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단원고 2학년 2반 박혜선 양 엄마 임선미 님
날씨가 더워지니 올해 첫 수박을 샀다. 큰 쟁반에 놓고 쩍! 소리내며 가른다. 붉은 과육에 까만 씨에, 단물이 쟁반에 흐른다. 이래서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생의 마지막에 그린 수박 정물화에 ‘인생 만세(Viva la Vida)’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박을 한입 베어 먹으며, 나도 모르게 “비바 라 비다”를 외치니 말이다. 스페인어는 전혀 모르면서도 수박이 주는 달콤한 청량감에 삶의 기쁨을 노래한다.
수박만이랴. 꽃과 나무와 하늘과 햇빛이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는 계절이다. 안산 상록구청 1층 갤러리 ‘혜안’에 가면 생명 가득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세월호 유가족 엄마들의 유화전(6월 12일~7월 3일)이다. 삶의 고통을 생명의 빛으로 그린 “빛의 정원, 또바기 유화전’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치유되고, 삶은 아름다웠다.”라 고백하는 사람. 세월호의 별 단원고 2학년 2반 박혜선 양 엄마 임선미 님을 만나 보았다.

Q 또바기 유화전 축하합니다. 자기소개와 근황을 들려주세요.
단원고 2학년 2반 박혜선 엄마 임선미입니다. 이번 전시회에 유화 여섯 작품을 냈어요. 한 10년 또바기 모임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어요. ‘또바기’는 아름다운 순우리말인데요.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겠다”는 모임이죠. 저는 원래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세월호 참사 전에는 어린이집 교사도 하고 아이돌보미도 했어요. 참사 이후에 도저히 아이들 보는 게 어려워서 못 하다가 올해 3월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어린이집 등원 도우미로 오전 두 시간 돌보는데, 세 살 네 살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아이들이 안기고 웃어주면 저도 모르게 웃게 돼요. 오늘도 아이들과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왔어요. 아이들이 주는 에너지가 참 커요. 집에 돌아올 때 기분이 좋아지고 삶에 의욕이 생겨요.

Q 결혼 후에 계속 일하셨나요?
결혼 전에는 광명시청에서 비정규직 공무원으로 근무했어요.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애들 키웠죠. 그때는 당연하게 그랬어요. 아이들도 직접 키우고 싶었고요. 두 딸을 연년생으로 낳아 키우며 전업주부로 오래 지냈죠. 둘째인 혜선이가 IMF 때 태어났는데, 남편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아끼고 살아도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죠. 그래도 아이들 키우는 재미로 버텼어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 봐도 행복했거든요. 애들이 중학교 가면서 어린이집 보조교사 일을 시작했고, 아이돌봄 서비스도 했어요. 저는 원래 아이들하고 있는 걸 좋아했어요. 아이들 눈높이에서 이야기하고 노는 게 즐거웠어요.


Q 지금 하고 있는 ‘빛의 정원-또바기 유화전’에는 언제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세월호 참사 이후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한 ‘생명센터’를 운영했어요. 그 안에 여러 치유 프로그램이 있었죠. 도예도 하고 천아트도 하고 미술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끝난 프로그램들이 많았지만, 그림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그림 선생님 강사료, 작업실에 그림 도구며 밥값까지 다 지원되니 계속할 수 있었어요. 와동성당 홍 신부님이 정말 큰 힘이 돼주셨어요. 신부님은 늘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셨어요. 기도도 함께하고, 엄마들이 조금이라도 숨 쉴 수 있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해 주셨죠. 그 덕분에 그림을 배우고 이렇게 전시회도 할 수 있게 됐어요.

Q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나요?
그림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도 미술 시간이 제일 싫었어요. 소질도 없고 자신도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1년 늦게 들어왔어요. 다른 엄마들이 너무 잘 그리는 거예요. 저는 창피해서 제 그림을 다른 사람이 못 보게 돌려놓고 다녔어요. ‘나는 왜 이것밖에 못 그리지?’ 그랬는데 하다 보니까 조금씩 달라졌어요. 색을 쓰는 법도 배우고 빛을 표현하는 방법도 배우고요. 생각하며 그리다 보니 ‘똥손’이 ‘은손’ 정도는 된 거 같아요. 지금도 어렵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졌죠. 그림 그리는 시간을 좋아하고요.
Q 그림 그린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던가요?
가장 큰 건 마음이 치유되는 거죠.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그 시간만큼은 그림에 집중하게 돼요. 저는 원래 음악 들으면서 뭘 못 하는 사람이에요.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림만 봐야 해요. 색을 맞추고 명암을 넣고 붓질하다 보면 집중하게 되고 마음이 정리되고 시간이 훌쩍 지나가요. 힘들어서 한동안 쉰 적도 있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시 하고 싶더라고요. 왔더니 엄마들이 예전과 똑같이 맞아줬어요.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요. 그게 참 고마웠어요. 우리 세월호 엄마들은 서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거든요. 왜 힘든지, 왜 말이 없는지, 왜 갑자기 울게 되는지, 왜 쉬고 싶은지, 다 아니까요.

Q 지금 함께 그림을 그리는 엄마들 이야기도 좀 해 주실까요?
지금은 여덟 명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어요. 8반 엄마들이 많아요. 강지은(지상준 엄마), 고이경(임건우 엄마) 송미점(박선균 엄마), 이미숙(임현진 엄마) 이지연(김제훈 엄마), 그리고 1반 안명미(문지성 엄마), 10반 김경애(구보현 엄마), 그리고 저. 예전에 더 많을 때도 있었지만 힘들어서 떠난 분들도 있고 건강 문제로 못 나오는 분들도 있어요. 우리는 매주 화요일에 본오성당에 모여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그림을 그려요. 그림 한 점 완성하기까지 몇 달 걸리기도 해요. 부지런한 어떤 엄마는 집에서도 계속 작업하지만 저는 화요일만 해요. 전시회를 열 때면 서로 작품을 봐주고 응원해요. 서로 비교하기보단 자기 작품을 끝까지 해낸다는 게 더 중요해요. 서로 응원하며 하죠. 건우 엄마가 디테일 표현이 탁월해요.

