부담이 컸다. 그러나 자료집 초고를 읽다 보니 지난 10년의 사람
들과 역사를 다시 보게 됐다. 그 수고 덕에 내가 안정적으로 5대 대표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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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받을 수 있었다. 책임을 맡고 보니 전에 안 보이던 게 많이 보여서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보
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연대 활동에 대표가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활
동가 풀이 크지 않아서 지속적으로 나갈 사람이 적은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항상 시의적절하게 매듭할 거 매듭짓고 자료 정리 잘해준 활동가들이 새삼
고맙더라. 며칠 전 꿈을 꿀 정도였다. 내가 앞으로 2년간 일을 하고도 흩어놓
고 쓸려가게 만들지 않을지 걱정돼서였다. 생업과 울림 활동을 병행하며 일상
을 살아내려니 마음 관리도 잘하려 하고 있다. 파면 전전주에 한 회원이 처음으로 집회 참여를 한 후 들려준 소감이 생각난
다. 원래 “저는 광장 그런 데는 안 나가요.”라던 분인데 내가 지나는 말로 같
이 가자 그랬다. 울림은 누구도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분이 탄핵 광
장에 다녀온 후엔 “민주주의를 바라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 함께한 시민
들의 모습에 감동했다. 역사의 현장에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라고 고백했다. 이게 함께하는 재미다. 창립 맴버로서 전임 대표직을 마치는 소감은 어떤가?
우공: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성평등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다. 울림도
마찬가지다.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책임을 내려놓는 게 마냥 편
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물러나도 계속 함께 하는
활동가들이 있고 임원을 비롯해 적극적인 회원들이 있다. 또 새 대표가 엄청
적극적으로 해 나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언젠가 넘어야 하고 이제는 넘어
가는 걸 시도해 봐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적기였다. 내 선택이 옳았고 울림도
잘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창립 위원들이 돌아가며 대표를 해 왔는데 이제 다음 세대로 대표 이
전이 되고 임원진들이 바뀌고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10년을 탈
없이 잘 왔다. “울림이 있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보면 보람을 느낀다. 10주년 앞두고 몇 차례 비전 워크숍을 하며 우리 단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임
원들이 많아진 걸 보았다. 이사진 중심으로 역할 배분도 되고 공동 운영 마인
드도 생겼다. 조창아 대표가 사람을 포용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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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마음을 모아주고 있는 게 느껴진다. 성공적으로 잘 가고 있는 것 같
다. 향후 10년 울림의 비전과 과제가 있다면?
짱아: 탄핵 광장에 나온 2030 여성들에게서 감동과 자극을 많이 받았다. 그
분들과 연대하는 페미니스트 단체 울림으로 계속 성장하고 싶다. 근데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한다고 가다 보면 사람들을 놓칠 수 있더라. 오히려 사람
들과 하루하루 함께 걷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지금까지 그랬듯 함
께 이야기 나누고 함께 공부하고 글 쓰고 하는 그 자체가 울림의 존재 이유
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의 도전과 과제는 교육과 홍보, 재정 확충, 세대 간
연대 등이 있다. 운영진과 회원들의 페미니스트 역량 강화도 과제겠다. 현재
로선 울림 자체가 내 꿈이다. 울림이 있다는 자체가 내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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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7시간이 참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을사년을 맞이한 지 어
언 3달이 흘렀습니다. 이번 달은 새로운 사업들이 생겨나는 시기인 만큼 이에 맞
춰 올해 세운 계획과 함께 다양한 꿈들을 실천하고 계실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
하는데요. 마찬가지로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도 작년에 이어 올해 공익활동
가학교 과정을 다시 열며 공익활동가를 발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습니다. 어
떤 신입생들이 같이하게 됐는지 현장으로 떠나볼까요?
공교희
이번 공익활동가학교 새싹 과정의 공식 명칭은 ‘공교희’입니다. 이를 자세히 풀이
하자면, 공익활동가 교육에서 희망을 찾자는 의미라고 합니다! 즉, ‘공교’라는 표
현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우연히 일어났을 때도 쓰이지만 솜씨 있고 실력 있다는
뜻에도 사용되는 것처럼 늘 노력하는 훌륭한 활동가들 모두가 우연히 만나게 된
자리에서 필연이 돼 함께 희망을 찾자는 뜻이라고 하네요.

해당 교육 과정에는 경기지역 2년 차 이하 신규 활동가, 공익활동에 뜻을 품고
있는 예비 활동가, 유관기관 실무자, 경기도민 등이 참여하였는데요. 북부 과정은
총 18명, 남부 과정은 13명이 참여하게 됐습니다. 새싹 과정 교육은 오프라인으로
진행하고 공익활동의 미래, 역사, 디지털 실무 기법 등 6회차의 강의가 계획돼 있
다고 합니다. 또한 학습공동체를 운영하여 동료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기회를 마
련한다고 하니 꽤 규모 있는 공익 활동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가 컸답
니다. 끝으로 교육비 지원과 수강생들의 요청 시 특강 진행 등의 혜택도 준비했다
고 하니 센터의 배려심이 느껴지네요:)
1강. 공익활동가의 일상을 구성하는 것
- 지역 여성운동 사례에서 지속 가능 전망하기- 사진2

본격적으로 첫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경기여성단체연합 이정아 대표님께서 지역
여성운동을 통해 공익활동이 무엇인지 고찰해 보는 수업을 진행하였는데요. 내용
을 크게 세 가지로 추려보았습니다. 1. 공익 활동의 개념 2. 공익 활동의 역사 3.
