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딸과 함께하는 스페인 여행이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기도 전에 딸은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스페인어 인사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올라(Hola), 그라시아스(Gracias), 로 시엔토(Lo siento). 나는 종이를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말로 아니면 영어로 하면 되잖아. 헬로우, 땡큐, 쏘리. 전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말인데."
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말로 인사하는 게 예의라고, 딱 세 마디면 된다고 했다. 나는 오십이 넘게 살아온 사람 특유의 게으름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원래 새로운 것 앞에서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법이다.
그런데 마드리드의 작은 카페에서, 나는 내 게으름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땡큐"라고 말했을 때 점원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스름돈을 내밀었다. 다음 날 같은 카페에서 딸이 시킨 대로 "그라시아스"라고 말했을 때, 점원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아주 잠깐, 정말 잠깐이었지만 그 웃음은 분명했다. "헬로우"에는 반응하지 않던 사람이 "올라"라고 하자 같이 "올라"를 외쳐 주었다.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순간 나는 언어가 상대를 향해 내미는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확히는, 내가 그들의 땅에서, 그들의 말로, 그를 부르는 순간, 그가 비로소 나를 손님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농인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청인들이 수어를 신기한 듯 쳐다볼 때 어떤 기분이냐고. 친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불편하죠. 마치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 들죠. 그런데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사람이 어색하게라도 수어로 '안녕하세요' 하면, 그건 완전히 다른 기분이에요. 쳐다보는 게 아니라, 인사하는 거니까요."
쳐다보는 것과 인사하는 것. 그 사이의 거리는 수어 하나뿐이다. 마드리드의 점원이 "땡큐"에는 무심했지만, "그라시아스"에는 웃어 주었던 것처럼, 농인들에게도 그 짧은 수어 하나가 자신을 구경거리에서 이웃으로 바꾸어 놓는다.

경기도 농아인 어울림 한마당 / ⓒ 안산농아인협회 갤러리
9월 23일, 세계 수어의 날
매년 9월 23일은 '세계 수어의 날(International Day of Sign Languages)'이다. 1951년 세계농인연맹(WFD)이 창립된 날을 기려 유엔이 2018년 공식 지정했다. 낯선 날짜일 것이다. 나조차도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몰랐던 날이다. 그런데 이 날의 의미를 알고 나면, 왜 하필 9월 23일이어야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계농인연맹이 지향한 것은 단 하나, 수어가 '결핍의 언어'가 아니라 '고유한 언어'로 존중받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수어는 "말 못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쓰는 손짓"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이 수어의 문법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수어가 음성언어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문법 체계와 어휘 체계를 가진 완전한 자연 언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도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을 제정해 한국수어를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로 법적으로 인정했다. 조문 어딘가에 박제된 문장이 아니라, 지구인수어공연단 단원들이 무대 위에서 증명하는 사실이다. 시(詩)를 수어로 옮기면 시의 운율이 손의 속도와 크기로 바뀌고, 노래를 수어로 옮기면 가사의 은유가 표정과 몸의 방향으로 바뀐다. 나는 그 무대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이것은 번역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창작이라고.
그런데도 우리 대부분은 이 법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한국수어가 한국어와 대등한 언어라는 사실을 처음 듣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세계 수어의 날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몰라서 지나친 것과,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 대부분은 전자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알아야 할 차례다.

수어반 학생들과 농인이 함께하는 수어캠프 / ⓒ 안산농아인협회 갤러리
우리가 수어를 몰랐던 이유
수어는 한국어와 대등한, 완전한 자연 언어다. 문법이 있고, 어휘가 있고, 지역에 따른 방언도 있고, 시적인 은유도 있다. 이것은 통역사로서 확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수어를 "손짓의 모음" 정도로 여긴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수어를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 초·중·고 12년 교육과정 동안 외국어는 배우지만, 수어를 정규 과목으로 만나는 학생은 거의 없다. 텔레비전 뉴스 한 귀퉁이의 수어 통역사는 있지만, 그 손짓의 의미를 읽어 내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농인은 이 사회에서 오랫동안 "안 보이는 존재"였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무관심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의 문제다. 스페인어를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이 없듯이, 수어를 몰라도 대부분의 청인은 평생 아무 불편 없이 살 수 있다. 그래서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딸이 나에게 세 마디의 스페인어를 강요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것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예의였다. 그 땅에 사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농인은 우리와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같은 동네, 같은 버스, 같은 회사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들의 언어로 인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다.

주요 뉴스 해석 하기 (뉴스가 어렵기 때문) / ⓒ 안산농아인협회 갤러리
세 가지 오해
수어통역사로 일하며 가장 자주 마주하는 것은, 선의로 가득하지만 틀린 질문들이다. 여기, 우리가 흔히 갖는 세 가지 오해를 적어 본다.
첫 번째, 농인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다.
청인은 농인을 '듣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규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농인 스스로는 자신을 '수어라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를 '농문화(Deaf Culture)'라 부른다. 청각이라는 신체 기능의 결핍이 아니라, 시각을 중심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손과 표정으로 사유하는 하나의 문화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의 전환은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이다. 결핍을 보는 시선과 다름으로 보는 시선은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두 번째, 농인에게 수어는 모국어이며 한글은 제2언어다.
우리는 흔히 모든 농인이 한글을 자유롭게 읽고 쓸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농인에게 제1언어는 수어이고, 한글은 외국어를 배우듯 후천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제2언어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일이 일상이 되면서 젊은 농인들은 한글에 훨씬 익숙해졌다. 그러나 나이 든 농인들 중에는 여전히 긴 문장을 읽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이 많다. 이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들의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수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괜찮아'라는 수어는 청인의 어법과 정반대로 쓰인다.
이 이야기는 조금 더 나에게 각별하다. "커피 마실래?"라고 물었을 때, 청인이 "괜찮아요"라고 답하면 그것은 사양의 뜻이다. 그런데 농인에게 "커피 마실래?"라고 물었을 때, 수어로 "괜찮아"라고 답을 들으면, 그것은 긍정이고, 마시겠다는 뜻이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단순한 언어적 차이려니 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예의를 지키려는 겸양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매번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의 시선이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괜찮아"라는, 조금은 에두른 말로 자존심을 지켜 온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괜찮아"라는 이 손짓 하나에서, 한 공동체가 오랜 시간 스스로를 지켜 온 방식을 본다. 언어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태도를 담는다. '괜찮아'라는 짧은 손짓 안에, 나는 자존심과 겸양과 서러움이 동시에 접혀 있다.

119 응급처치 경연대회 경기도 대회 우수상 수상 / ⓒ 안산농아인협회 갤러리
세 마디면 충분하다, 그러나 한 학기면 더 좋다
전 국민이 수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이고, 오히려 부담만 키운다. 내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해도 세 마디로 마드리드의 점원을 웃게 만들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창함이 아니라 시도다.

이 세 가지 손짓을 아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손짓을 익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사회가 "당신의 언어도 우리의 언어만큼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세 마디의 인사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라면, 학교 교육은 그 문을 아예 열어 놓는 일이다. 나는 장애인식개선 강사로 일하며 수많은 교실에 들어갔다. 그때마다 느낀 것은, 아이들에게 장애를 '이해시키려는' 한 시간짜리 특강보다, 수어라는 '다른 언어'를 몸으로 배우는 한 학기가 훨씬 강력하다. 한 학기 동안 수어를 배운 아이는 농인을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언어를 쓰는 이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장애인식 교육과 언어 다양성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교육이 시도해야 할 가장 효율적인 통합교육이라고 믿는다.
안산 농아인협회는 주 2회, 총 20회, 3개월 과정으로 기초반·중급반·고급반의 수어 교육을 운영한다. (전국에 있는 농아인 협회 대다수가 수어반을 운영하고 있다) 기초반만 수료해도 일상의 간단한 인사와 안부를 나눌 수 있고, 세 과정을 모두 마치면 어느 정도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나는 이 사실을 알릴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본다. 막연히 멀게만 느꼈던 언어가, 3개월이라는 구체적인 시간과 20회라는 구체적인 횟수로 환산되는 순간, 갑자기 손에 잡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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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수 있는 공익적 실천 - 농아인협회나 주민센터의 기초 수어 강좌등록하기 - 다니는 학교에 수어 관련 체험활동이나 방과후 프로그램이 있는지 확인하고, - 공연에서 수어 통역이 제공될 때, 화면을 지우거나 넘기지 않고 잠시 바라보기 - 마주쳤을 때, 어색해도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 보기. -"저 사람은 손으로 말하는 다른 언어를 쓰는 거야"라고, - 만났을 때 그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먼저 읽어 보는 태도를 가져보기. |
이 작은 실천들이 쌓이면, 농인이 매일 마주하는 "신기한 눈빛"의 총량이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인사하는 눈빛"이 채워진다.

장애인, 노인 인권 강의 / ⓒ 안산농아인협회 갤러리
9월 23일은 세계 수어의 날이다. 이날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농인만을 위한 날이어서가 아니다. 이날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준비되어 있는가. 유창하지 않아도 좋다. 세 마디의 인사면 충분하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한 학기의 시간을, 혹은 3개월의 저녁을 내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정보를 습득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해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손이 내밀어질 때, 세상은 아주 조금 넓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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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4※「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함께 걷는 우리, 더 나은 세상을 그리다"
지난 7월 2일 목요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한양대학교 에리카 컨벤션 3층에서 「2026 경기도공익활동가대회」가 열렸습니다. 오후 1시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이어진 이번 행사는 도내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공익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활동을 소개하고, 그동안의 고민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뜻깊은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행사는 사전부스 체험, 특강, 공연, 평등문화약속문 낭독, 그리고 대화테이블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저는 6기 에디터로서 이 모든 과정을 직접 참여하고 기록했습니다.