Q 혜선이 이야기해 주세요. 어떤 아이였나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제가 혜선이를 너무 이뻐해서 ‘우래기(우리애기)라 불렀어요. 연년생이었지만 혜원이도 동생을 ‘우래기’라고 했죠. 언니와 엄마를 무수리처럼 부리는데도 우리는 혜선이 말이라면 무조건 오케이였어요. 참 신기했어요. 삼겹살 비계도 발라 주고 바지락도 까줘야 하는 상전이었죠. 여섯 살 때부터 안경을 썼어요. 아기가 거꾸로 있어서 수술로 낳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태변을 먹어서 눈이 나빠진 게 아닌가 싶었어요. 선천적이라 라식도 라섹도 할 수 없는 상태라니 늘 마음이 쓰였죠. 집에서는 조용한 애가 학교 행사에선 노래하고 춤추는 걸 너무 잘했어요. 무대만 올라가면 완전히 달라지는 거죠. 안산시 청소년 종합예술제에 나가서 2등을 한 적도 있어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혜선이가 집에 와서 울더라고요. 자기 팀이 더 잘했는데 친구가 1등을 한 게 억울했대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아, 우리 딸이 승부욕이 있구나. 노래를 정말 잘하는구나!’ 깜짝 놀랐어요. 평소에는 잘 몰랐던 모습이었죠.
Q 혜선이의 꿈은 방송작가 국어 선생님이었잖아요?
글 쓰는 걸 참 좋아했어요. 처음에는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다고 했고, 나중에는 동국대 국문학과에 진학해서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나 꿈을 정했어. 수학여행 갔다와서 공부 열심히 할 거야.”라던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돌아요. 2018년 11월 사단법인 한국방송작가협회가 혜선이를 ‘명예 방송작가’로 위촉해 줬어요. 명예회원증으로 혜선이의 꿈을 기억해 주니 감사히 받았어요. 저는 글쓰는 건 혜원이가 잘하고 음악 쪽 재능은 혜선이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일기도 열심히 썼고 글 쓰기 좋아했지만, 피아노도 잘 쳤고 노래도 정말 잘했어요. 절대음감이 있었어요. 혜원이가 먼저 음악 쪽으로 방향을 정하니 혜선이는 공부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어떤 길을 가도 자기 몫은 충분히 해냈을 아이였어요.

Q 엄마로서 가장 미안한 기억은 무엇인가요?
사춘기 때 일이에요. 친구 관계 때문에 왕따 비슷한 경험으로 힘들어했는데 제가 “혹시 너한테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한 적이 있어요. 부모로서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 건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큰딸 혜원이도 이야기했어요.
“엄마는 그때 무조건 혜선이 편을 들어줬어야 해.”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혜선이는 엄마에게 위로받고 싶었을 텐데 저는 오히려 상처를 준 거죠. 지금도 미안해요. 그리고 더위를 타고 땀을 많이 흘리는 혜선이는 에어컨 집에 살아본 적 없다는 게 마음 아파요. 에어컨 켜는 게 미안해요. 이모네 갔다오면 “엄마, 우리는 언제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으로 이사가?”라고 말하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지금 우리는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에 사는데 혜선이는 없네요.

Q 참사 이후 새롭게 알게 된 혜선이의 모습이 있나요?
친구들을 만나면서 많이 알게 됐어요. 친구들이 하나같이 그러더라고요.
“혜선이는 늘 남을 먼저 챙겼어요.”
“배려심이 많았어요.”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어요. 남을 배려하느라 자기 속마음은 얼마나 숨겼을까 싶은 거죠. 그리고 엄마는 몰랐던 첫사랑 이야기도 있었어요. 학원 같이 다니던 친구였는데, 일기장에 그 아이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아, 우리 혜선이도 그런 감정을 느낄 만큼 컸구나’ 싶었어요.

Q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 기억은 무엇인가요?
아직도 생생해요. 수학여행 가기 전에 캐리어를 사달라고 해서 분홍색 캐리어를 사줬어요.
집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러더라고요.
“엄마, 나 이거 끌고 가기 창피해.”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말했어요.
“가방 메고 가는 애들이 더 창피하지. 너 인기 짱일 거야.”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지금도 분홍색 캐리어만 보면 그날 모습이 떠올라요. 계단을 내려가던 뒷모습, 목소리, 표정까지 다 기억나요. 내가 해 준 마지막 음식은 유부초밥이었어요. 평소에 별로 안 좋아하던 아이가 그날은 다섯 개나 먹고 갔어요. 제가 지금도 유부초밥을 잘 못 먹고 있어요.
Q 지난 12년간 가족들은 어떻게 버텨왔나요?
참사 후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활동을 같이 하면서도 남편은 힘들어하며 술로 버티는 시간이 길었어요. 일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큰딸 혜원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원래 음악하던 아이였는데 결국 그 길을 포기해야 했어요. 참사 났을 때 같은 단원고 3학년이었으니 어땠겠어요. 혜원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곤 했어요. 세 식구 중에 제일 힘든 사람이 혜원이었으니까요. 글쓰기 응모에서 당첨돼서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어요. 여행을 통해 자기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 돌아왔어요.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재수해서 대학에 갔어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일 잘하다가 최근 더 높은 연봉으로 스카우트 돼서 이직한 게 너무 기특해요. 가족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온 것 같아요.

Q 세월호 이후 임선미 님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독해졌어요. 예전에도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더 그래요. 남 눈치를 덜 보고 남한테만 좋게 하려 하지 않게 됐어요. 가족들 챙기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믿었건만, 세월호를 겪고 나니까 세상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는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어요. 하느님께 삿대질하며 원망하기도 했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그 과정을 버텨내면서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Q 지금 혜선이를 다시 만난다면 무엇을 보여주고 싶나요?
많은 말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엄마가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 마음을 치유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볼 수도 있게 됐다는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어린이집 아이들과 잘 놀고 있다는 것도요. 혜선이는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 아이예요. 그래서 저는 그림을 그릴 때도, 어린이집 아이들과 놀 때도, 혜선이만 생각하면 미소가 넘쳐요. 제가 새로운 꿈을 꾸고 있어요. 혜선이가 음악을 좋아했듯, 저도 피아노를 배워서 성당에서 봉사하고 싶어요. 혜선이가 이런 엄마를 보면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지 않을까요. “엄마, 잘하고 있어.” 이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아요.
Q ‘빛의 정원, 또바기 유화전’의 그림은 꽃과 자연이 많다. 특히 노란 해바라기가 생명력이 넘치게 피어 있다. 소재를 자연으로 택한 의미가 있을 거 같다.
그렇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도 그렇지만 꽃과 자연이 우리 마음을 많이 위로하고 치유해 줬다. 나는 자연을 좋아한다. 노란색 꽃을 좋아하는 엄마들에게 노란 해바라기는 아이들 같다. 아이들의 웃음, 아이들의 생명력, 아이들과의 추억, 그리고 꿈, 모든 걸 떠올리는 시간이었다. 꽃으로 피는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었다. 내 그림도 그렇다. 혜선이에게로 가는 ‘아득히 먼 곳’은 혜선이를 생각하며 그렸다. 빨간 동백꽃은 혜선이에게 못다 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림 그리기는 사랑스러운 우래기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조회수 442
2026-06-29※「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웃의 손을 놓지 않는 든든하고 다정한 배경”, 내 이름은 춤추는 나무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살다가 안산에 정주한 사람이 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서 찐 안산 사람이 되기로 했다.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잇는 ‘기억과 약속의 길’ 시민 안내자이며 발달장애인 바리스타들의 직무 지도원.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슴에 ‘별을 품고 사는 사람’으로 ‘춤추는 나무’. 4월이라 더 바쁜 고명선 활동가를 소개한다.