공익 활동하는 방법입니다. 첫째. 공익활동의 개념에서는 사회의 보편적인 인식에 질문을 던지는 ‘나’의 관심
의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공익’이라고 하셨는데요. 개인의 의제가 공동의 의제로
확대되며 시민사회단체가 만들어지고 나아가 공공기관과 협력해 우리의 의제와
공공재의 결합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공익활동의 역사에서는 대표님의 출신인 고양여성민우회의 약력을 소개하며
시민사회단체들이 어떻게 시민 활동의 역사를 만들어왔는지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공익 활동은 단체의 부문별 혹은 타 단체와 협력하며 공동의 의제를 실현하는 흐
름이 필요하며 결국 차별 없이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종착지라고 하셨습
니다. 셋째. 공익활동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실용(實用)’을 강조하셨는데요. 봉사, 가치 실현과 같은 무형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현실과 공존하기 위한 실용적
인 부분도 챙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로 지자체의 구체적인 범위의 예산을
분석하거나 특정 대상의 실태조사를 통해 현장을 자세하게 서류화하여 궁극적으
로 이를 정치/정책적 작동으로 일어나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한 공익활동가도 사람이기에 생계와 관련된 지원이 일정 부분 보장돼 지속가능
성과 동기부여를 마련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궁금증이 다 해결되며 강의가 마무리되었는데요. 초면임에
도 다양한 활동가들의 질문과 대답이 편하게 오고 가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의 활
동에 대한 열정이 돋보였습니다:)
수강생 인터뷰
공익활동가 학교 새싹 과정에 참여하신 분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싶어졌는데
요! 따라서 세 분의 수강생들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A) 의정부마을네트워크 활동가 B) 경기도미디어연대/의정부엄마샘아뜰리에품앗이
활동가 C) 경기마을공동체미디어연대/이유 활동가
1. 교육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오늘의 소감?
A)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공익 활동에 대해 배우고 싶어서 참여하게 됐고
오늘 배운 것들을 활용해 지역과 활동 단체에 도움을 주고 센터와 같은 중간조직
지원과 연계하며 지속가능한 공익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B) 경기도미디어연대에서 추천받아서 참여했습니다. 단체 활동하면서 했던 고민들
이 상세하게 풀렸고 조직을 만드는 것을 넘어 목표 의식과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
해야 한다는 꿈이 생겨 좋았습니다. C)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공릴라 라디오 프로그램 패널로 참여하신 전국의 활
동가 얘기를 듣다 보니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공익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서 활동
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새싹 교육이지만 오래 활동한 분들도
반드시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많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느껴 좋았습
니다.
2. 교육 과정 중 가장 기대되는 부분?
A) 이번 기회로 새롭게 정비하고 힘내서 나태해지지 않는 공익활동가가 되고 싶
습니다. B) 협업 툴을 사용해 조직적이고 유동성 있는 활동을 배울 수 있는 강의(효율적
업무를 위한 디지털 워크스테이션)가 기대됩니다. C) 우리 단체는 지역 삶의 문제를 고민하고 얘기하며 그 과정을 미디어로 기록하
고 홍보하는 활동을 합니다. 따라서 특강(공익활동 기록과 온라인으로 홍보하기)
이 제일 기대됩니다.
3. 교육 수료 후 최종적으로 어떤 목표와 정체성을 실현하고 싶은지?
A) ‘계란으로 바위 치는 활동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거나 과소평가 되더라도 계속 노력해서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활동가가 되고 싶습니다. 끝으로 교육을 통해 배운 것들을 활용해 우리 의
제가 사회적 자원과 자본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B) ‘정체되어 있지 않고 비전을 꿈꾸는 활동가’
지역 강사 단체라 아이/학부모/노인이 교육과 돌봄에 소외되지 않고 공존하는 행
복한 세상을 꿈꾸고 싶습니다. C) ‘미디어 활동가가 간다!’
공익활동가들이 힘들거나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더 많이 울
려 퍼지게끔 어디든 가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최종적으로 공익 활동에 대해서
잘 알고 이를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모임들을 계속 만들고 싶습니다.
4. 이번 기수 말고도 공익활동가를 꿈꾸는 모든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이왕 시작한 활동이라면 기본은 알고 있어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
서 한번 교육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B) 스스로 활동을 잘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나 정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
라서 이러한 강의를 통해 갖고 있는 생각의 틀을 깨고 한 단계 도약하셨으면 좋
겠습니다. C) 오늘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이야기 하기 위해 모인 것처럼 동료들의 손
을 잘 붙잡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필요 시 지원 센터의 도움을 받길 추천드
립니다.
5. 공익 문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필요한 센터 혹은 지자체의 지원은?