1. 다양한 체험이 가득했던 사전부스
행사장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여러 단체가 마련한 사전부스였습니다. 각 단체별로 부스를 운영하며 자신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참가자들이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행사 시작 전부터 많은 활동가들이 부스를 돌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각 단체의 활동을 짧은 시간 안에 접할 수 있었던 사전부스는, 본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활동가들 간의 자연스러운 교류의 장이 되어주었습니다.





2. 한양대 에리카 학생 발표 - "공익잇다"
한양대학교 에리카 학생들이 인공지능기초 수업의 IC-PBL 프로젝트로,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의 홍보 업무에 AI를 접목한 결과물을 발표했습니다. 대표 서비스 '공익잇다'는 관심 분야나 지역을 입력하면 맞춤형 공익활동을 추천해주는 AI 챗봇입니다. 이 외에도 조별로 콘텐츠 자동생성, 다국어 확산, 숏폼 제작 자동화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포스터로 소개했습니다.

본격적인 식은 사회자의 평등문화약속문 소개로 시작되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활동해나가겠다는 다짐을 나누는 순서였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오늘 하루 행사가 단순한 프로그램의 나열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식은 사회자의 평등문화약속문 소개로 시작되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활동해나가겠다는 다짐을 나누는 순서였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오늘 하루 행사가 단순한 프로그램의 나열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4. 지구인수어합창단의 감동적인 무대
강연에 이어 지구인수어합창단의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이주민과 농인 가족이 함께 어우러진 이 합창단은 무대 위에서 수어와 노래를 함께 담아내며 깊은 울림을 전해주었습니다. 여러 수어 경연대회에서 수상 경력을 쌓아온 만큼, 무대 구성과 완성도 모두 남달랐고, 객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하나의 무대에서 마음을 모으는 모습은 이번 행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5. 존중과 연결이 있는 대화테이블
이어서 대화테이블 시간이 진행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원형으로 둘러앉아 서클(둘러앉기)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진행요원(가디언)의 안내에 따라 짧은 발언으로 돌아가며 이야기를 공유했습니다. 각 테이블에는 대화를 이끄는 질문지가 마련되어 있었고, 참가자들은 경청을 바탕으로 안전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습니다.



6. 나의 테이블 이야기 - "활동가 번아웃과 소진"
저는 이날 여러 대화테이블 중 '활동가 번아웃과 소진'이라는 주제의 테이블에 참여했습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활동가분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겪은 번아웃 경험을 솔직하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기력 저하, 갑작스러운 의욕 상승 후 찾아오는 급격한 침체, 과도한 피로감, 수면 과다 등 다양한 형태의 소진 증상이 공유되었고, 그 원인으로는 과중한 업무량과 행정·회계·공모사업 등 여러 역할을 동시에 맡아야 하는 구조, 낮은 임금과 고용 불안정성 등이 공통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각자의 대응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거나, 사진 촬영과 같은 취미 활동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거나, 일부러 외부 활동을 만들어 숨 돌릴 틈을 마련하거나, 퇴근 후에는 집에서 일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소진은 스스로 인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동료들의 세심한 관심과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는 공감대였습니다.
대화 말미에는 조직 차원의 개선 방안도 함께 논의되었습니다. 인원 확충을 통한 업무 부담 완화,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연월차 문화 조성, 개인 상담 비용 지원 확대, 주 4일제 도입(인원 보충 및 급여 유지·인상 포함) 등 실질적인 제안들이 나왔습니다. 특히 한 참가자는 자신이 속한 기관에서 활동가 재충전 사업의 명칭을 바꾸고 개인 상담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례를 소개하며, 이러한 지원이 실제로 활동가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저 혼자만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 많은 활동가들이 비슷한 고민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함께 고민을 나누는 것 자체가 소진을 예방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다양한 체험이 있는 사전부스부터 시작해 강연, 공연, 그리고 가장 의미 있었던 대화테이블까지,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알찬 시간이었기에 참여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공익활동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많은 활동가들 덕분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씩 더 따뜻하고, 더 살기 좋게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을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 역시 이번 대회를 계기로, 앞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보탬이 되는 활동가로 거듭나야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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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0※「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무대 조명이 켜지면 첫 장면은 공원이다. 아버지를 찾는 아이와 그 아이를 놀래주는 아버지의 장난. 배우의 어린 시절 기억이었다. 아버지와 그네를 탄다. 손을 놓으면 넘어질까 봐 아버지는 아이 허리를 꽉 쥔다. 또 다른 배우의 기억이었다. 우리 배우들은 이 장면에서 손가락 하나하나를 다르게 쓴다. 베트남에서 온 농인 배우는 자기 아버지 손은 이보다 더 컸다고 손짓으로 크기를 보여줬다.
다음 장면은 열일곱 살. 아이는 이제 십대다. 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다툰다. 수어의 손이 커지고 손짓이 날카로워진다. 화가 난 손은 원래보다 반경이 넓어진다. 우리는 이 장면을 연습할 때마다 웃었다. 다들 우리 아버지 모습과 같다며 눈물 지웠다.
세 번째 장면, 공항이다. 아버지의 만류를 뒤로하고 사랑을 찾아 출국하는 딸. 손은 이제 등을 돌린 채로 움직인다. 등을 돌리고 수어를 한다는 건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농인끼리는 서로의 손을 보지 않으면 대화가 끊긴다. 그런데 이 장면만큼은 일부러 등을 돌렸다. 보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는 걸, 우리는 그렇게 표현하기로 했다.
마지막 장면. 아버지의 유언이다. 죽으면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고, 딸이 있는 곳 가까이 흘러가고 싶다고, 마지막까지 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 이 장면에서 우리는 수어 없이 가슴을 뜯는 장면으로 했다. 수어도 필요 없는, 모두가 겪었던 슬픔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단순한 몸짓을 관객석에서 우는 사람 없이 보기가 힘들다.
그리고 인순이의 노래 <아버지>를 이렇게 수어로 옮겼다. 노래 하나를 오 분짜리 무언극으로 만드는데, 우리는 반년을 썼다.

아버지라는 곡이 만들어지기까지
새로운 공연을 준비하던 무렵이었다. 배우들에게 물었다. 이번엔 뭘 하고 싶으냐고. 대중없이 서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며칠을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겪은 일들을. 눈물이 먼저 나오고 말이 뒤따라오는 이야기들이었다. 차별받은 이야기, 무시당한 이야기,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억울했던 이야기. 다 다른 사연인데 끝은 같은 곳으로 갔다. 가족이었다. 그리움이었다. 이야기를 아무리 늘어놓아도 결국 마지막 문장은 두고 온 부모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를 만들었다.
농인 배우들의 사정을 들어보니 결이 비슷했다. 학령기가 되면 농학교에 갔다. 농학교는 전국 단위로 몇 곳뿐이라 대부분 기숙사 생활이었다. 여덟 살짜리가 집을 떠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방학에만 집에 왔다. 부모는 언제나 그리운 존재였다. 매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방학에만 만나는 사람. 이주민 배우들이 국경 너머 부모를 그리워했다면, 농인 배우들은 기숙사 담장 너머 부모를 그리워했다. 거리는 달랐지만 그리움의 모양은 똑같았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만들려던 건 이주민의 노래도, 농인의 노래도 아니었다. 두고 온 사람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의 노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누구 한 사람의 사연이 아니라, 무대에 선 모두의 사연이 됐다.