Q 자신을 ‘춤추는 나무’라고 소개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20대 때부터 상담소에서 닉네임으로 ‘나무’를 썼다. 내 주변엔 뿌리 깊은 나무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이미 너무 많더라. 나는 그들 사이에서 그저 이웃들과 바람이 가는 대로 춤추며 살고 싶었다. 거창한 존재보다 주변과 어우러지는 사람이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Q 춤추는 나무로 매일 출근하는 일부터 소개해 달라.
안산의 한 카페에서 성인 발달장애인 바리스타 6명 곁에서 ‘직무지도원’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 바리스타들이 샷 추출이나 음료 제조 실력은 정말 뛰어나다. 다만 숫자 계산, 재고 파악, 그리고 동료 간의 의사소통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속도에 맞춰 호흡하며 일상을 나누고 지역사회 안에서 당당한 직업인으로 살아가도록 곁을 지키는 ‘다정한 이웃’이 되는 일이다.


Q 장애인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와 이전의 이력이 궁금하다.
대학 시절,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재가장애인들에게 책을 배달하며 장애인 인권에 눈을 떴다. 이후 ‘장애여성공감’ 상담원으로 일했고, ‘성공회 나눔의집’에서 어린이와 어르신을 돌보고 성인장애인들과 함께 일했다. 장애인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활동의 뿌리가 됐다.




Q 서울 사람이 어떻게 안산의 시민 활동가가 되었나?
결혼하면서 안산에 왔다. 세 아이 엄마로서, 2014년 4월 16일 도서관에서 강의를 듣다가 세월호 소식을 접했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믿고 큰 걱정 안 했다가, 저녁에야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 세월호가 가라앉는 화면을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에 발만 동동 굴렀다. 다음 날, 당시 초등학생이던 큰아이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무작정 단원고로 달려갔다. 수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고 아이들이 돌아오기만을 비는 밤이었다. 운동장에 교복 입은 학생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평생 잊을 수 없다. 여러 번 촛불을 들었지만 아이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던 그 촛불이 제일 간절했다. 그 이후 화랑유원지, 안산문화광장, 광화문광장에서 나는 계속 촛불을 들었다.


Q 시민안내자로서 걷는 ‘기억과 약속의 길’은 무엇인가?
참사 직후부터 정부합동분향소와 단원고 교실을 찾아가는 ‘기억과 약속의 길’이 있었다. 나는 2017년 4.16기억저장소 ‘4.16 민주시민교육’에서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해설을 들으며 걷는 고잔동에서 별이 된 아이들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19년부터다. 수료생들과 함께 “누가 오든 안 오든, 우리끼리라도 한 달 한 번은 꼭 이 길을 걷자”고 다짐했다. 4.16기억교실에 모여서 단원고 추모조형물, 4.16기억전시관, 고잔동 마을의 골목골목을 지나 4.16생명안전공원 부지까지, 2~3시간을 시민들과 걷고 있다.
지난 7년여 동안 이 길을 지키며 느낀 건 ‘기억의 힘’이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떤 날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때론 눈이 내리기도 했지만 모두 노란 우산을 쓰고 끝까지 걸었다. 걷는다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기억공간에서 서로의 기억을 꺼내고, 어떻게 기억하고 약속할까 이야기했다. 태풍 때 한 번 취소된 거 말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이 길을 걷는 행위 자체가 4.16 이전과 이후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다짐이라고 본다.



Q ‘기억과 약속의 길’에서 시민들과 함께하는 특별한 의례가 있다고 들었다.
매번 출발을 4.16기억교실에서 한다. 3월엔 3반, 4월엔 4반 이런 식이다. 교실에 모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출석’ 시간이 있다. 시민 안내자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아이 자리에 앉은 시민이 “네!”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아이들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그들의 삶과 꿈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기억과 약속의 길은 함께 기억하고 약속하는 연대를 길이다.
Q 춤추는 나무는 별을 품은 사람들(이하 ‘별품사’)도 만들었다고 들었다.
2018년경 4.16 안산시민연대에서 ‘별을 품은 이웃’이라는 마을별 세월호 모임을 제안했다. 그때 나는 '함께크는여성울림'에서 상근 활동가로 피켓팅과 서명전 등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활동가들과 고민하다가 “울림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여 활동하고 마음을 나누자”라며 회원들을 모아 소모임 ‘별품사’로 의기투합했다.


대단한 목표보다 그저 참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별이 된 아이들을 우리 가슴에 품고 살아가자는 뜻이었다. 별품사 첫 활동이 별이 된 단원고 아이들의 약전 읽기였다. 《4.16 단원고 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은 1반 1권으로 시작해 10반 10권까지, 그리고 선생님들과 일반인들 이야기 2권으로 책이 12권이다. 책을 펼쳐 아이들 이름을 부르고 이야기하는 게 처음엔 우느라 너무 어려웠다. 아이들의 꿈, 좋아했던 음식을 이야기했고 아이가 좋아한 음악을 모임에서 함께 들었다. 아이와 부모님들의 일상을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우리는 많이 울고 또 웃었다. 약전 전권을 2년에 걸쳐 완독 토론한 후 아이들 모두에게 편지를 썼다. 그 결과물로 250편의 편지 모음집 《잊지 않을게 행동할게》를 펴내 기억교실 각 반에 갖다 두었다.