A) 공익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한 예산 문제, 관련 법이나 조례를 관심 있게 들여
다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B) 자원 봉사만 계속된다면 지칠 수 있기에 지역 활동에 필요한 예산 편성이 있
었으면 좋겠고 자유롭게 다른 일도 병행할 수 있게끔 지자체에서 정책을 마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C) 교육과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실제 오랫동안 활동하신 분들을 만나 사례를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서로 학습하고 교류하는 네트워크를 많
이 구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담당자 인터뷰
올해 공익활동가 학교 새싹 과정을 담당하신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변화지원팀
김국 팀장님과의 인터뷰도 진행하였는데요! 교육 과정과 관련해 궁금했던 사항들
을 여쭤보았습니다.
1. 공교희 과정을 맡으신 소감?
▶ 공익활동가학교는 올해 처음으로 업무를 맡게 되면서 걱정이 많았는데 오랜만
에 교육 과정 설계와 운영을 담당하면서 설렘도 있었습니다.
2. 공교희 과정을 준비하면서 제일 신경 썼던 부분(작년 과정과 차이점 포함)?
▶ 작년까지는 온라인 과정으로 진행되었고 만족도 조사 결과를 살펴보니 오프라
인 강의를 원하시는 분들이 여럿 계셨습니다. 따라서 오프라인으로 북부와 남부를
나눠 운영하는 것과 새싹 과정에 맞춰 공익활동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미래 비전
을 설계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3. 해당 과정을 마치고 수강생들이 무엇을 얻고 어떠한 공익활동가가 되면 좋을
지?
▶ 다양한 고민을 가지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어떠한 공익활동가가 되면
좋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새싹 과정을 통해 신입 활동가분들에게 필요한
사무 역량을 배워가시고 공익활동에 대한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실 수 있기를 바
라고 있습니다.
4. 공교희 과정을 비롯한 센터 사업들의 2025년 이상향/목표는 무엇인지?
▶ 센터 목표는 세 가지입니다. 1. 공익활동의 사회적 가치 실현 2. 도민의 참여
와 지지 확장 3. 다 영역 간의 연대와 협력 이 중에 저는 목표 1번을 달성하기
위해 활동가 역량 강화를 위한 공익활동가학교와 역량강화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5.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를 아직 모르시는 분들이 참고할 만한 채널은?
▶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뉴스레터, 웹진, 홈페이지, 온라인자료관, 유튜브, 보도자
료를 통하여 센터 소개와 함께 사업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6.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는 경기도와 시민사회가 공익 활동을 증진시키기 위해
만든 중간지원조직이기에 두 주체가 공익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과
지원들을 제공해야 하는지? 현장에서 지자체와 시민사회가 더욱 연결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 공익활동은 개인적 활동을 넘어 조직적 참여, 공동의 의제를 만들어 연대하는
것입니다. 연대하여 제안하고 토론하며, 활동하는 과정이 도민에게 전달되고 그것
이 씨앗이 되어 도민이 조직된 단체에 회원 활동 또는 새로운 조직 활동을 구성
하며 활동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도에서는 공익활동단체의 활동은 지원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의 비전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장에서 지자체와 시민사회가 더욱 연결되기 위해서는 거버넌스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해당사자 그룹의 참여가 보장되어 행정은 활동을 지원하며
논의되는 의제를 받아 법제화하고 예산을 만들어 집행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
7
※ 파일명 : (제출월일)제목_이름(활동명) / 사진파일 별도첨부
※ 경기천년바탕 Regular, 글자크기 13p(본문), 줄 간격 160%, 상하여백 15, 좌우여백 25, 머리말·꼬리말 15, 300단어 기준 양식에 벗어난
자료를 받았을 시 기준에 따라 수정하여 원고료 지급범위를 정함. ※ 1매에 27행을 기준으로 30%(8행)미만 작성된 매수는 지급매수로 산정하지 않으며 이미지는 홈페이지 업로드 크기와 별도로 센터
양식 기준 최대 10행으로 취급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25 공익활동가학교 새싹 과정에서는 파릇파릇한 시작을 함께했다는 것뿐만 아
니라 활동가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들으며 공익 활동의 꿈과 현실에 대해서 고
심해 보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습니다. “너 때문에 세상이 좋아졌어” “우리
가 세상을 바꿨어!” “나는 자부심을 가지는 일을 해”라는 달콤함도 있지만 때로는 “돈도 안되는 공익활동을 왜 하니?” “오늘도 동료가 떠나는 구나..” “과연 바라는
세상이 올까?”라는 씁쓸함에 시달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
디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는데요. 이 때 유명화 센터장님의 격려사를 떠올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비를 맞는 콘크리
트 속 작게 피어난 새싹들이 아닐까요?” 녹록지 않은 현실의 시련 앞에서도 꿋꿋
이 신념을 이뤄나가는 모든 공익활동가들이 새싹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끝내 아
름다운 꽃과 열매를 피우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씨앗으로 생각하길
바라며 웹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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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55기 아카이브 에디터 꿀벌입니다. 동십자각에서 열린 117회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40회 한국여성대회’ 스케치로 첫 인사합니다. 3월 8일(토)
11:30-17:00에 43개 시민난장부스에 사람들이 북적댔습니다. 서울고용노
동청 앞에선 12시 반부터 한국여성노동자대회가 열렸고요. 14:20-16:00
기념식은 안국역 야5당 집회팀이 합류해 깃발 퍼포먼스를 한 후 17:00부터
는 윤석열 탄핵 범시민대행진으로 이어졌습니다. 자 함께 구경해 볼까요?