지구인 수어 공연단, 우리 소개를 이렇게 쓴다.
농아인, 이주민, 선주민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연대를 실천하고, 수어 예술을 통해 장애 감수성 및 문화 다양성의 가치를 실천합니다.
하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 문화 차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단원들은 주로 수어로 소통한다. 청인이 음성언어를 쓰면 농인 배우가 눈을 흘기며 수어로 하라고 한다. 급해서 그랬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한 번 더 그러면 탈퇴하겠다는 엄포가 돌아온다. 나는 처음엔 이걸 농인에 대한 무례라고 여겼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건 자기 언어를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었으며, 단원으로서 서로 공감대를 갖고자 하는 연대의 손짓이었다.
다툼이 나면 농인 배우들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눈을 피하면 손이 안 보이니까. 그것도 모르고 나는 다투는 둘을 떼어놓으려 했다. 떼어놓을수록 싸움은 커졌다. 말리다 보면 수어가 서툰 단원의 통역까지 내 몫이었다. 내가 싸움을 말리는 건지 싸움 안에 있는 건지 헷갈리는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수어는 아무리 다툼이 있어도 시선만큼은 피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줄을 삐뚤게 서는 농인 배우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있다. 참다못한 그 배우가 나를 자기 자리에 세우고, 음악 없이 공연을 시작했다. 중간쯤 가자, 나는 흐름을 완전히 놓쳤다. 음악을 듣고 수어를 맞추던 나는, 음악이 없으니 언제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제야 알았다. 줄이 삐뚤었던 게 아니라, 앞사람의 수어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박자였다는 것을. 나는 그날 바로 사과했다. 그의 자리를 뒤로 옮겼다. 지금은 줄이 삐뚤어도 아무 말 안 한다.
다툼을 말리다 나도 모르게 농인 배우의 손을 잡은 적도 있다. 수어 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다는 건, 말하는 사람의 입을 손으로 막는 것과 같다는 걸. 무심코 한 행동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이 단체에서 매번 새로 배운다.
40년 넘게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한 무대에 서는 일이다. 쉬울 리가 없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맞춰간다. 눈을 피하지 않는 법을, 손을 함부로 잡지 않는 법을, 줄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법을. 문화가 다르다는 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배울 게 남았다는 뜻이라고, 나는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공연 커튼콜
공연이 끝나면 커튼콜 전에 배우 소개 시간을 갖는다. 베트남 농인 배우가 오늘따라 하기 싫다고 했다. 한국 수어가 아직 서툴다는 이유였다. 다른 단원 하나가 그럼 그냥 단체 인사로 마무리하자고 했다. 다들 그러자는 분위기였다.
내가 나섰다. 우리는 잘하는 수어를 보여 주려고 무대에 서는 게 아니라고 했다. 자존감을 갖고,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서툴러도 괜찮다고, 서툰 것도 우리 모습이라고.
그때 베트남 농인 배우가 말했다. 그러면 나는 베트남 수어로 인사하겠다고. 그 순간이었다. 내가 이 단체를 만들면서 꿈꾸던 모습이 정확히 그 장면이었다. 한국 수어가 서툴러서 숨는 게 아니라, 자기 언어로 당당히 서는 것. 지구인 수어 공연단이라는 이름값을 그 배우 혼자 그 몇 초 안에 다 해냈다. 나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건 완벽한 무대가 아니다. 자기 언어로, 자기 방식으로 당당히 서는 사람들을 보는 일이다.

공연 후 단톡방에서
공연이 끝난 밤, 단톡방이 시끄러웠다. 농인 배우 박수진이 먼저 글을 올렸다.
하나의 무대, 하나의 마음 ✨
서로 다른 빛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별이 되고,
서로 다른 손짓이 모여
하나의 감동이 됩니다.
무대 위에서는 모두가 주인공,
열정은 노래가 되고
우정은 춤이 되어
세상에 희망을 전합니다.
지구인공연단
"함께라서 더 빛나고,
꿈꾸기에 더욱 아름답다."
오늘도 여러분의 무대가 세상을 환하게 비춥니다.
이어서 이주민 배우 전연의 글이 올라왔다.
우리의 공연을 본 누군가는 처음으로 수어를 만나고, 농아인의 문화를 이해하며, 다름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작은 관심은 이해가 되고, 이해는 소통이 되며, 소통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듭니다.
무대 위에 함께 선 농아인과 청인, 한국인과 외국인의 모습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공연을 보여 주기 위해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무대에 섭니다.
~우리가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입니다.
단톡방에 내가 적었다. "작가보다 잘 쓰네."
전연이 답했다. AI 도움을 좀 받았다고. 다들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으면서 생각했다. 문장의 마지막 손질을 사람이 했든 기계가 했든, 그 밤,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박수 소리로 손을 흔들던 건 분명 관객들이었다. 감동은 대필 되지 않는다. 그건 몸으로만 쓸 수 있는 문장이니까.
우리는 계속 갈 것이다. 줄은 여전히 삐뚤어질 것이고, 손은 또 누군가를 오해하며 잡힐 것이다.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던 어느 아버지의 유언이, 국경을 넘어온 딸들의 손끝에서 매번 다시 태어난다. 그 손짓 하나를 완성하는 데 9년이 걸렸고, 앞으로도 계속 걸릴 것이다. 무대가 끝나면 조명이 꺼진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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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0※「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권리가 되는 안산을 꿈꾸며
안산시 장애인권리보장 정책실현 시민대토론회를 다녀와서
2026년 4월 29일 |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

[ 토론회 순서 ]
좌 장 권달주 (상록수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
발 제 안산시 장애인 정책의 현재와 대안 / 김병태 [(사)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안산시지부 지부장]
사례1 장애인 이동권은 삶이다 — 오성현 (상록수IL센터 동료상담가)
사례2 장애인 학습권 보장하라 — 임영채 (경기IL센터협의회 안산시지부 동료상담가)
사례3 우리도 일하며 살고 싶어요 — 김문경 (상록수IL센터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 노동자)
사례4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멋에 산다 — 임현수 (전국장애인탈시설연대 경기지부장)
토론1 안산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역할 — 이재민
토론2 장애인 평생교육 — 김선영 (안산나무를심는장애인야학 교장)
토론3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 조례의 필요성 — 조은소리
토론4 안산시 장애인 탈시설 권리 보장을 위한 정책과제 — 전유리
토론5 발달장애인 지원 정책, 이동권의 행정 장벽 철폐와 주거 선택권의 확장 — 김정아
토론6 장애인건강보건관리종합계획의 의의와 한계, 안산 지역에서의 실천 과제 — 팔도
종합토론 질의·응답


우리나라에서 휠체어가 다니기 가장 좋은 곳은 어디일까?
정답은 공항이다.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 때문에 공항 바닥은 반질반질하다. 턱도 없다. 경사로도 있다. 엘리베이터가 아주 넉넉하다. 모든 이동 동선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건 휠체어 타는 장애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캐리어를 끄는 비장애인이 불편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씁쓸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오래도록 이런 세계에서 살아왔다.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편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조건이 되는 세계. 그러나 그 '다른 누군가'는 처음부터 설계의 이유가 아니었던 세계.
4월 29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안산시 장애인권리보장 정책실현 시민대토론회'는 그 씁쓸함에 정면으로 맞서는 자리였다. 회의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래 참아온 사람들 특유의 조용한 단단함이 있었다.

기다림이라는 이름의 차별
발제를 맡은 김병태 지부장이 첫 말을 꺼냈다. "장애인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헌법과 UN 장애인권리협약이 보장하는 당당한 권리의 주체입니다." 안산에 살아가는 3만 2천여 명의 장애인 시민들이 예산의 효율성이라는 벽 앞에서 더 이상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이동권 사례를 발표한 오성현 님의 말은 그 선언을 삶의 언어로 번역해주었다.
"어쩌다 시간에 맞게 딱 콜이 잡히는 날에는 정말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기분 좋은 날입니다."
하모니콜. 안산시의 특별교통수단이다. 관내 평균 대기시간 28분, 관외 38분. 출퇴근 시간대에는 최대 2시간을 기다린다. 하루 이용 횟수는 4번으로 제한되어 있다. 눈비가 오면 더 오래 기다린다. 오성현 님은 퇴근도 못 한 채 휠체어에서 잠이 든 날이 있다고 했다.
비장애인에게 이동은 그냥 나가는 것이다. 장애인에게 이동은 계획이고, 기다림이고, 운이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같은 시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발제에서는 차량 1대당 운전원 2.5명 확보와 일일 16시간 운행 전면 보장, 수도권 즉시콜 시스템 도입, 와상장애인 전용 특별교통수단 도입이 요구됐다. 또한 모든 버스정류장과 보도의 배리어프리 전수조사, 소규모 상업시설 경사로 설치 비용 전액 지원도 제안됐다. 이것들은 요청이 아니라 권리다. 공항 바닥이 반질반질한 것처럼, 당연해야 할 것들이다.

배움과 일, 그리고 존엄
임영채 님이 조용하게 말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데, 우리에게 배움은 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안산에서 장애인이 교육받을 수 있는 공간은 '안산나무를심는장애인야학' 단 한 곳뿐이다. 장애 성인의 54.4%가 중졸 이하의 학력에 머물러 있다.
배움이 닫히면 지역사회로 나가는 문도 함께 닫힌다. 장애인 평생교육지원센터 신설과 문해교육 기본교육과정 지원, 이것은 교육부의 일이 아니라 안산시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다.
권리중심맞춤형공공일자리에서 일하는 김문경 님의 말은 달랐다. 이전 직장에서 그는 늘 눈치를 봐야 했다. 낮은 임금과 비장애인 중심의 환경 속에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일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존엄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실현하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토론에서는 안산형 권리중심 맞춤형 공공일자리 조례 제정이 제안됐다. 최중증장애인 100명 고용, 12개월 근로계약, 3년 위탁 보장. 숫자들이지만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얼마 전, 수어 통역을 했던 농인 이야기가 생각났다. 공공일자리 주차요금 징수 업무에 농인이 지원했다. 주차장을 오가며 요금을 받는 일이다. 요즘은 카드로 결제하니 말이 필요 없다. 카드 받고, 계산하고, 인사하면 끝이다.
그런데 안 된다고 했다.
수어 통역을 통해 일단 해보고 문제가 생기면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안 된다고 했다. 말이 안 들리면 일을 못 한다는, 설명되지 않는 논리. 농인은 말을 못 듣는 게 아니라 다르게 소통할 뿐인데.
공항 바닥이 반질반질한 건 설계의 문제다. 농인이 주차요금을 못 받는다는 건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너무 많은 곳에서 상상하기를 멈추어 있다.