별품사는 세월호의 진실과 별이 된 아이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공부방’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세월호 관련 영화나 연극을 관람하고 기억식 등 관련 행사에 참여해 왔다. 세월호 공방 어머니들을 모셔 와 꽃누르미와 퀼트로 소품을 만들며 아이들 이야기를 들었다. 416 희망 목공소에 가서 아버지들과 목공 실습도 했다. 올해는 별품사 새 회원들과 함께 약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3월에는 약전에 빠진 아이 중 1반 문지성 이야기를 어머니 안명미 님을 모셔서 생생히 듣는 시간도 가졌다.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유가족들 곁에서 안산의 한 귀퉁이를 지키는 온기가 되려고 한다.
Q 그 외에도 매달 피케팅과 생명 안전 공원 예배에 참여하지 않나.
피켓을 드는 것은 시민들에게 참사의 진실을 알리며 잊지 말자고 호소하는 직접적인 소통 창구다. 매월 둘째 수요일 5시 30분 광화문광장에서 ‘기억공간 지키기 집중 피케팅’을 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의 차가운 시선이나 “인제 그만 좀 해라”, “지겹지도 않냐?”라는 말이 비수처럼 꽂힐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피켓을 놓지 않은 건, 다시는 어떤 참사도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고, 밝혀지지 않은 진상규명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매달 첫 일요일 오후 5시, 공사가 진행 중인 거친 흙바닥 위에서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노래한다. 예배에서 별이 된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시간이 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기억하는 그 시간이 소중하다.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이 모두 안산으로 돌아올 걸 믿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엄마아빠 마음이다. 4.16 생명 안전 공원은 별이 된 아이들의 봉안당을 포함해서 모든 시민이 찾아와 머무는 열린 공간이 될 것이다.
Q 생명 안전 공원 건립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공원 부지 앞에서 반대하는 분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아프다. “너희 때문에 경제가 망했다”라며 화를 내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느끼는 불안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 전반의 불안정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깃을 눈앞의 노란 리본으로 정해버린 거다. 생명 안전 공원은 특정 누군가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참사를 성찰하고 더 안전한 사회를 다짐하는 공간이다. 그분들과도 결국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다.
Q. 세월호 참사 이후 내 삶에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배우자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마누라가 바빠져서 얼굴 보기 힘들다”라더라. 그래서 “참사 이전에도 세 아이 엄마로 늘 바빴거든?” 농담해 줬다. 첫째 변화는, 내가 안산이라는 도시에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학교도 다녔기에 결혼하고 살게 된 안산이 늘 낯설었다. 그런데 참사가 터졌다. 어느 순간 차마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할 수 없더라. 그렇게 비로소 안산에 정주하는 진짜 ‘안산 사람’이 됐다.
둘째는, 참사 이후 그분들이 겪는 사회적 고립과 혐오를 보면서, “이분들 또한 우리 이웃으로서 존중받으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장애인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함께 숨 쉬어야 하듯, 세월호 가족들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분들이 외롭지 않게 안산이라는 공동체의 품을 넓히는 것이 내 활동의 동력이자 철학이다.



Q 세월호 가족들 곁에서 특별히 배운 점이 있다면?
10주기 때 ‘유류품 기록’ 작업을 함께했다. 아이들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기록하며 부모님들이 들려주시는 목소리를 듣고, 다시는 어떤 참사가 일어나면 안 된다는 걸 느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감히 “그 마음 다 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함부로 ‘공감’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됐다. 나는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이웃’이 되기로 했다. 슬플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고!
Q 4.16 세월호 참사 12주기를 맞는 소회는 어떤가?
생명 안전 공원이 계획대로 차질 없이 건립되어 흩어져 있는 우리 아이들이 비로소 안산이라는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공사 부지를 지날 때마다 지난 10년여의 갈등과 눈물, 그리고 그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그곳은 단순히 희생자를 추모하는 무거운 공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언제든 찾아와 산책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일상을 나누고, 생명의 소중함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희망의 광장’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그날, 안산이 비로소 참사의 아픔을 딛고 생명과 안전을 상징하는 새로운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는다.
Q 춤추는 나무의 남은 꿈도 나눠달라.
내 곁에서 함께 일하는 발달장애인 동료들의 속도, 그리고 세월호 가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다정한 이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서로 연결된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살린다. 4.16 이전과 이후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첫 마음을 잊지 않고 끝까지 함께 걸어가고 싶다.
조회수 280
2026-04-09도종환 시인은 시 ‘화인’에서 4월을 이렇게 말한다. “이제 4월은 내게 옛날의
4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도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란다. 2014년 4월 16일 그
날 때문이다. 그게 어디 시인 한 사람만의 고백일까. 11년 전 4월 그날 이후
삶이 바뀌었노라, 고백하는 한 사람을 소개한다. 4.16 합창단원이자 세월호
시민 활동가 파주 시민 김서원(도로시) 님과의 일문일답이다.

자기소개와 근황 인사 부탁한다
파주에 있는 여성 위기 청소년 쉼터에서 밥하는 일을 한다. 24시간 생활시설
- 2 -
인데 활동가 선생님들과 아이들에게 울타리가 되도록 맛있는 밥을 해 주는
게 내 일이다. 청소년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게 내 즐거움이다. 예산에 맞게
좋은 재료 공급 시스템을 만들었다. 매주 월요일 퇴근 후 안산으로 4.16 합
창단 연습하러 가고, 다양한 공연 활동도 한다. 윤석열 파면 결정 나오는 순간 제일 먼저 4.16가족들이 떠올랐다. 4.16 합창
단에서 노래한 건 3년이지만 세월호 가족들 곁에 있는 건 11년째다. 세월호
참사로 나는 정치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됐
다. 정치에 무관심한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투표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고, 유언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다. 사람들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자기 인생을 나누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내
삶도 그렇다. 그날이 나를 깨웠다.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며, 다른 삶을 살게
해줬다. 남태령에 트랙터 몰고 온 농민들 얘기 중에 그곳에 세월호 아이들이
와 있는 거란 말이 있었다. 맞다. 나도 합창단에서 노래할 때 항상 아이들이
함께 있음을 느낀다. 20140416 참사 당일의 기억은?
애들 키우고 닥치는 대로 일하고 아파트 평수랑 좋은 대학 보낼 생각하고 살
았다. ‘애들은 왜 나를 따라주지 않나, 남편은 왜 이렇게 무식할까, 나는 왜
이렇게 고생할까’라며 늘 화가 차 있었다. 노는 날도 놀 줄 모르고 신나는 생
각은 죽어도 못 하는 일 중독자였다. 그런데 수학여행 간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갑자기 내 삶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당일 제일 먼저 찾은 게 우리 애들이었다. 애들이 어디 있지? 아들하고 연락
이 돼서, 배고프지, 라며 짜장면을 사줬다. 짜장면을 먹이는데 더 할 말이 없
었다. 우리 애들은 교복 입고 이러고 다니는데 그 애들은 못 돌아왔잖아. 더
얘기할 수가 없고 마음이 안 잡혔다.