이번 한국여성대회의 절정인 깃발 퍼포먼스부터 소개하겠습니다. 기념식이
이소선 합창단 공연으로 마무리될 즈음 광장의 모든 깃발이 입장하는 순서
였어요. 하늘을 가득 채우며 펄럭이는 깃발들이 끝도 없이 등장하는 거예
요. 깃발들 속에 보라색 작은 깃발들이 보이나요? 한 깃대에 크고 작은 깃
발이 두 개씩인데요. 비상계엄과 내란으로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페미니
스트가 구한다며 나부낍니다. 세계 여성대회 구호 “더 빠르게 행동하자!”에
호응하는 제40회 한국여성대회 슬로건 “페미니스트가 민주주의를 구한다”
깃발입니다. 장엄한 깃발의 바다였습니다. 깃발 퍼포먼스는 함께하는 몸짓 “댄싱퀸”으로 이어진 후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윤석열 파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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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혐오를 넘어 평등으로” 범시민대행진으로 이어졌습니다. 3.8세계여성의날 기념 시민참여부스에서 난장을!

43개 시민참여 부스는 동십자각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길게 두 줄로 자리했
습니다. 행사 안내 부스에서 “페미니스트가 민주주의를 구한다” 깃발을 받
아 머리에 두건으로도 쓰고 깃발에도 묶었습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노회찬
재단은 장미꽃 한 송이를 나누며 여성의 날을 축하했고요. 씩씩하게 긴 싸
움을 버텨내는 동덕여대 학생들에게, 페미니스트 간호사들에게 응원을 보냈
습니다. “교수님 저 페미예요”라 말하는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멋집니다. 모
두의 결혼을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성과 포용성을 위해 싸우
고 페미니스트들과 연대합니다. “Abortion is human right” 맞습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부스 앞이 가장 유쾌한 난장이었어요. 뿌셔뿌셔
과자 아시나요? 힘차게 뿌셔버리라고 한 봉지씩 주더군요. 활동가의 “사이
버성폭력 뿌셔!”라는 구호에 맞춰 저는 과자를 든 오른손으로 높이 들고 오
른쪽 무릎을 꺾어 올리며 힘차게 내리쳤죠. 제 손과 무릎 사이에 낀 뿌셔뿌
셔 과자 봉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루로 부서졌답니다. 함께 한 딸은 얼
마나 세게 뿌셔버렸는지 봉지가 터지고 과자 입자가 쏟아졌지 뭡니까. 가장
뿌셔버리고 싶은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그렇게 뿌셔버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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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3.8 여성노동자대회: 차별없는 일터, 평등한 미래!
해마다 그랬듯 한국여성대회 기념식에 앞서 12시 반 서울고용노동청 앞에
선 3.8여성노동자대회가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1천여명 여성노동자들이 모
여 차별없는 일터와 평등한 미래를 위해 발언하고 노래하는 자리죠. 여성의
날은 1908년 뉴욕 루트커스 광장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시작되었잖아요. 작
업장에서 화재로 숨진 여성노동자들을 추모하고 저임금·장시간 노동 등 노
동환경 개선과 참정권을 요구하고 시위하던 117년 전과 오늘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전국 여성노동연대회의 소속 여성노동자들을 대표해 정연실 한국노총 상임
부위원장, 최순임 전국여성노동조합 위원장, 권수정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대회사를 했습니다. 차별없는 일터, 평등한 미래 실현을 위한 5가지 의제로
현장 발언이 있었습니다. 1 성평등 노동을 실현하는 정부, 2 돌봄중심사
회로의 전환, 3 성별 임금 격차 없는 일터, 4 모두에게 평등한 일터, 5
성폭력 없는 안전한 일터. 여성노동자들은 동덕여대의 채용성차별, 학교 비
정규직의 최저임금과 성별임금격차, 돌봄문제,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프리랜
서 노동자 권익, 승진과 보상 차별(유리천장)도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차별없는 일터, 평등한 미래!” 5대 요구안을 발표했습니다. 하
나, 정부는 성평등 노동 정책 수립하고 집행력 강화하라! 하나, 돌봄 공공
성 강화하여 돌봄중심 사회로 전환하라! 하나, 성별임금격차 해소하라! 하
나, 차별금지법 제정하고 모두에게 평등한 일터 만들어라! 하나, 성폭력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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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안전한 일터 만들어라! 그리곤 모두 동십자각까지 행진해서 기념식에
참여했습니다.