시설 밖 세상으로
임현수 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그는 어릴 적 경기도 광주의 '향림원'이라는 시설에서 살았다. 2013년 2월의 어느 밤, 선생님이 장애인 동료들을 벽에 세우고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역시 빗자루와 글루건 심으로 발바닥과 손바닥을 맞고 발이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2015년 다른 시설로 옮겨졌지만 폭력의 그림자는 그대로였다. 시설 밖으로 나가 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원장은 욕을 하며 탈시설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마침내 2024년 10월 2일, 그는 세상으로 나왔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제가 결정하고 제가 책임지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매일 느낍니다."
탈시설 5개년 로드맵, 지원주택 조례 제정, 활동지원 24시간 보장, 자립생활센터 역량 강화. 이것들이 실현될 때, 임현수 님 같은 사람이 10년을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토론회 마지막, 지방선거 후보자가 물었다. 탈시설 비율이 몇 퍼센트냐고. 담당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시설에 있는 사람이 정확히 몇 명인지, 자립을 원하는 사람은 몇 명인지 통계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몇 퍼센트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숫자가 없다는 것은 존재를 세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지 않은 것은 보지 않은 것이다. 보지 않은 것은 없는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저녁 7시 수업을 듣고 싶었던 친구에게
토론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 친구가 떠올랐다. 수어 교실에서 만난 전동휠체어를 탄 그 친구. 회사에 농인 동료가 생겨 수어를 배우러 온다고 했다.
저녁 7시 수업인데 그는 항상 5시, 6시에 와 있었다. 궁금해서 물었다. 오후 4시에 퇴근하자마자 하모니콜을 부른다고 했다. 퇴근 시간대에는 콜이 잘 안 잡힌다고. 저녁도 거른 채 빵 하나로 끼니를 때우며 일찍 오는 게 낫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는?
9시에는 콜이 더 안 잡힌다고 했다. 밤 11시에 콜이 잡혀서 집에 간 적도 있다고. 추운 겨울, 온기 하나 없는 복지관 입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러면 일찍 가지, 라고 내가 말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렵게 왔는데 수업은 다 듣고 가고 싶어요."
추석에는 혼자 전철을 타고 수원 스타필드에 다녀왔다고 했다. 처음으로 혼자 나들이를 한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다. 전동휠체어는 무거워서 아무도 들어줄 수 없다. 보도 턱에 막혀 집으로 돌아간 날도 많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토론회를 끝까지 들어보며 작년에도 했던 말들이 올해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아마, 내년에도 반복될 것이다. 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자는 말들이 구호로만 머무는 한.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언젠가 이 질문들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늘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더 행복하게 살 것인가'로.
공항 바닥이 반질반질한 건 캐리어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처음부터 휠체어를 위해 설계된 도시가 생겨날 것이다. 그 도시에서는 장애인 이동이 로또가 아닌 당연한 일상이 될 것이다. 농인이 주차요금을 받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거창한 미래가 아니다. 그냥 평범한 일상이다. 그 평범함이 모든 사람에게 권리가 되는 안산을, 나는 오늘도 꿈꾼다.


2026년 4월 29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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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1※「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리가 비워진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
— 수어연극 〈영지〉 4기를 보고
2026년 5월 3일 / 모두예술극장

1. 걱정하는 자의 입장
나는 수어통역사다. 동시에 수어로 노래하는 지구인수어공연단의 대표이기도 하고, 극단 유혹에서 무대에 서는 현직 배우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면, 연극도 알고 수어도 안다. 그러니까 이 감상문은 순진한 관객의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하고, 비교하고, 납득하고, 다시 의심한 사람의 기록이다.
수어연극 〈영지〉 4기를 예약했을 때, 내 안에는 기대보다 걱정이 먼저 앉았다. 농인 배우들이 몸을 쓰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건 걱정이 아니었다.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대사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까? 수어를 언어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아름다운 춤으로 소비해 버리지는 않을까?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 하나. 연극이란 장르가 어디까지 수어로 가능할까?
이 질문들을 품고 나는 5월 3일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으로 향했다. 마치 면접관처럼. 아니, 정확히는 오랜 친구의 첫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처럼 —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90퍼센트지만 그래도 냉정하게 보겠다는 그 마음.
[▲영지 포스터(출처 국립극단 홈페이지)]
2. 그래, 그들에겐 그들만의 세계가 있지 — 〈영지〉 1기에서 4기까지
연극 〈영지〉는 2019년에 처음 태어났다.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이 내놓은 청소년극 프로젝트로, '병목안'이라는 완벽해 보이는 통제된 마을에 별난 소녀 영지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상상 속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영지는 마을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다름이 세계를 바꾼다는 이야기. 1기는 그 씨앗이었다.
2기(2023년)는 '접근성'이라는 단어가 붙기 시작한 시기다. 장애인 관객의 관람 장벽을 낮추려는 시도가 본격화됐다. 비장애인이 만든 연극에 장애인도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조금 열어준 방식. 배려는 배려이되, 주인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분명했다.
3기(2024년)는 온라인 배리어프리 수어 버전이었다. 영상으로 수어 통역이 제공됐고, 당시 수어 해설을 지켜보던 연출이 문득 상상했다고 한다. '이 작품 전체를 수어로 올리면 어떨까?' 쉽게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4기(2026년). 수어가 무대 위 주언어가 되는 '완성형 수어연극'이다. 농인 배우 5명, 청인 배우 1명. 수어와 음성이 동시에 흐르지만 중심은 수어 쪽이다. 작가에게 '공연이 거듭될수록 하고 싶은 말이 달라졌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작가는 담담하게 답했다. '변함은 없어요. 단지 수어로 공연을 했을 뿐입니다.‘


3. 입장 15분 전, 무대 위의 아이
나를 처음 놀라게 한 것은 공연이 시작하고 나서가 아니었다. 입장이 시작된 15분 전이었다.
무대에 배우가 나와 있었다. 혼자. 놀고 있었다.
공연을 꽤 많이 보러 다녔지만, 주인공 배우가 입장 전부터 무대 위에서 혼자 노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신선한 충격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배우는 관객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냥 자기 세계 안에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떤 단어를 떠올렸다. '농문화.' 청인이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농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감각과 세계. 우리는 그것을 농문화라고 부른다. 무대 위 그 아이는 농인의 세계를, 청인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그 고유한 세계를 이미 살고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11살 영지만의 세계이기도 했다. 두 개의 세계가 겹쳐져 있었다. 농문화의 고립성과 아이의 고독함이 아직 조명도 바뀌지 않은 무대 위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연출의 의도인지 배우의 선택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15분이 공연의 절반을 이미 설명해버렸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4. 수어는 언어다 —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증명했다
막이 오르자 내 눈은 바빠졌다. 수어통역사의 눈은 손을 먼저 쫓는다. 그런데 이 배우들의 몸은 손에서 멈추지 않았다. 손이 말하는 동안 얼굴이 함께 말했고, 몸 전체가 문장이 되었다.
농인 배우들은 판토마임에 가까운 신체 언어와 수어시(手語詩), 즉 수어문학의 형식을 능숙하게 활용했다. 그것은 수어가 단순한 손동작의 나열이 아니라 고유한 문법과 문학성을 가진 언어라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수어예술감독 이미선님이 인터뷰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나비가 날다'는 문장 하나도 손의 모양과 움직임으로 나비의 섬세한 날갯짓을 다채롭게 형상화할 수 있다고. 이론으로 알고 있던 것을 눈앞에서 보았다.
주인공 영지 역의 박지영 배우는 압도적이었다. 3년 전 이 작품에서 수어 통역을 맡았던 그가, 이번에는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다. 11살 아이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그를 보면서, 나는 배우로서도 혀를 내둘렀다. 단 1분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 연습실에서 플랭크와 복근 운동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효정 역의 이소별 배우도 인상적이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그는 달랐다. 순종적이던 효정이 영지를 만나며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을 수어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물 밖으로 나온 어린 물고기가 나에게도 투명 다리가 있었어 하고 외치는 장면'은 수어 특유의 표현력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소리가 없어도 목이 메었다.
조명도 놀라웠다. 모두예술극장의 첨단 조명 장치들이 수어 연기와 맞물리면서 무대를 빛나고 화려하고 환상적으로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각 언어가 주언어인 무대에서 조명은 단순한 분위기 연출이 아니라 언어의 일부가 된다. 연출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웃음도 있었다. 어른이 아이를 꾸짖는 장면에서, 영지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가 억울한 듯 다시 눈을 치켜떴다. 청인 아이라면 고개를 숙이겠지만, 농인은 시선을 피하면 대화가 끊긴다. 그 불가피한 눈맞춤이 반항처럼 보이는 농문화 특유의 개그 코드. 농인 관객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나도 웃었다. 이쪽 세계를 아는 사람의 웃음으로.