4.16 활동으로 연결되는 계기가 있었나?
갈피를 못 잡다가 지역에서 진실 규명을 위해 서명받는 사람들이 있길래 참
여하고 그 곁에 있게 됐다. 2015년 들어서 별이 된 아이들의 생일 모임을 한
다는 말이 들렸다. ‘아, 그럼 내가 음식을 할 수 있겠다’ 싶어 김경환 목사님
과 네댓이 안산으로 갔다. 가 보니 안산의 ‘치유 공간 이웃’이었다. 우리는 각각 작은 개다리소반에 밥
상을 받았다. 정말 정성스럽게 차려진, 울컥 뜨거운 눈물이 나는 밥상이었다. 가족들에게 차려지는 밥상이라는 생각에 나는 계속 울면서 밥을 먹었다. 이영
하 선생님이 그러더라. “이곳은 야전병원”이라고. 투쟁하고 다치고 지치면 잠
깐 쉬어 가는 곳이라고. 그게 4.16 활동과의 연결이었다. 봉사자 엄마들이 《금요일엔 돌아오렴》(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15) 책을 소리 내어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길래 함께 했다. 혼자서는 엄두
를 못 내던 책을 같이 낭독하며 실컷 울었다. 점차 노란 리본을 만든다든가
동네에서 세월호 특별법 서명대에도 섰다. 치유공간 이웃(이웃): 2014년 9월~2021년 2월까지 안산에 있었던 치유 공간. 정신과 의사 정혜신·심
리기획자 이명수 부부가 제안하고 시민단체 활동가 이영하 전 대표(50)가 실무를 맡았다. 수많은 활
동가와 봉사자들이 4.16 가족들이 안심하고 울고, 편하게 밥 먹고 쉴 수 있게 함께 했다. 별이 된 아
이들의 생일 모임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책 《밥은 먹었어요?》(이영하, 걷는사람, 2022)와 영화
<생일>(2019, 이종언 감독)에 이웃 이야기가 더 있다. 별이 된 아이들의 생일 모임과 밥 이야기
첫 생일 상차림을 위해 연 계좌에 80만 원이 모였다. 양을 대중 못해 장 보
고 나니 딱 만원 남더라. 이 정도로 돈이 든다면 내 카드 긁을 각오까지 했
다. 그렇게 준비된 영만이 생일 모임에 단원고 아이들과 사람들이 엄청 왔다.
- 4 -
50인분이란 음식이 100명 먹고도 남아, 화수분이라며 싸 주었다. -다음 모임은 다음팀이 단톡방을 열어 준비했다. 별이 된 아이 이야기를 공유
하고 좋아하는 메뉴로 준비했다. 나는 그런 팀을 조직하고 식재료를 연결하고
음식도 만들었다. 수많은 봉사자들이 ‘함께하는 이웃’ 밴드에 모여들었다. 저
명한 여성들인 ‘십자매회’를 비롯해 신부님, 선교사님 그리고 시민들의 후원
과 봉사로, 매달 40만 원 정도로 생일 모임을 할 수 있었다. 2015년 겨울에는 가족들을 위해 김장을 했다. 고양파주 생협과 유기농 식당
네트워크에서 재료를 댔다. 괴산 농부님들이 연결됐다. 몇백 포기 배추가 트
럭으로 오고, 성당에서 기도하던 할머니들이 나와서 배추를 절이고 소금, 고
춧가루, 깨 등을 아낌없이 가져오고, 뒷정리를 도왔다. 가족들께 보내고 쌍용
차나 투쟁하는 분들에게도 보내고, 이웃에서 먹을 수 있었다. 단원고 2학년 6반 고(故) 이영만(1998.2.19.~2014.4,16.) 군은 형제 중 막내로 약하게 태어났지만 건
강하게 자라 축구를 좋아하고 5km 마라톤에서 상을 받았다. ‘미소천사’로 밝고 순한 성격에 엄마와 학
교와 친구들을 좋아하고 공부도 잘해 우주학자를 꿈꾸었다. 2023년 ‘이영만 연극상’이 제정됐다. 사진5, 6
4.16 활동 이전에도 음식하기 좋아했나?
나는 4녀 1남 중 막내딸인데, 아버지가 내 밑에 남동생이 난 후로 “서원이가
제일 예쁘다”라는 얘기를 자주 하셔서 그렇게 알고 컸다. 어깨동무 잡지에서
나는 요리 칼럼을 제일 먼저 읽는 아이였다. 신문도 잡지도 요리 쪽을 1번으
로 봤다. 중학교 때 레시피를 보고 낯선 피자를 직접 만들어 봤다. 할라피뇨, 피망 등 없는 건 집에 있는 재료로 대체했다. 엄마가 정육점에서 살이 치렁치렁하게 큰 돼지고기 덩이를 사 온 적이 있는
데 내가 신문에 나온 레시피를 보고 돈까스를 만들었다. 소금 후추만 쓰란 법
있냐, 간마늘로도 재고, 양파로, 우리 아버지 좋아하시는 청양고추 양념으로
도 재어 튀겼다. 온 식구가 얼마나 맛있게 먹겠어. 입 짧은 남동생과 아버지
가 너무 좋아하니, 우리 엄마는 늘 내게 고마워했다.
- 5 -
언니들은 나를 “요리 천재”라고 불렀다. 장사하고 늦게 돌아오는 엄마에게 내
가 만든 음식으로 밥상을 차려 드리면 “서원이 때문에 내가 한숨 돌린다”라
며 좋아하셨다. 엄마가 아침에 도시락을 10개 싸던 시절, 내가 만든 반찬 덕
에 엄마 수고가 줄어드는 게 좋았다. 참사 이후의 달라진 삶 이야기
돈도 안 벌고 안산과 파주를 오가며 생일상 차리는 일을 한 2년 했다. 아이
디어로 생각하던 음식을 다 만들어 봤다. 그러나 절대 나 혼자 한 게 아니란
걸 말하고 싶다. 연대의 힘을 배웠다. 같이 메뉴 짜며 마음을 나눈 유가족들
과 십시일반 힘 보태 함께 한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런 중에 나는 이혼했다. 2015년 봄, 불교팀 주방에서는 고기 요리를 할 수
없어서 우리 집으로 장을 봐서 모였다. 남편이 폭발해 소리쳤다. “세월호 참
사 안 났으면 어찌 살았겠냐, 죽은 아이들 생일상 차리느라 가족들 밥은 안
차려주냐?” 그는 상을 뒤엎고, 빌려온 큰 팬을 내 쪽으로 던졌다. 남편이 일
베처럼 보였다. 그날 나는 온 가족을 모아 놓고 이혼을 선언했다. 살아온 날들을 부정해야 했고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던 때였다. 내 마음
은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혼이 정리되는 몇 달간 남편이 현관문 열고 들
어오면 내 몸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됐다. 딸이 나서서 이혼 서류를 갖다 줄
정도였다. 그는 안 하겠다고 버텼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18년의 결혼 생
활, 연애까지 25년의 관계가 그해 말 허무하게 끝났다. 사진7,7-1, 8,
이혼 후에도 계속 활동가로
내가 저질렀으니 더 절실하게 활동했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시국에 민중총
궐기 촛불집회가 매주 있었다. 생일 모임 후에 벙커 원 교회 친구들과 토요일
에 청계천으로 갔다. 매주 집회 광장에서 뭘 해볼까 궁리하다 주먹밥을 만들
어 팔기로 했다. 잘 안 팔리더라. 그래서 그냥 나눠줬더니 사람들이 돈을 던
지고 가더라. 그 후 뭐든 나눔으로 했다. 소녀상을 지키는 학생들, 청와대 앞
법외 노조, 비정규직 집회, 블랙리스트 예술인들. 노숙 농성하는 사람들이 많
았다. 토요일 새벽에 밥을 해서 싸우는 분들에게 가서 나누었다.
- 6 -
가진 것 까먹으며 살았다. 고기 안 사 먹고 애들 학원 안 보내고 보험 깨고
적금 해지하고 연금 없어지고 전세가 월세로 줄었다. 불만 많던 아들이 생일
모임에 참여해 보고 반항을 끝내더라. 세월호 당시 중2였던 딸도 생일 모임
에 다녀간 후 엄마를 이해하더라. 박근혜 탄핵 후 지역에서 소수당 진보당에 입당했다. 4.16 활동할 때 제일
묵묵히 함께한 그분들과 파주에서 4.16과 함께 노래하는 일을 시작했다. 음식
만들던 사람들과 함께 공모사업으로 파주 4.16 합창단을 3년 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안산 4.16 합창단까지 하게 됐다. 4년 정도 한 ‘동네
부엌 천천히’에서 청소년 시설로 올해 직장을 옮겼다. 그동안 소진되는 느낌은 없었나?
성과 위주의 인간이었는데 왜 없겠나. 파주 시민 합창단 3년 차 공연을 지역
에 있는 5개 팀 연합으로 잘 올린 후였다. 장애인 가족팀이 40여 명이 참여
해서 한 100명이 했다. 행복하게 끝나고 손뼉 치고 각계 인사들이 인사하고
있는데, 김서원 때문에 불편한 일이 많다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페이스북
에 관련 내용이 올라왔다. 한 번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내 욕심대로 활동한
적 없다고 자신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맡은
일을 많이 정리하고 직장 일과 4.16 합창단만 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여기저
기 삐끗대는 몸도 돌보며 자신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사진9,9-1, 10
4.16 참사 11주기를 맞는 소회는?
11년간 할 만큼 활동하고 나니 속에 화가 많이 풀리고 너그러워졌다. 대규모
음식을 몇 년 하다 보니 나는 음식 전문가가 돼 있었다. 이제 나는 몸도 마
음도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성과 위주의 인간이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변했
다. 밥하는 일과 파주랑 안산 4.16 합창단 활동이 날로 재미있다. 그런 중에 작년에 엑스 남편하고 재결합하고 혼인신고도 했다. “당신은 활동
자유롭게 하고 내가 이제 당신한테 은혜 갚게 해 줘”라는 그의 말에 내 마음
이 열린 거다. 밥이나 사나 했더니 그는 점점 밥을 해 주고 싶다더라. 그는
- 7 -
원하던 삶을 되찾은 셈이다. 가족밖에 모르는 성실한 남자였으니까. 바꿔 말
하면 나에게도 완벽주의를 요구하고 자식과 남편만 바라보길 원했더랬다. 그
집착과 강요와 구속이 내겐 화로 쌓였던 거다. 4.16 참사와 함께 깨졌던 관계가 4.16 활동 덕분에 다시 이어진 거다. 남편
은 노년에 내 수발을 잘 들려고 자기 몸 관리 열심히 했다는 사람이다. 우리
관계도 이전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나이 든 연인이
되었다. 내가 4.16 합창단 공연하고 늦게 오는 날 그는 세탁기 돌리고, 냉장
고 채우고, 맥주 두 캔 먹을 안주 준비해 놓고, 나 데리러 나온다. 돌아보면
이혼은 ‘신의 한 수’였다. 아니면 우리가 서로의 가치를 몰랐을 거다. 이후의 계획이나 꿈은?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 이젠 장사하는 곳에서 밥을 상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소질이 없다. 내 엄마, 아버지에게 밥해줬던 재미, 우리 엄마가 늦
게 들어왔을 때 내가 밥 퍼서 김치하고 줘도 “세상에, 서원이 덕분에 엄마가
이렇게 밥을 맛있게 먹는구나.”라며 내 자존감을 키워준 밥이다. 밥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밥을 해 주는 일이 나는 즐겁다. 매일 출근할 때 일하
러 가는 마음보다는 아이들을 키우러 가는 마음이다. 먹이고, 입히고, 안전하
게 재우고, 내 밥을 먹고 애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더불어 4.16 가족
곁에서 4.16 합창단을 오래 하는 게 꿈이다.
조회수 5
2025-04-11빛이 있다고 분명 있다고
믿었던 길마저 흐릿해져 점점 더 날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수고했어 오늘도
(‘수고했어, 오늘도’ - 옥상달빛 노래 가사 중)
오늘따라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말이 제 질문에 답처럼 들립니다. 에디터 두
번째 글쓰기에서, 질문에 멈춰 섰거든요. “공익 에디터 글쓰기는 평소의 내
글쓰기랑 뭐가 다르지?”에서 “공익과 공익 아닌 것의 경계는 뭐지?”로 갔다
가 “내가 이걸 쓰는 게 맞나?”까지. 4.16합창단 이야기라서 더 어려운가 봅
니다. 제가 별 존재감은 없지만 4.16합창단원이라고 밝히기로 했습니다. “수
고했어 오늘도” 노래의 힘에 기대어 글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 2 -
사진1,2,3
잊지 않을게, 4.16합창단 연습실 스케치
“46,S12,A15,T8,B7” 이건 무슨 암호일까요? 3월 24일(월) 저녁7:30-10:00,
4.16합창단의 정기연습 기록입니다. 안산에 있는 4.16가족협의회 강당에서, 소프라노12, 알토15, 테너8, 베이스7, 지휘자, 반주자, 영상담당 그리고 사회
복지사, 참여자가 46명이란 뜻이죠. 한쪽 벽면 가득 250명의 ‘별이 된 아이
들’ 사진이 노란 걸개로 걸린 컨테이너 강당 연습실입니다.
4.16합창단은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떠나보낸 유가족과 생존한 아이들의 가족
그리고 시민단원으로 구성된 합창단입니다. 2014년 12월 작은 노래모임을 시작할 때, “자식 잃고 뭐가 좋다고 노래하냐”던 분들이 11년 차 합창단이 되었습니다. 3월 말 현
재 통산 456회 공연으로.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고 알리며, 사회적 참사와 아픔이 있
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정기연습 시간은 매주 월요일 저녁입니다.
- 3 -
합창 연습은 ‘먹방’ 후에 시작합니다. 준비된 저녁밥은 김밥과 라면이지만, 오
늘은 단원의 모친상 답례떡, 신입단원이 쏜 곱창순대볶음과 어묵 그리고 준우
맘의 쌀과자 등이 더해집니다. 박미리 지휘자가 연습 시작을 알리네요. “맛있게 드셨죠? 떡 두 봉지씩 챙기신 거죠? 하나만 드시면 안 된대요.”
키득키득 누군가는 떡 한 봉지 더 챙겨 오고, 지휘자는 덧붙입니다. “오늘 연습으로 4회 공연이 이어지는 거 아시죠? 대구 공연 주최측 요청곡이
돌덩이인데 아직 신청 인원이 좀... 계속 더 힘 모아 주세요. 그리고 공연 때
원하는 신입단원은 악보 들고 하셔도 된다고 다시 말씀드려요.”
첫 곡은 <수고했어 오늘도>입니다.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맞는 유가족들과
시민들을 따뜻하게 토닥이는 노래입니다. 이어서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
에게>, <기쁨에게>, <포카레카레아나>, <돌덩이>, <조율>을 부릅니다.