올해의 여성운동상, 성평등 디딤돌, 성평등 걸림돌
한국여성대회의 꽃은 우리 사회의 성평등과 여성운동 발전에 공헌한 분들
을 위한 시상식이었습니다. 올해의 여성운동상은 56년 만의 미투, ‘정당방
-여성노동자대회 현장 발언 일부 소개-
* 최저임금, 성별임금격차 현장 발언: 진경희(전국여성노조 서울지부 학교비정규직)
교사와 공무원들은 매년 기본급이 올라가고 이에 따라 각종 수당들이 따라 올라가는데 학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10년, 20년, 30년을 근무해도 기본급이 최저임금 미만을 받고 있습
니다.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보다 그 중요도와 가치
면에서 뒤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생명과 연결되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엄마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렇게 임금을 차별하고
저평가하는 것은 정말 치욕스럽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28년 동안 OECD에서 성별 임금 격차
1위라는 오명의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 돌봄 현장 발언: 최영미 (한국노총 가사돌봄유니온 위원장)
2014년 5,210원, 2024년 9,860원, 월급으로 210만원. 바로 10년을 열심히 일해 온 베테랑 돌
봄노동자들의 월 급여입니다. 성과급? 교통비? 식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집에서 저 집으
로 이동하다 식사 시간이 닥치면 밥을 먹을 장소도 마땅치 않습니다. 월급제가 아니다 보니
고객 주문이 취소되면 그 시간만큼 급여가 깎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를 막론하고 ‘좋은 서비
스’, ‘질 높은 서비스’를 요구합니다. 밑바닥 임금을 받고 ‘아줌마’ 소리를 들어가며 어떻게 질
높은 서비스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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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재심 개시결정으로 60년 만의 정의를 이끈 최말자님과 국내 최초로 여
성혐오를 범행동기로 인정한 판례를 이끈 온지구 님이 받았죠. 성평등 디딤
돌 수상자는 외국 먹튀 자본 착취와 성별화된 노동에 맞선 민주노총 박정
혜 소현숙 님들,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판결 이끌어낸
김용민 소성욱 부부와 변호인단 그리고 공교육 속에 구조화된 젠더폭력에
맞선 지혜복 교사였습니다.

올해의 여성인권상 수상자 최말자님은 1964년 자신을 강간하려는 가해자에
저항하다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상해를 입혔습니다.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는 검찰과 법원에 의해 ‘피의자’가 되어 6개월여 구속되어 수사와 재판을
받고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습니다. 가해자는 고작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죠. 최말자 님은 60세가 넘어 방송대학에서 공부하며
여성의 삶과 역사, 인권에 대한 수업을 듣게 됩니다. 미투운동이 한창이던
2018년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를 찾게 되고 2020년 5월 6일 사건
발생 56년 만에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을 청구합니
다. “내 사건을 바로잡아야 후배 여성들에게도 억울한 일이 없겠다”라며 투
쟁한 결과 2024년 12월 18일, 대법원이 재심 청구를 기각한 고등법원의
판결을 파기 환송했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은” 용기로 반성폭력 운동
의 큰 이정표를 세운 최말자 님. 노란 한복 차림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
다. 온지구 님은 일명 진주 편의점 여성혐오 폭행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너는 페미니스트니까 맞아도 된다”라며 폭행을 하고 기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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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고 난동을 부렸죠. 사건 직후 온지구 님은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머리가 짧았을 뿐인데 불운한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했다는데요. 그런데 숏
컷 인증 릴레이로 연대하는 사람들이 이어졌습니다. 서울에서 다른 지역에
서 연대로 함께 하는 여성들을 통해 그는 이게 여성의 일임을 깨닫고 싸우
기로 하는데요. 마침내 2024년 10월 15일 국내 최초로 “가해자의 범행 동
기는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라는 판시와 함께 ‘여성혐오’를 비난할
만한 동기로 인정하는 판결을 이끌어낸 후 꾸준히 연대하고 있습니다.
제40회 한국여성대회 <3.8여성선언>
한국여성대회에서 다양한 여성들이 함께 3.8여성선언을 돌아가며 낭독했습
니다. “우리들은 시대를 이어 페미니스트이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구할 것이
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해 같은 문장으로 끝나는 글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도 현재도 여성들은 가장 먼저 투쟁해 왔고 여성들의 연대는 시대와 세대
를 이어 연결되어왔음을 천명했습니다. “여성과 소수자가 일상에서 차별과
폭력을 당하지 않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하며 여성
선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성별, 성적 지향, 연령, 지역, 국적, 인종, 장애 여부
등의 조건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시민의 기본권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요
구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모든 차별과 폭력, 부정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하
며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기반을 구축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성평
-기억하자 올해의 성평등 걸림돌들-
* 여성혐오를 산업화하고 성차별 통념 강화하는 유뷰브 사이버렉카. * 화성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를 일으킨 대표이사 박순관. * 국가에 의한 여성착취 역사 부정하고 삭제하려는 박형덕 동두천 시장. * 두 번의 성폭력범죄에도 여전히 의정활동 중인 송활섭 시의원과 그의 제명안을 부결한 대
전광역시의회 14명의 의원들. * 성평등 도서를 폐기하게 하고, 학생인권조례 폐지 추진한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 혐오와 차별, 분열 조장 정치에 앞장선 경상남도 창원특례시의회. * 반여성 반인권적 망언과 태도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사명을 무너뜨린 김용원 상임위원, 이충
상 전 상임위원. * 딥페이크 성범죄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 쳬계 제시 못하는 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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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사회에서 배제되고 차별받아 온 모든 소수자들과 손을
잡고 더욱 넓게 연결될 것이며, 더욱 단단하게 연대할 것이다. 우리는 시대
를 이어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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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2기획] Asia連帶(연대)회의 — 공감의 연대, 세계를 뒤흔들다 — 거대한 국경의 장막과 각자도생의 한계를 넘어, 경기도 골목마다 다정한 아시아의 손잡기와 평화의 푸른 숲을 일구어내는 감동의 여정
이번 전시의 주제인 아시아연대회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피해생존자들과 지원단체, 가해국인 일본의 시민과 활동가들이 모여 문제해결 방안을 모색한 초국적 연대의 장입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 시작한 아시아연대회의는 국내외 인권운동과 여성운동, 국제인권규범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전시 성폭력과 식민지 범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전시 제목인 <Asia連帯회의 - 공감의 연대, 세계를 뒤흔들다>는 영어, 일본어, 한국어 3개의 언어로 제목을 구성하여 아시아연대회의의 여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피해국 한국과 가해국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로 확장해 나간 사실을 표현하였습니다.