5. 게으른 해설사, 그리고 베리어프리는 누구의 것인가
한 가지 내내 마음에 걸린 것이 있었다. '게으른 해설사'였다.
수어 연극이라는 본질을 지키면서도 청인 관객을 완전히 내버려둘 수 없다는 현실적 고민이 낳은 존재, 소리꾼 신유진이 무대 한 켠에서 판소리로 간간이 해설을 얹었다.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과하지 않았고, 판소리 특유의 질감이 수어 연기와 묘하게 어울렸다. 연출이 적절한 수위를 찾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만약 해설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동안 농인들이 청인의 세계에서 느껴왔던 그 답답함을, 청인 관객들이 잠깐이라도 체감해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언어를 모른 채로 그 세계에 던져지는 경험. 그래도 맥락이 읽히고, 감정이 전해지고, 어느 순간 손짓이 언어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 경험. 그것이 사실 이 공연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 아닐까.
하지만 나도 안다. 돈을 내고 온 관객에게 '장애 체험'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는, 예술가가 평생 씨름해야 할 질문이다. 이번 공연은 그 질문에 나름의 답을 찾았다. 나는 그 답에 80점쯤 주겠다. 나머지 20점은 다음 기수를 위해 남겨두겠다.
공연 후 '예술가와의 대화'에서 영지 역의 박지영 배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지금까지의 베리어프리는 청인 중심이었다. 비장애인이 만든 세계에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방식이었다. 이제는 달라야 한다. 배우도 스태프도 장애인이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베리어프리다.
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어통역사로서, 수어 공연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무대에 서는 배우로서 — 세 겹의 마음으로.
〈영지〉는 '장애인도 볼 수 있는 연극'이 아니다. 농인이 주인공인 연극이다. 수어가 장식이 아니라 언어인 무대다. 그리고 그 무대를 보러 온 청인 관객들은, 처음으로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본다. 그 낯섦이 이 공연의 진짜 선물이다.
나는 반짝이는 손들의 박수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소리 없이 흔들리는 두 손이 객석을 가득 채우던 그 순간, 연극이 어디까지 수어로 가능하냐는 내 질문에 무대가 조용히 답했다. 여기까지. 그리고 아직 더 남아 있다고.


* 수어연극 〈영지〉 4기는 2026년 4월 30일부터 5월 10일까지 모두예술극장에서 공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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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5손으로 노래하는 지구인들
언어의 경계를 넘는 연대와 감수성의 힘

2018년 5월, 안산의 작은 다문화도서관에서 조용한 만남이 시작됐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여섯 명의 이주민 여성들이 '수어'를 배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말이 아닌 손짓으로, 목소리가 아닌 표정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이 특별한 언어는
곧 그들의 삶을 바꾸는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지구인 수어합창단은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활기차게 활동
중입니다. 처음에는 엄마들만의 모임이었지만, 곧 아이들이 합류하며 그 세계는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코스모스 활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어
린이 수어 팀으로 성장했습니다. 손끝으로 노래하고, 표정으로 감정을 전하는 과
정은 단지 공연을 넘어서, 정체성과 자존감을 키우는 특별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만난 또 다른 '낯섦'과의 교감
합창단의 구성원 대부분은 제2 언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주민 여성들입니다. 한국에 오기 전, 그들은 자국에서 당당한 한 명의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는 '이방인'이 되었고, 언어 장벽으로 인해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답
답함과 소외감을 경험했습니다. 식당에서 메뉴를 주문할 때, 아이의 학교 알림장
을 읽을 때, 병원에서 자신의 아픔을 설명할 때마다 느끼는 불안과 무력감은 그들
의 일상이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버스 타는 것조차 두려웠어요. 잘못 내리면 길을 잃을까
봐, 질문해도 못 알아들을까 봐...." 합창단의 한 회원은 회상합니다. 다른 회원은 "아이 학교에서 엄마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가기 싫었어요. 대화에
끼지 못하고, 때로는 다른 엄마들이 수군거리는 것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그들이 수어를 배우며 농인들과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소리의 언어' 안에서 느꼈던 소외감, 낯선 문화에 적응하며 겪는 불안은 농인의
세계와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감정은 닿아 있었고, 그 연대의
토대 위에 손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노래가 피어났습니다.
드디어 초청 무대에 오르다. 코로나 시기에도 합창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온라인 수어 경연대회, 뮤직비디
오 제작, 찾아가는 수어 교실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갔고, 2024년에는
경기도농문화제 수어 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
상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가 손짓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올해 4월 18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시흥시 초청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일
은 합창단에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농인을 포함한 관객 앞에서 손으로 노래하
며, 이주민과 장애,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기 때
문입니다. 한 회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대에 섰을 때, 내가 더는 '외국인'이 아
니라 '전달자'가 된 느낌이었어요. 우리의 손짓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차별을 넘어, 다름을 존중하는 공동체로
이주민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편견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언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지적 능력을 의심받기도 하고,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이상
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는 동등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더 적은
임금을 받거나, 승진에서 배제되는 일도 흔합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무시당하
거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아픔도 겪습니다.
"한번은 마트에서 계산할 때 직원이 나를 보지 않고 한국인 남편에게만 말을 걸
더라고요. 마치 내가 없는 사람처럼요." 합창단의 한 회원이 털어놓습니다. 또 다른 회원은 "아이 학교 상담 때 선생님이 나에게는 말하지 않고 통역해 준
한국인 친구에게만 이야기했어요. 내가 엄마인데도...."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험들이 지구인 수어합창단 구성원들에게는 농인들의 감정을 더 깊이 이
해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차별과 소외의 경험이 오히려 더 강한 연대 의식을 만
들어낸 것입니다. 수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들은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공통된 경
험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성장하는 값진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손짓으로 키워낸 다음 세대의 감수성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며 지금은 함께하지 못하지만, 그 아이들이
보여주는 높아진 장애인 감수성과 또렷해진 자존감은 코스모스 활짝 합창단이 남
긴 가장 큰 선물입니다. 어떤 아이는 수어를 통해 친구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만들
었고, 어떤 아이는 "장애인 친구가 생겼어요"라며 밝게 말합니다. 이주민 가정의 아이들은 종종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한국에 왔지만, 외모나 부모의 출신으로 인해 '한국인이 아닌' 취급을 받
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어 활동을 통해 이 아이들은 새로운 정체성과 자부심을 발
견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이 약점이 아닌 강점이 될 수 있음을 몸소 체험
한 것입니다.
지구인 수어합창단은 단순한 예술 단체가 아닙니다. 이들의 활동은 공감 교육이
자, 문화 다양성과 장애 감수성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실천입니다. 각종 수어 축
제와 행사에 참여하며 수어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무엇보다 '다름'을 존중하는 문
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2025년 1월 소년원에서의 봉사 공연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도 연대와 이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
니다. 이들이 손으로 노래하는 그 모습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인
가. 같은 언어를 쓴다고 다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이
해하고, 닿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지구인 수어합창단의 손짓은 오늘도 우리 사회
에 조용하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말이 아닌 마음으로, 손끝으로 이어지
는 이 노래가 더 많은 사람의 가슴에 닿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손짓 속에는 차별
과 편견을 넘어, 더 포용적이고 따뜻한 세상을 향한 꿈이 담겨 있습니다. ------------------------------------------------------------------ 지구인 수어 합창단 전연 회장의 글