사진4
<별 기억식>
3월 26일: 독학으로 배운 피아노로 교회에서 거의 모든 예배 때 반주를 한, 음악 심리치
료사가 꿈인 양온유(2반)
3월 28일: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걸 좋아하고 마술사가 되고 싶은 김용진(4반)/ 책임감이
강하고 친구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치즈케이크를 좋아하는 구태민(6반)/ 기타도 잘 치
고 손재주가 좋아 프라모델도 능숙하게 조립하고, 자동차 공학박사를 꿈꾸는 안주현(8반)
3월 29일: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모든 것이었던 외동딸, 웃으면 입술 끝에 주름이
생겨서 별명이 '주름'인 김주희(10반)
3월 31일: "음악은 소울이 가장 중요하지!"라며 언제나 음악과 함께하는 '츤데레' 강승묵
(4반)
4월 2일: 성당에 갈 때나 시장을 볼 때, 언제 어디서나 엄마랑 다니고 무엇이든 엄마와
- 4 -
연습 1부와 2부 사이엔 중간 휴식이 있고 ‘별 기억식’이 있습니다. 다음 월요
일에 연습이 없으니 3월 24일~4월 6일 사이에 생일이 든 아이들의 이름을
알토 뿅뿅이 하나하나 호명합니다. “3월 26일입니다. 독학으로 배운 피아노로
교회에서 거의 모든 예배 때 반주를 한, 음악 심리치료사가 꿈인 2반 양온
유”에서 시작해 “9반 권민경”까지. 지휘 없이 피아노 반주와 함께 ‘잊지 않을
게’를 부를 때 오늘도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납니다.