해당 전시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2024년 3월 8일(금)에 개막하여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주간인 8월 17일(토)까지 진행될 예정입니다.
조회수 3690
2024-04-05
뜨거운 역사적 기억의 등 뒤에서, 평등한 내일을 향해 첫발을 내딛다
매년 9월 첫 주가 되면 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성평등의 의미를 되새기고 차별 없는 사회를 다짐하는 다채로운 기념행사와 축제가 펼쳐진다.
"우리는 과연 ‘원래부터 그랬다’며 가부장적 타성과 불평등의 장막을 묵인해 온 그늘을 걷어내고,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이 발표된 역사적 숨결을 기억하며 평범한 시민들이 손을 잡고 성평등의 품을 넓혀갈 수 있는 ‘양성평등주간의 진정한 지평’을 어떻게 열어갈 수 있을까?" 대한민국 여성운동의 소중한 뿌리와 9월 첫 주에 담긴 깊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경기도 곳곳에서 성평등의 가치를 실천하는 공익활동가들과 도민들의 감동적인 현장을 깊이 조명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을 기억하는 ‘역사적 뿌리의 되새김’
1898년 9월 1일, 여성들이 스스로의 권리와 교육권, 참정권을 외치며 발표했던 ‘여권통문(女權通文)’의 정신을 기리며, 매년 9월 1일부터 일주일을 양성평등주간으로 지정한 역사적 의미 되새기기.
"성평등을 향한 오늘의 걸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각자와 여성들의 눈물 ㅓ린 외침과 정직한 땀방울 위에 세워진 거대한 역사"라는 철학 실천.
일상의 차별과 편견을 허물고 함께 살아가는 ‘풀뿌리 성평등 문화 확산’
가정과 일터, 지역 사회 곳곳에 숨겨진 성별 고정관념과 불평등한 구조를 따뜻하게 성찰하고, 누구나 성별에 관계없이 온전한 존엄과 권리를 누리는 다정한 상호 돌봄 체계 구축.
"혼자서 불평등에 맞서면 외롭지만, 이웃이 손을 잡고 함께 외치면 세상을 바꾸는 따스한 평화의 파도가 된다"는 통찰.
경기도 31개 시·군 골목마저 평등과 연대의 그물망으로 잇는 ‘성평등 자치 생태계’
시·군의 경계를 뛰어넘어 경기도 내 여성단체와 공익활동가들이 유기적으로 손을 잡고, 성평등 조례 제정과 돌봄 노동의 가치 인정 등 시대적 과제들을 함께 돌파하는 거대한 연대의 무대 완성.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생의 무대" 완성.
도내 각지에서 모인 성평등 활동가들과 도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양성평등주간의 역사적 의미를 배우고, 우리 동네와 일터에서 체감하는 성평등의 현주소를 나누었던 공론장 현장은 깊은 공감과 뜨거운 연대의 온기로 가득 채웠다.
참가자들의 진솔한 역사 고백 및 성평등 나눔 세션: "그동안 9월 첫 주가 왜 양성평등주간인지 깊이 알지 못했는데, 오늘 여권통문의 역사적 배경을 배우고 선조들의 치열한 발자취를 마주하니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우리 지역에서도 이 평등의 불꽃을 이어받아 차별 없는 다정한 마을을 만들고 싶습니다"라며 뭉클한 감회를 나누던 도민들의 순간들.
경기도형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한 유쾌한 브레인스토밍: "도내 청년들과 주민들이 함께 모여 성평등 역사와 영화를 나누는 '우리동네 평등 시네마 토크'를 열자", "성평등한 일터와 지역 사회를 만들기 위한 '찾아가는 성평등 감수성 학교'를 31개 시·군 골목마저 확대하자"며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내던 반짝이는 눈빛들.
응원과 다짐의 피날레: "비록 우리가 마주한 구조적 차별과 편견의 벽이 때로는 높고 거셀지라도, 경기도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이 지혜롭고 푸른 평등의 손길들이 모여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바란다"며 환한 미소와 박수로 마무리된 연대.