제가 한국에 처음 온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013년 2월, 추운 겨울이었어요. 바람이 차갑고 마음도 외로웠습니다. 모든 소리가 낯설고, 모든 글자는 마치 암호
처럼 느껴졌어요. 한국어를 배우려고 외국인지원본부에 다녔지만, 마음속에는 말
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다문화 작은 도서관’을
알게 됐어요. 지하 1층에 있는 그 도서관 문을 열었을 때, 전 세계 언어로 된 책
들이 저를 반겨줬어요. 특히 중국어 책이 많은 책장을 봤을 때, 저는 처음으로 이
곳이 조금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 자주 와요?”
도서관에서 일하던 중국인 언니가 물었을 때, 저는 웃기만 했어요.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따뜻했습니다. 그 도서관은 저에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도서관에서 여러 프로
그램에 참여하게 됐고, 2018년 5월 29일, 한국 수어 수업도 시작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그 수업은 제 인생을 많이 바꿔줬
어요. 수업에는 저처럼 다른 나라에서 온 엄마들, 또 한국 엄마들도 있었어요. 모두 책
과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무언가 배우고 싶은 마음도 같았어요. 그리고
또 하나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바로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느꼈던 경험이었습니
다. 매일 저녁, 도서관에 아이들 손을 잡고 엄마들이 들어왔어요.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달랐지만, 인사를 주고받는 손짓에는 차별이 없었어요. 손끝으로 “안녕하세
요”를 처음 배운 날, 저는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말로는 잘 못해도, 손으로는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감동이었어요. 수어를 배우면서 저는 농인들과 제가 비슷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수 언어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소외되고 외로운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몇 달 뒤, 우리는 ‘지구인 수어 합창
단’을 만들어 대회에 나가게 되었어요. 2018년 10월 6일, 경기도 농문화제에서 우
리는 수어로 노래를 했습니다. 여섯 나라에서 온 엄마들이 한국 수어로 하나의 노
래를 표현한 거예요. 무대에 설 때는 많이 떨렸지만, 손으로 노래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 순간, 저는 더 이상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니었어요. 그냥
감정을 전하는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관객들이 손박수를 보내줄 때, 저는 눈물이 났어요. 정말 처음으
로 이 땅에서 ‘나도 이곳의 일부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11월에는 안산 수어
제에서 아이들과 같이 무대에 올라 대상을 받았어요. 아이들의 얼굴에 자랑스러움
이 가득했고, 저도 정말 기뻤습니다. 이주민 아이들은 종종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런데 수어를 통해 아이들은 ‘다름’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특별한 것이라는 걸 배웠어요. 아이들의 눈빛이 부드러워졌고, 친구들을 더 따뜻
하게 대하게 되었어요. 여섯 나라에서 온 엄마들과 함께한 이 경험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수어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언어였고, 누구도 먼저 잘하지 않았어요. 그저 같은 지구인으로, 손끝의 언어로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했어요. 우리는 ‘우리’와 ‘함께’라는 말을 손끝
으로 배웠습니다. 지구인 수어 합창단은 올해도 계속됩니다. 다른 피부, 다른 언어
를 가진 우리가 손짓으로 사랑을 전합니다. 말이 없다고 해서 마음이 없진 않다는
것,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깊은 소통은,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걸요.
2025.05.08. 지구인 수어 합창단 회장 전연
조회수 31
2025-05-09손으로 노래하는 지구인들
언어의 경계를 넘는 연대와 감수성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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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안산의 작은 다문화도서관에서 조용한 만남이 시작됐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여섯 명의 이주민 여성들이 '수어'를 배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말이 아닌 손짓으로, 목소리가 아닌 표정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이 특별한 언어는
곧 그들의 삶을 바꾸는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지구인 수어합창단은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활기차게 활동
중입니다. 처음에는 엄마들만의 모임이었지만, 곧 아이들이 합류하며 그 세계는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코스모스 활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어
린이 수어 팀으로 성장했습니다. 손끝으로 노래하고, 표정으로 감정을 전하는 과
정은 단지 공연을 넘어서, 정체성과 자존감을 키우는 특별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만난 또 다른 '낯섦'과의 교감
합창단의 구성원 대부분은 제2 언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주민 여성들입니다. 한국에 오기 전, 그들은 자국에서 당당한 한 명의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는 '이방인'이 되었고, 언어 장벽으로 인해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답
답함과 소외감을 경험했습니다. 식당에서 메뉴를 주문할 때, 아이의 학교 알림장
을 읽을 때, 병원에서 자신의 아픔을 설명할 때마다 느끼는 불안과 무력감은 그들
의 일상이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버스 타는 것조차 두려웠어요. 잘못 내리면 길을 잃을까
봐, 질문해도 못 알아들을까 봐...." 합창단의 한 회원은 회상합니다. 다른 회원은 "아이 학교에서 엄마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가기 싫었어요. 대화에
끼지 못하고, 때로는 다른 엄마들이 수군거리는 것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그들이 수어를 배우며 농인들과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소리의 언어' 안에서 느꼈던 소외감, 낯선 문화에 적응하며 겪는 불안은 농인의
세계와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감정은 닿아 있었고, 그 연대의
토대 위에 손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노래가 피어났습니다.
드디어 초청 무대에 오르다. 코로나 시기에도 합창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온라인 수어 경연대회, 뮤직비디
오 제작, 찾아가는 수어 교실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갔고, 2024년에는
경기도농문화제 수어 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
상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가 손짓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올해 4월 18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시흥시 초청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일
은 합창단에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농인을 포함한 관객 앞에서 손으로 노래하
며, 이주민과 장애,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기 때
문입니다. 한 회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대에 섰을 때, 내가 더는 '외국인'이 아
니라 '전달자'가 된 느낌이었어요. 우리의 손짓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차별을 넘어, 다름을 존중하는 공동체로
이주민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편견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언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지적 능력을 의심받기도 하고,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이상
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는 동등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더 적은
임금을 받거나, 승진에서 배제되는 일도 흔합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무시당하
거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아픔도 겪습니다.
"한번은 마트에서 계산할 때 직원이 나를 보지 않고 한국인 남편에게만 말을 걸
더라고요. 마치 내가 없는 사람처럼요." 합창단의 한 회원이 털어놓습니다. 또 다른 회원은 "아이 학교 상담 때 선생님이 나에게는 말하지 않고 통역해 준
한국인 친구에게만 이야기했어요. 내가 엄마인데도...."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험들이 지구인 수어합창단 구성원들에게는 농인들의 감정을 더 깊이 이
해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차별과 소외의 경험이 오히려 더 강한 연대 의식을 만
들어낸 것입니다. 수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들은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공통된 경
험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성장하는 값진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손짓으로 키워낸 다음 세대의 감수성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며 지금은 함께하지 못하지만, 그 아이들이
보여주는 높아진 장애인 감수성과 또렷해진 자존감은 코스모스 활짝 합창단이 남
긴 가장 큰 선물입니다. 어떤 아이는 수어를 통해 친구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만들
었고, 어떤 아이는 "장애인 친구가 생겼어요"라며 밝게 말합니다. 이주민 가정의 아이들은 종종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한국에 왔지만, 외모나 부모의 출신으로 인해 '한국인이 아닌' 취급을 받
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어 활동을 통해 이 아이들은 새로운 정체성과 자부심을 발
견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이 약점이 아닌 강점이 될 수 있음을 몸소 체험
한 것입니다.
지구인 수어합창단은 단순한 예술 단체가 아닙니다. 이들의 활동은 공감 교육이
자, 문화 다양성과 장애 감수성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실천입니다. 각종 수어 축
제와 행사에 참여하며 수어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무엇보다 '다름'을 존중하는 문
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2025년 1월 소년원에서의 봉사 공연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도 연대와 이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
니다. 이들이 손으로 노래하는 그 모습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인
가. 같은 언어를 쓴다고 다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이
해하고, 닿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지구인 수어합창단의 손짓은 오늘도 우리 사회
에 조용하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말이 아닌 마음으로, 손끝으로 이어지
는 이 노래가 더 많은 사람의 가슴에 닿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손짓 속에는 차별
과 편견을 넘어, 더 포용적이고 따뜻한 세상을 향한 꿈이 담겨 있습니다. ------------------------------------------------------------------ 지구인 수어 합창단 전연 회장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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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국에 처음 온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013년 2월, 추운 겨울이었어요. 바람이 차갑고 마음도 외로웠습니다. 모든 소리가 낯설고, 모든 글자는 마치 암호
처럼 느껴졌어요. 한국어를 배우려고 외국인지원본부에 다녔지만, 마음속에는 말
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다문화 작은 도서관’을
알게 됐어요. 지하 1층에 있는 그 도서관 문을 열었을 때, 전 세계 언어로 된 책
들이 저를 반겨줬어요. 특히 중국어 책이 많은 책장을 봤을 때, 저는 처음으로 이
곳이 조금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 자주 와요?”
도서관에서 일하던 중국인 언니가 물었을 때, 저는 웃기만 했어요.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따뜻했습니다. 그 도서관은 저에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도서관에서 여러 프로
그램에 참여하게 됐고, 2018년 5월 29일, 한국 수어 수업도 시작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그 수업은 제 인생을 많이 바꿔줬
어요. 수업에는 저처럼 다른 나라에서 온 엄마들, 또 한국 엄마들도 있었어요. 모두 책
과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무언가 배우고 싶은 마음도 같았어요. 그리고
또 하나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바로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느꼈던 경험이었습니
다. 매일 저녁, 도서관에 아이들 손을 잡고 엄마들이 들어왔어요.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달랐지만, 인사를 주고받는 손짓에는 차별이 없었어요. 손끝으로 “안녕하세
요”를 처음 배운 날, 저는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말로는 잘 못해도, 손으로는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감동이었어요. 수어를 배우면서 저는 농인들과 제가 비슷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수 언어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소외되고 외로운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몇 달 뒤, 우리는 ‘지구인 수어 합창
단’을 만들어 대회에 나가게 되었어요. 2018년 10월 6일, 경기도 농문화제에서 우
리는 수어로 노래를 했습니다. 여섯 나라에서 온 엄마들이 한국 수어로 하나의 노
래를 표현한 거예요. 무대에 설 때는 많이 떨렸지만, 손으로 노래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 순간, 저는 더 이상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니었어요. 그냥
감정을 전하는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관객들이 손박수를 보내줄 때, 저는 눈물이 났어요. 정말 처음으
로 이 땅에서 ‘나도 이곳의 일부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11월에는 안산 수어
제에서 아이들과 같이 무대에 올라 대상을 받았어요. 아이들의 얼굴에 자랑스러움
이 가득했고, 저도 정말 기뻤습니다. 이주민 아이들은 종종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런데 수어를 통해 아이들은 ‘다름’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특별한 것이라는 걸 배웠어요. 아이들의 눈빛이 부드러워졌고, 친구들을 더 따뜻
하게 대하게 되었어요. 여섯 나라에서 온 엄마들과 함께한 이 경험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수어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언어였고, 누구도 먼저 잘하지 않았어요. 그저 같은 지구인으로, 손끝의 언어로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했어요. 우리는 ‘우리’와 ‘함께’라는 말을 손끝
으로 배웠습니다. 지구인 수어 합창단은 올해도 계속됩니다. 다른 피부, 다른 언어
를 가진 우리가 손짓으로 사랑을 전합니다. 말이 없다고 해서 마음이 없진 않다는
것,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깊은 소통은,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걸요.
2025.05.08. 지구인 수어 합창단 회장 전연
조회수 37
2025-05-09
저마다의 자리에서 묵묵히 경기도 구석구석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며 소통과 공감의 가치를 일구어온 수많은 농인들과 청인들, 그리고 공익활동가들. 소리 없는 세상의 편견과 차가운 단절 속에서 “농 통역사로서 세상과 마음을 잇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깊은 울림의 질문 앞에 섰다. 방관과 외면의 장막을 깨부수고, 묵묵히 두 손을 모아 서로의 마음을 보듬으며 촘촘한 연대의 그물망을 엮어 온 ‘엄마의 메모가 들려주는 말 – 농 통역사 박수진의 이야기’의 눈부신 발자취를 깊이 들여다보다.
"우리는 과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개인이나 그 가족이 알아서 감내해야 할 사적인 불편일 뿐, 사회나 공공이 함께 나서서 다리를 놓을 일이 아니다’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차가운 방관의 장막을 걷어내고, 경기도 구석구석의 평범한 이웃들과 농 통역사들, 그리고 공익활동가들이 손을 맞잡으며 저마다의 진심으로 평화와 상생의 품을 엮어내는 ‘엄마의 메모가 건네는 온기를 통해 꽃피우는 수어 자치의 품’을 어떻게 활짝 열어갈 수 있을까?" 풀뿌리 수어 자치와 상호 존중적 소통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경기도 전역에 지속 가능한 상생과 평화의 숲을 깊이 일구어가는 감동의 여정을 깊이 조명한다.
방관과 외면의 장막을 허무는 ‘풀뿌리 소통 보장 및 자발적 수어 생태계 구축’
농인의 삶과 언어를 이질적이거나 특별한 배려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던 낡한 관행에서 벗어나, 경기도민과 공익활동가들이 동네 골목과 공공의 공간에서부터 직접 수어를 배우고 서로의 손짓에 귀를 기울이는 자발적 생태계 다지기.
"진정한 수어 자치의 완성은 거창한 복지 정책의 선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골목 작은 모임방에 모여 앉아 이웃들과 손을 잡고 엄마가 건네던 따스한 메모 속 진심을 나누며 서로의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소박한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철학 실천.
고립을 넘어 온기를 잇는 ‘시민 참여형 언어 감수성 및 연대 강화’
세상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겪는 단절과 오해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지역 사회와 공익활동 현장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지혜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공론장 창출.
"혼자서 거대한 침묵의 벽과 마주하면 막막하고 외롭지만, 경기도 도민들이 손을 잡고 함께 수어로 마음을 나누면 그 어떤 차별도 따스한 품으로 녹아내린다"라는 통찰.
경기도 31개 시·군 골목마저 평화와 소통의 그물망으로 잇는 ‘상생 수어 네트워크’
시·군의 경계를 뛰어넘어 경기도 내 농인 커뮤니티들과 도민들이 유기적으로 손을 잡고, 모든 이의 언어적 권리가 차별 없이 보장되는 상향식 민주주의와 시민 자치 실현.
"모든 도민과 이웃들이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공생의 무대" 완성.
도내 각지에서 모인 농 통역사들과 수어의 가치를 확산하려는 수많은 도민이 한자리에 모여 박수진 통역사의 깊은 이야기와 엄마의 메모가 담은 진심을 되새기고, 경기도를 진정한 '어떤 이의 목소리도 배제되지 않는 평화와 소통의 고향'으로 만들기 위한 지혜를 모았던 현장은 깊은 공감과 함께 뜨거운 연대의 온기로 가득 채웠다.
참가자들의 진솔한 고백 및 상생 나눔 세션: "세상에는 소리 외에도 마음을 울리는 수많은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이웃들과 손을 잡고 '서로의 손끝과 눈빛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자'며 온정을 나누니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진짜 따뜻한 온기가 내 가슴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히던 참가자들의 뭉클한 순간들.
경기도형 소통 자치 도시 확산을 위한 유쾌한 브레인스토밍: "동네마다 주민들과 농인들이 함께 모여 수어를 배우고 서로의 문화를 나누는 '우리동네 손빛 사랑방'을 상설화하자", "시민들의 따뜻한 손길을 모아 더 큰 소통의 망을 만드는 '경기 수어연대 네트워크'를 튼튼하게 꾸리자"며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내던 반짝이는 눈빛들.
응원과 다짐의 피날레: "비록 우리가 마주한 침묵의 파고와 편견의 벽이 때로는 높고 매섭다 할지라도, 경기도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이 지혜롭고 푸른 손끝의 온기들이 모여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바란다"며 환한 미소와 박수로 마무리된 연대.
세상을 바꾸고 진정한 시민 자치와 공생의 시대를 여는 위대한 힘은 차가운 복지 통계 지표나 거창한 정부의 정책 보고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 경기도의 좁은 만남의 장소와 골목길에서 이웃들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당신의 손끝을 우리의 온기로 읽어내며 평화롭고 다정한 내일을 함께 열어간다"며 따스한 온기를 건네는 평범한 시민들과 농 통역사들의 정직한 땀방울과 다정한 연대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방관과 외면의 장막을 걷어내고 경기도 구석구석에 평화와 소통의 숲을 영원히 일구어가는 공익활동가들과 도민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경기도 곳곳에서 피어나는 이 지혜롭고 푸른 온기들이, 모든 도민이 소외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경기도의 내일을 활짝 열어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조회수 3122
2025-04-17엄마의 메모가 들려주는 말 – 농 통역사 박수진의 이야기
수어 통역사는 손으로 말하는 사람들과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다
리가 된다. 한국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과, 한국어를 제1 언어
로 사용하는 청인 사이에서 그들은 단어와 표정, 침묵마저 언어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다리 위에 또 다른 다리가 존재한다면? 바로 ‘농(聾) 통역사’
이다. 공식 명칭은 ‘청각장애인 통역사’이지만, 현장에서는 농 통역사라
불린다. 이들은 청인 통역사조차 채 다 담아내지 못하는 농인의 삶과 언어, 그 미묘한 숨결을 대신 읽고, 대신 전한다. 농 통역사는 모든 농인을 위한 통역자이다. 왜냐하면 모든 농인이 수어를
완전하게 구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글로 대화하고, 어떤 이
는 입 모양으로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오직 눈빛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농인의 언어는 하나로 묶을 수 없다. 유년기의 언어 환경, 교육, 가족, 그리
고 농 사회와의 연결 여부에 따라 언어의 형태도, 깊이도 달라진다. 그래서
농 통역사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마음의 결을 어루만지는 소통의
안내자다. 그런 길을 걷는 한 사람, 박수진. 그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안산농아인협
회 간사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잃지 않은 한 명의 ‘나’다. 이
글은 장애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고, 성장의 기록이
며, ‘엄마’라는 말이 품고 있는 깊이에 대한 증언이다.