함께하는 엄마의 동반자 '반자' 권지혜(10반)
4월 3일: 섬세하고 다정하면서도 듬직한 성품으로 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는 아들, 자동차 디자이너가 꿈인 정휘범(4반)/ 직장 다니는 엄마를 늘 걱정하고 위로하는 아들, 작가, 만화가, 기타리스트, 천문학자 등 꿈이 많은 이준우(7반)
4월 4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행복을 주는 아들, 부모님이 하시는 음식점에서
모든 음식의 간을 도맡아 볼 정도라 별명이 ‘간쟁이’인 강혁(4반)
4월 5일: 엄마와 걸음걸이까지 닮은 일 번 친구, ‘태권 소년’, ‘단원구 장동건’ 조봉석(8반)
4월 6일: 잔소리 할 일 없이 키운 ‘실거운(슬거운)딸’, 단 한 번도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는 딸, 간호사가 되는 것이 꿈인 권민경(9반)
- 5 -
사진5,6
길 위의 합창단
6년 전 제가 4.16합창단에 처음 들어온 그날도 ‘잊지 않을게’를 불렀습니다. 별이 된 아이들 이름을 부를 때, 부모님과 인사할 때, 목소리가 자꾸 막히고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그런 목으로 계속 노래하는 신기한 합창단이었습니다. 3월 26일(수) 3시 안산마음건강센터 개소식 장소는 햇빛 부신 마당입니다. 합창단은 2시 현장 리허설 후 대기실에서 오색스카프를 두르고 또 연습합니
다. 수없이 부르고 월요일에 연습했지만 오늘은 29명(S5,A11,T4,B7)이 호흡
을 맞춥니다. “수고했어 오늘도”와 “기쁨에게”로 4.16합창단은 마음을 전합합
니다. 지난 10년간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과 안산 지역사회의 치유를 위해
수고한 안산마음건강센터와 거기 모인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고. 공연 후 합창단은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 저녁 6시 30분 서울시의회 앞 세월
호기억공간에서 4.16기억문화제를 합니다. 리허설 시간 5시 30분까지 차로
전철로, 속속 모여든 단원은 낮 공연보다 많은 37명입니다. 초연곡인 ‘포카레
카레아나Pocarecareana’, ‘기쁨에게’ 그리고 ‘돌덩이’를 잘 불렀습니다. 여기
서 3월 31일(월)엔 스텔라데이지호 8주기 추모로 또 모일 겁니다. 4월의 5개 공연 중 저는 대구 ‘여정남 열사 50주기 대동한마당’에 마음이 쓰
입니다. 장거리에다 3월 말 현재 갈 수 있는 단원이 22명인데 알토가 저를
포함해 4명입니다. 평소 가장 수가 많은 알토가 무슨 일일까요? 행사 주최측
에서 요청한 곡이 <돌덩이>. 길고 에너지 넘치는, 알토가 특히 어려운 곡입니
다. 잘하는 동료들에게 기대어 가기엔 4명이 너무 적지 않나요? 후엔 9일(수)
연세대 채플, 12일(토) 11주기 서울집중문화제, 그리고 16일(수)에 안산 세월
호 참사 11주기 기억식에서 노래합니다. 멀리 실상사로 가 ‘선지식과 함께 걷
는 순례길’에서 노래하면 4월이 갑니다. ‘길 위의 합창단’입니다. 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약속 시민대회
일시 : 2025년 4월 12일 오후 2시 / 오후 4시 16분
장소 : 경복궁역 4번 출구(안산 및 각 지역에서 동시에)
주최 :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4.16연대
내용 : - 시민참여마당 오후 2시 : 시민참여부스, 시민발언대
- 시민대회 : 오후 4시 16분
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식 (안산으로 오세요!)
일시 : 2025년 4월 16일 (수) 15:00 ~ 16:17
장소 : 안산 화랑유원지 제3주차장
식순 : 식전공연, 개식 및 국민의례, 추도사, 기억영상 상영, 기억
뮤지컬, 기억 합창 공연
문의 : ☎ 070-4248-8673 4.16재단
https://416act.net/29/?idx=158705632&bmode=view
- 6 -