세상을 바꾸고 진정한 성평등과 자치의 시대를 여는 위대한 힘은 차가운 법 조문이나 거창한 기념식의 축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일터와 가정에서 서로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며 성실하게 땀 흘리는 평범한 시민들과 공익활동가들의 정직한 땀방울과 다정한 연대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편견과 차별의 장막을 걷어내고 경기도 구석구석에 평화와 성평등의 숲을 일구어가는 공익활동가들과 도민들, 그리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경기도 곳곳에서 피어나는 이 지혜롭고 푸른 온기들이,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경기도의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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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6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의 아카이브 에디터로서,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의 구성원들은 어떤 활동을 하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이런 고민을 매니저님과 나누던 중,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다 오신 구성원분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를 여러분께 알려드리기 위해서 인터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소개해드릴 구성원은 이정희 성장지원팀장입니다. 인터뷰는 수원에 위치한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공익나눔 소회의실에서 진행하였습니다.
1. 전에 다니던 직장이 어떤 곳인지 소개하자면?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경기여성연대라는 여성단체에서 활동을 했었다. 1994년도 당시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을 구명하기 위해서 경기지역 여성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가정폭력 피해여성은 폭행을 지속적으로 당하다가 남편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고 살인죄로 수사가 이루어지자 이에 대응하며 여성들이 결집하였고 구명운동을 했다. 사건이 정리 된 후 모인 여성들이 계속 이어서 활동을 하자는 뜻을 모아 경기여성연대를 발족하게 되었고, 현재 20년 넘게 활동 중이다.
2. 경기여성연대에서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27살쯤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사실 원래 여성단체나 여성인권에 대해 잘 몰랐다가 자원봉사를 오래 하게 되면서 복지관에서 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복지관이 여성단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여성학을 접했다. 고향이 경상도였기 때문에 여성학을 접하고 나서 내 삶을 돌아보니 모든 차별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의 충격은 마치 프라이팬으로 뒷통수를 한 대 맞은듯한 느낌이었고 이후부터 분노가 일기 시작해서 나같은 여성들이 몰라서 당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던 가부장성, 사실 가부장성이 뭔지도 몰랐지만 예를 들면 집안일을 여자들만 하고 오빠와 남동생은 손도 대지 않는 문화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원래는 경남 마산에서 일을 하다가 수원으로 이사오게 되면서 경기여성연대에 들어왔는데, 연대의 활동 방향과 잘 맞아서 10년 넘게 일을 해왔다.
3. 경기여성연대에서 일했을 당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이 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굉장히 많다. 그 중에서 크게 세 가지 정도가 기억에 남는데, 첫 번째는 경기도기지촌여성지원조례를 통과시킨일이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으나 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정부가 주한미군을 위해 성매매 행위를 조장하여 기지촌여성들이 인권침해를 당한것에 대해 2012년부터 관련단체들과 피해여성들의 인권회복과 피해보상에 대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여러 활동 중에 피해여성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과 지원조례 제정에 대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 했으며, 수 많은 기자회견과 토론회에서 피해 사실을 공론화 하며 기나긴 싸움 끝에 2020년 [경기도 기지촌 여성지원등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또한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는 [국가가 책임이 있다]는 고등법원 판결을 통해 피해여성들의 인권이 회복 되는 큰 결과를 거두기도 했다.
사실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겪었던 큰 아픔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술해야 하는 과정에서는 정말 힘들어 하셨다. 그래도 모든 개인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니 힘내시라고 지지하면서 결국 승소하고 언론에도 많이 보도되어 피해여성들의 인권회복 및 사회 인식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며, 현재 평택에 [기지촌여성평화박물관]까지 건립 되었다.
두 번째로는 성평등의식 확산 운동을 많이 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성평등한 사회라고 하긴 어렵다. 사회생활, 정치, 경제, 문화 등 많은 분야에 차별이 있다. 그리고 경기도는 여성단체의 지속적인 요구로 [경기도성평등기본조례]로 개정되었다. 사실 성에는 양성만 있는 것이 아닌데 아직도 양성평등에 의한 정책들로 소수성들은 차별과 소외 받는 일들이 많다. 경기도 내 지역을 다니면서 성별에 따른 차별, 편견, 비하 및 폭력없이 인권을 동등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기자회견, 길거리캠페인, 1인피켓, 연극공연 등 참 많은 활동을 해왔다.
세 번째로는 [경기도 여성청소년 보건위생물품 지원에 과한 조례]를 만든 일이었다. 원래는 취약계층 여성들만 생리대를 지원받았다. 그런데 신발 밑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한다는 기사가 나오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여성 인권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이런 세부적인 부분을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생리대 보편 지급을 조례로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무상급식을 하듯이 생리대를 취약계층만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지급이 되어야 한다는 토론회 등 조례 제정을 위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 2020년 만11세이상~만18세 이하의 여성청소년에게 보건위생물품을 지원할 수 있는 조례가 통과되었다. 또한 획일적으로 패드형 생리대만 지급되는 것이 아닌, 월경컵 등 여러 가지 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다. 여성의 건강과 환경까지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이며, 무엇보다 월경에 대한 사회 인식개선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어릴 때만해도 생리대는 숨겨야 하는 물품으로 검은 봉지에 싸서 다녔는데 이제는 여성청소년들에게 ‘안심하고 월경할 권리’가 당연시 되어야 한다.