(안산 농아인 협회 간사 박수진)
나는 농아인입니다. 나는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입술로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내 삶을 고요하다고 생
각하지만,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울림을 들으며 살아왔습니
다. 그 울림은 언제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엄마’라
는 이름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한 번도 혼자라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
의 동생이었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빠의 손 편지, 아빠
의 눈물, 그리고 엄마의 수많은 메모. 말 대신 건네받은 글자들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스며들었고, 내 삶을 꿰뚫는 선이 되었습니다. 내가 두 살 무렵이었을 거예요. 말을 좀 늦게 배운다는 것 외에는 그저 귀
엽고 예쁜 막내딸이었어요. 어느 평범한 날, 나는 거실에서 놀고 있었고, 그
뒤에서 컵이 떨어졌습니다. 집 안은 순간 정적이 흘렀고, 모두가 놀란 눈으
로 나를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소리
를 듣지 못했던 것이죠. 그날 이후, 부모님은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를 받으셨고, 결국 의사의 입에
서 ‘청각장애’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부모님은 눈앞이 깜깜했
다고 해요. 저는 변한 게 없었지만, 세상이 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습니다.

(두 살 박수진님)
내 고향은 부산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방파제에 갔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어요. 바다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손이 내 쪽으로 뻗어왔고, 나는 그 손을 잡았어요.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안으시고, 이마를
맞대며 웃으셨어요. 그리고 천천히 방파제 아래로 걸어 내려갔죠. 나는 아
빠 품에 있어도 넘실거리는 파도가, 얼굴에 날리는 바닷물이 무서웠어요. 그 순간, 나는 입을 열어 처음으로 소리를 냈어요. “아빠.”
아버지는 저의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어
요.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앞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훗날 아버지
에게 물었어요. 그날, 방파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살아갈 앞날이 너무 걱정돼서... 바보처럼 같이 죽으러 간 거였다. 그런데 네가 '아빠'라고 불러서... 정신이 번쩍 들었지.”
아버지는 어린 내게 세상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병원
에 보내 구화 훈련을 시켰습니다. 휴지를 입에 대고 불어 찢는 연습을 매일
같이했어요. 휴지가 찢어지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었죠. 나는 그 시간
이 괴로웠고, 슬펐어요. 무언가를 말해야 했지만, 무슨 뜻인지 몰랐고, 들리
지 않는 소리를 흉내 내야만 했어요. 입술은 움직였지만, 마음은 굳게 닫혔
어요.
* 구화인
모든 청각장애인이 농인은 아닙니다. 유년기에 청각장애가 생긴 사람 중
1보청기·인공와우 등 청각 보조장치를 사용하거나, 대화 상대방 입술
의 움직임을 읽어서 상대방의 발화를 파악하고
2발성 훈련을 하여 음성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구화 인이라고
합니다. 구화인은 청능훈련·구화법·발성 훈련 등을 통해 한국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나는 생모의 손을 잡고 서울로 이
사했어요. 이유는 몰랐지만, 오빠와 함께 낯선 도시에 전학을 가게 되었죠.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고, 수업 시간은 고통이었어요. 청인들과
함께하는 수업 시간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저는 바보처럼 앉아만 있어
야 했죠. 하지만 쉬는 시간에는 달랐어요.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재미있게
놀았죠. 쉬는 시간만 기다리는 무의미한 학교생활,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
요.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적어 내라는 것에요. 저는 장래 희망이라는 단어
의 뜻도 몰랐죠. 가만히 앉아 있는 저에게 선생님은 직접 저의 장래 희망을
적었어요. ‘왕자님과 결혼하기.’
저도 모르는 저의 장래 희망은 왕자님과 결혼이 되었죠. 한글도 모르는 저
는 멍청히 앉아서 쉬는 시간만을 기다리는 학교가 그래도 좋았어요.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뛰어놀고, 청소하고, 다시 조용히 앉아 있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공부는 못했지만, 청소는 누구
보다 잘했죠. 그래서일까요. 선생님은 나를 안쓰럽게 여기셨고, 엄마와 상의
해 나를 농아학교로 전학 보냈어요.