사진7,8
너의 별에 닿을 때까지, 오색 스카프를 두르고
“10년 동안 길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아픈 사람들과 손잡고 걸어가는 동행
이었고 모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외침이었다.”
작년 10월 4.16합창단 두 번째 앨범 기획공연 ‘너의 별에 닿을 때까지 노래
할게’를 여는 프롤로그였습니다. ‘길 위의 합창단’의 목에 5색 스카프가 처음
등장한 무대였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시작됐지만 아픈 마음과 연대해서 온
세상을 향해 노래하는 합창단이니까요. 재난 참사가 반복되니 마음 아픈 사람
들이 늘어나고 리본 색깔도 늘어나는 현실. 연대와 동행의 5색 스카프를 제
작해 두르게 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노랑,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참사의
주황, 오송 지하차도 참사의 초록, 이태원 참사의 보라 그리고 아리셀 참사의
하늘색. 너의 별에 닿을 때까지 노래할게, 오색 스카프를 두르고.
- 7 -
https://www.youtube.com/watch?v=VuG-kTXO9MQ
두 번째 앨범은 4.16합창단을 위한 창작곡을 포함한 CD와 음원으로 나와 있
습니다. 창작곡 <너>는 태어나던 날부터 18살 수학여행 가는 날까지의 아이
인생을 노래합니다. 봄날, 두 개의 세계, 푸르다고 말하지 마세요, 종이연, 노
래여 우리의 삶이여, 그날처럼 오늘도, 돌덩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그리움을 담은 노래 사이에 부모님들의 육성 편지 “너-하늘로 가는 우체통” 도 담겨있습니다. 첫 앨범 《노래를 불러서 네가 온다면》(2020)은 4.16합창단
6년의 이야기는 책으로, 노래는 CD로, 북CD란 거 아시죠?
“예은아, “노래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요.” 1학년 일기장 속 너의
꿈,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너의 마음을 담아서 외칠게, 노래할게, 바꿔낼
게, 멈추지 않을게. 그리고 안산으로 꼭 데려올게. 사랑해, 예은아.”
별이 된 단원고 2학년 3반 유예은 양의 엄마, 소프라노 단원 박은희 님의 육
성 편지입니다. 한 매체 인터뷰에서 예은 엄마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못한 말을 하려고,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걸어온 길 같
아요. 그래서 애들이 원하는 게 뭘까 늘 궁리하면서 살았어요. 세월호는 한국
사회에 선명한 선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과 다른 세상을 만드는
기준점이 되어야 해요.” “너의 별에 닿을 때까지”, 오색 스카프를 두르고 노래하는 합창단입니다.

사진 9,10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 8 -
제게 세월호 참사는 “침몰하는 배에서 먼저 탈출하는 선장과 선원들”의 이미
지로 각인돼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으로 들립니다. 그해에
우리 집 셋째가 세월호 아이들과 학교만 다른 고2였거든요. 그 봄에 저는 몸
이 심하게 아팠고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가 저를 따
라다녔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병이 도져서 죽을 거 같았습니다. 몸이 더 아플까 봐, 살고 싶어서 4.16합창단에 들어왔습니다. 짝꿍과 함께 활
동하며 늙어가자 했습니다. 노래는 존재감 없지만, 가만히 있진 말자, 곁에
있는 건 할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합창단 활동 6년이 됐지만 여전히 노래
는 자신이 없어서 동료들에게 묻어가는 알토입니다. 참사 11주기를 맞으며, “수고했어 오늘도”가 특별하게 와 닿습니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워온 분들의 실망을 알기 때문입니다. 땀과 눈물 어린 얼굴들이 떠오르고
별이 된 아이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수고했어 오늘도, 노래합니다. 작게 열어둔 문틈 사이로/ 슬픔보다 더 큰 외로움이 다가와 더 날/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빛이 있다고 분명 있다고/ 믿었던 길마저 흐릿해져 점점 더 날/ 수고했어 오
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수고했어 수
고했어 오늘도/ 라 라라 라 라 라 라 라 라라 라....
(‘수고했어, 오늘도’ - 옥상달빛 노래 가사 중)
https://www.youtube.com/watch?v=HdkLHGu8fDc
조회수 5
2025-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