4. 경기여성연대에서 일하면서 뿌듯함을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여러 활동을 하면서 순간 순간 뿌듯함을 느낄때는 참 많다. 그 중에서도 앞서 말했던 미군 위안부 관련해서 승소하고, 조례를 만든 순간에 가장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경기도성평등기본조례]로 개정한 활동들이 있다. 사실 정말 변화하기 어려운 일들을 조금씩 이루어내고 해낸 것이기에 매우 뿌듯했다.
5. 앞서 말한 일들을 추진할 때 가장 장애물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을 하는 데에는 그만한 목적이 있다. 그런데 여성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은 사회 인식이다. 예를 들면 여성은 감정적이며, 논리적이지 않다. 또는 여성이 주장하는 것을 싫어하는 식이다. 그런 인식을 겪어가면서 여성운동을 해온다.
그 다음으로는 실질적인 장애물은 인건비의 부족이다. 10년 가량 월급을 100만 원 정도 받고 일을 했다. 금액 보다는 하는 일의 가치가 더 높기 때문에 자부심으로 살았다. 여성들과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을 봐왔으니 급여 같은 건 장애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프로젝트 사업을 하기 위해서 사업비, 인건비가 지출되는데 보통 단체에서의 활동가는 1명 내지 2명이다. 이들이 인건비를 받으면서 정부를 상대로 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보통 이러한 비용은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을 하게 된다. 경기지역에 있는 여성단체는 4개가 있는데, 경기여성연대, 경기여성단체연합, 경기자주여성연대, 경기여성단체협의회이다. 이렇게 4개 단체가 네트워크를 이루어서 큰 사업을 대응하기도 하고, 여성 관련된 모든 사업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6. 그렇다면 시민의식을 개선할 방안을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공연이나 연극 한편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개인적으로 문화 예술 분야를 좋아하기도 해서 연극이나 노래 공연을 지역을 돌아다니며 해왔다. ‘엄마는 지금 일하고 있다’ 라는 연극을 만들어서 공연했는데, 엄마가 밖에 나가서 일하고 돌아오면 남편이 피곤하다며 양말을 던지면서 눕고, 육아도 엄마가 다 하는 내용이다. 전하고자 하는 것을 글이나 말로 하는 것보다 연극을 통해서 보여주니까 시각화되어서 더욱 전달이 잘된다. 연극을 보면서 몰입하여 우시는 분도 있었으며 특히 경기 외곽은 가부장적인 정서가 더욱 심하기에 공감을 하는 분들이 많다. 우리는 이 연극을 남성들에게 더 많이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시청, 공무원, 군인을 대상으로 보여주려고 전화도 많이 돌렸다. 물론 보다가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여성운동 또는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활동은 하지 못하더라도 후원을 하는 등 꾸준한 관심을 가지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여성운동을 할 때 돈 때문에 활성화가 되지 못하는 부분이 아쉽다. 우리는 모든 여성들이 평등해질 때까지 우리는 계속 간다는 구호를 외치곤 한다. 같은 여성끼리 지원해주고 연대하는 힘이 필요하다.
7.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일하면서 새로 생긴 목표가 있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목표가 있어서 그 목표를 이루려고 이곳에 왔다. 경기 시민단체연대에서 운영위원장을 두 번 했었는데 시민단체가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들은 금전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일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세대는 교체될 것이고 윗세대는 학생운동과 민주화정신의 영향으로 열정페이로 일을 하지만 이후 청년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요구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시민단체가 안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시민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고민을 해보니 하나의 센터를 만들어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비를 제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제일 어려운데 그 과정을 함께해서 도와주고 싶어서 온 것이고 그 목표는 그대로 가지고 있다. 프로젝트에 매몰되면 정말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런 어려움을 줄여주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그들이 하고싶은 운동을 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8. 앞으로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나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일단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센터가 정말 중간지원조직으로써 해야 하는 일을 독립적이고 자율성 있게 하고 싶은데 아직 초반이라 그러지는 못한다. 기반이 다져져야 하는 시간과 기반이 필요한데 공약을 받고 시민단체들이 만든 센터라서 여러 의견들을 수렴하여야 한다.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지역의 활동가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게 방향을 같이 고민하고, 같이 나누고 필요한 대로 유동적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것이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최종적인 목적지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면서 뿌듯함을 느끼며 충분히 활동할만하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다. 시민사회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

9.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이정희 성장지원팀장 :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나서 후회를 해본 적이 없다. 이 길을 잘 왔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하면서 나 자신의 성장도 많이 했고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깨달음이 있었기에 이 활동에 대해서 후회는 없다. 내가 자식이 있었다면 엄마는 이런 활동을 하고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부심이 있다. 다른 시민활동가들도 이런 마음가짐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시민사회 활성화가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한 개개인이 모여서 일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다 아울러서 우리 사회가 크게 변했으면 좋겠다. 지금 내 역할은 조그맣지만 사회가 변화하는데 참여했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본 에디터는 이정희 팀장님의 공익활동 경험을 인터뷰를 통해 전해 들으며 배울 수 있던 점이 아주 많았습니다. 경기여성연대에서도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도 위치와 상황에 관계없이 팀장님이 생각한 사회적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차근차근 만들어가시는 모습이 상당히 흥미롭고 인상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직접 발로 뛰었던 생생한 이야기와 실무자가 생각하는 앞으로 센터의 방향성을 듣고 센터의 에디터로 전달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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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