(서울 농아학교 운동장에서)
농아학교는 내게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나처럼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다니! 처음으로 ‘같다’라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기숙사 생활도 즐거웠어요. 밤늦도록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얼
굴을 마주 보며 수어로 수다를 떨었죠. 나도 평범한 아이였다는 것을 그곳
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주말이면 집으로 갔어요. 보통
오빠가 데리러 왔죠. 어느 날 오빠가 저에게 묻더군요. “수진아, 돈 있니?”
저는 많지 않지만, 학교에서 주는 용돈이 있었어요. 가끔 용돈을 모아서
오빠에게 주곤 했죠. 나에게 돈이 있냐고 물었던 그날, 오빠는 며칠을 굶은
상태였어요. 엄마의 방임으로 오빠는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았어요. 저는 엄
마에게 부산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떼를 썼어요.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하면 보내주지 않겠죠. 그래서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꾀를 썼죠. 엄마는
마지못해 오빠와 저를 부산에 다녀오라고 허락을 해줬죠. 부산에서 만난 아빠는 우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어요. 그날 이후, 지루한
소송 끝에 오빠와 저는 아빠와 함께 살기로 했죠. 그때 제 나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어요. 그 당시 아빠는 대전에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대전 아빠 집
에는 처음 보는 언니가 있었어요. “이제부터 언니가 아니라 엄마라고 불러.”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닫았어요. 나에게는 이미 엄마가 있었으니까요. 그녀를 무시했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어요. 심지어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어
요. “그 언니가 날 괴롭혀.”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리가 터졌어요. 너무나 무서웠
죠. 화장실에 숨어 울고 있는 저에게 언니는 달려왔어요. 회사에서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저를 구해주셨죠. 생리대 사용법부터 모든 것을 알려주신
언니는 그날부터 저에게 엄마가 되었답니다.

(중학생 박수진 가족 사진)
아이를 낳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어
요. “엄마는 왜, 아이를 낳지 않았어?”
엄마는 내 곁에 누워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너희들을 본 순간 알았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하나님이
이미 두 명이나 아이를 주셨는데, 또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을까?”
제가 고등학생 무렵이었을까요? 버스 정류장에서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때, 곁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나에게 물
었죠.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니?” 제가 어눌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외국
인인 줄 알았나 봐요? 엄마는 정색하며 아주머니에게 말했죠. “제 딸이에
요.” 저는 분명 엄마의 입술에서 나오는 ‘제 딸이에요’라는 말을 읽었어
요. 그때 저도 “우리 엄마예요.”라고 이야기해야 했는데 못 했어요. 죄송
해요. 하지만 엄마의 ‘제 딸이에요’라는 말은 저에게 힘이 되었어요. 내
가 엄마의 딸이구나. 그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나의 엄마 그
리고 서울 엄마는 생모가 되었어요. 엄마는 수많은 메모와 편지를 내게 남겨주셨습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냉장
고에 붙은 메모가 반겨주었고, 서랍 안에는 언제나 손 편지가 기다리고 있
었죠. 내가 힘들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엄마는 어떻게 알았는지 편지를 남
겼어요. 그 글들은 내가 버리지 못한 사랑의 기록입니다.




내가 생각이 짧아서 엄마가 수어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 저는 싫다고 했
죠. 엄마가 수어를 알면 간섭과 잔소리가 더 심해질까 봐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철이 없었어요. 엄마와 수어를 함께 배웠다면 지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요. 그리고 엄마, 나는 한 번도 엄마가 나를
낳지 않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엄마는 언제나 나의 엄마였고, 엄마
의 메모 한 장, 편지 한 줄이 나를 살아가게 했어요. 내가 흔들릴 때마다, 엄마의 글이 나를 붙잡아줬어요. 그러니까 저에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엄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을
마칠까 합니다.

(20살 박수진 가족사진)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를 처음 만난 건 아마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예요. 그 시절
나는 엄마를 “언니”라고 불렀지요. 상봉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종종 아
빠 회사를 찾았고, 그때마다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시원한 물도 건
네주셨어요. 그런 순간들이 너무 좋아서, 나는 매번 엄마가 있는 그 공간을
향해 들떴던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어요. 그때의 나는 몰랐어요. 그 ‘언니’가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존재가 될 거라는 걸.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아빠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 ‘언니’가 어
느 날 갑자기 ‘엄마’가 되었을 때, 어린 마음에는 그 변화가 너무 낯설고
어색했어요. 좋아했던 만큼 당황스러웠고, 그만큼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몰라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내게
서 멀어지지 않았어요. 언제나 다정했고, 꾸준했고, 따뜻했어요. 나를 기다
려주고, 말없이 품어줬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말 자연스럽게 엄마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기억나요? 내가 흰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월경 자국이 묻은 줄도 모
르고 당황하며 집에 돌아왔던 날. 그날 엄마는 회사 일을 잠시 미뤄두고 나
를 향해 달려와 주셨어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정하게, 월경에 관해 이
야기해 주고, 나를 부드럽게 감싸안아 줬어요. 처음 겪는 몸의 변화에 놀란
나에게 엄마는, 생리보다 더 큰 따뜻함을 가르쳐주셨죠.
감기로 앓아누웠을 때도, 몸살로 말 한마디 못 할 때도, 엄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어요. 병원도 함께 가고, 약도 챙겨주고, 말없이 손을 잡아줬어요. 내가 엄마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던 시절, 엄마는 아마 많이 피곤했을 거예
요. 그런데도 엄마는 지친 내색 한번 없이 나를 안아줬어요. 그 모든 순간
에, 지금이라도 늦게나마 말하고 싶어요. 정말 고맙고, 정말 미안해요. 요즘 나는 다시 출근을 시작했어요. 아침마다 전쟁처럼 바쁜 하루가 시작
되고, 나도 정신없이 준비하면서 준혁이와 하나까지 챙겨야 하니 숨 돌릴
틈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문득 엄마가 떠올랐어요. 엄마도 예전에
출근 준비하며, 오빠와 나를 챙기고, 매일 아침 도시락까지 싸셨잖아요. 그
모든 걸 해내면서도 내 앞에서는 늘 웃어주셨던 엄마. 그때는 왜 몰랐을까
요. 왜 나만 힘들다고 여겼을까요. 요즘의 나는 많이 지쳐 있어요. 준혁이는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생이고, 하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라 여전히 손이 많이 가요. 남편은 직장을 옮겨 정신
이 없고, 나는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모든 것이 낯설고 버겁기만 해요. 그런데 그런 순간마다, 이상하게 엄마가 떠올라요. 엄마를 떠올리면 이상하
게 마음이 놓이고,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하는 용기가 생겨요. 그건 아
마, 내 안에 엄마가 주신 힘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겠죠. 엄마, 나를 그렇게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엄마에게 벽을 세울 때도, 뒤돌아설 때도, 엄마는 한결같이 다가와 줬어요. 그 사랑이 나를 사람으로
키우고, 지금의 엄마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나도 이젠, 엄마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시던 날, 내가 할머니
앞에서 약속했었죠. “할머니, 엄마는 제가 꼭 잘 챙길 테니까 걱정 마시고 편하게 쉬세요.”
그 약속, 변하지 않을 거예요. 어떤 순간에도 나는 그 약속을 지킬 거예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가는 동안 엄마는 내게 늘 멘토가 되어주었고, 따
뜻한 위로가 되어주었어요. 준혁이 키우며 막막했던 때, 조언해 주고 힘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우리 아빠요. 성격이 쉽지 않잖아요. 그런 아
빠 옆에서 묵묵히 함께해줘서, 아빠의 빈틈을 채워줘서, 정말 감사해요. 앞
으로는 엄마께 더 자주 안부 전화도 드리고, 더 자주 웃게 해드릴게요. 말
로만이 아닌 마음으로, 삶으로 효도할게요.
2025. 04. 05
사랑합니다. 우리 엄마.
덧붙이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조심스레 바라봅니다. 혹시라도 농아인을 향한 낯선
시선이 있었다면, 이 글을 통해 마음이 조금은 바뀌었기를 바랍니다. 농아
인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은 딸이고, 엄마이고, 아내입니다. 우리는 ‘소리
없이’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세상의 어떤 언어보다 깊고 진한 사랑이 있
습니다. 제 글에서 그 사랑을 느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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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