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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9월 13일 토요일, 시민기록자 양성교육 심화과정 5강 <기억을 걷다>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경기도교육청 4.16생명안전교육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고통스러운 기억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기억을 기록하는 것이 아주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죠. 심지어 인간의 정신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은 왜곡하여 기억하거나 아예 잊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왜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해야 하는 걸까요? 이것은 공익활동 아카이브 에디터인 제가 마음 깊숙한 곳에 품고 있던 질문이자 고민입니다. 물론 한 번에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이런 제 큰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얻은 기회였습니다.
     
    이미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분명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이 가슴 아픈 참사는 분명 아프고 잔인한 기억이지만 분명히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족과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 및 보존하고 있습니다.
     
    아픈 역사의 상처를 담고 있는 장소를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라고 하는데요. 잘 알려진 것으로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5.18 기념 공원이나 제주 4·3 평화공원 등이 이런 다크 헤리티지에 속합니다. 그리고 ‘단원고4.16기억교실’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곳의 운영은 4.16기억저장소 활동의 일부인데요. 4.16기억저장소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행동하기 위해 유가족과 전문가, 시민이 만드는 기억 공동체입니다. 이곳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기억과 기록을 수집, 관리, 전시 및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행동하라’라는 것입니다. 기억을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으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연결 짓기 위한 활동인 것이죠. 그리고 이 행동은 세월호 참사의 기억과 기록을 미래세대에 전달해 지속 가능한 안전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4.16 기억 저장소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4.16기억저장소는 차가운 바다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위로했던 노란 리본과 바람개비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기억과 기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배우기 전에 4.16 세월호 참사를 왜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상을 먼저 시청했습니다.
     
    영상을 시청하고 있는 모습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다크 헤리티지의 개념과 우리가 왜 이런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포함된 영상이었습니다. 이후에는 함께 희생자들이 머물던 학교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 둔 교실로 이동했습니다.
     
     
    4.16 참사 이전에 희생자 중 선생님들이 생활했던 교무실을 방문한 모습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4.16 참사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이 머물렀던 교실의 기록을 살피는 모습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4.16 참사 희생자들을 향한 방문자의 메시지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2층은 7반부터 10반까지, 3층은 1반부터 6반까지 있었습니다. 이 교실은 원래 있던 건물을 허물고 다시 증축한 건물인데요. 본래 단원고 학생들이 머물던 공간이 10개 반 형태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복원하고자 건물을 다시 짓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사물함, 교과서, 급식 표, 출석부 등 학교생활할 때 사용했었던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교무실도 건물의 벽, 뼈대, 바닥, 소모품인 형광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실 4.16기억교실에 있는 모든 것은 국가기록원에 국가 기록물 제14호로 등재 되어 있고 단원고 생존자, 희생자 학생들의 개인 기록물과 세월호 선체 인양 후, 배에서 나온 기록물 역시 제14-1호로 등재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물건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위치를 바꾸는 등의 일을 하면 절대 안 됩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돌아보면서 이 기록물들에 관해서 설명해 주신 분은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학생의 어머님이셨습니다. 당시를 누구보다 처절한 심정으로 겪어온 분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기억과 기록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그 기억을 나눔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이 참사에 대해 알고, 기억하고, 기록하게 되니 말입니다. 이곳에서는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생일인 희생자들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행사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직 부재를 인정하기 힘들어서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부모님들도 계십니다.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기억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여전히 현재처럼 이어지고 있는 일들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 역시 기록의 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억 교실을 돌아본 후, 임시 분향소가 있었던 곳과 세월호 참사 이후 단원고에 전해진 많은 이들의 위로와 응원, 애도의 흔적들을 찾아갔습니다.
     
     
    소생길(소중한 생명길)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단원고등학교를 방문하고 있는 모습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단원고등학교를 오가는 길에는 ‘소중한 생명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마을의 슬픔을 기억하고 희망을 찾기 위해서 2015년부터 고잔동 마을 주민과 단원고등학교 학생의 이야기를 모아서 겹치는 부분을 벽화에 담은 것입니다. 소중한 생명을 잃은 고잔동 마을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이 길을 걸으며 다시 한번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 당시 추모와 애도의 마음을 담아 전달한 목련 나무(왼), 4.16 세월호 참사 추모 조형물(오)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단체사진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단원고등학교에는 4.16 세월호 참사 추모 조형물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단원고에 애도의 뜻으로 전달한 목련 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록들은 단원고등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기록을 접하는 모든 이들이 안전한 사회를 향한 의지와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를 잊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4.16 기억 전시관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다음으로는 4.16 기억 전시관으로 향했습니다. 4.16 기억 전시관에는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4.16 기억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는 수강생들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4.16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작품들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이곳에는 자식들을 향한 부모들의 절절한 마음과,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의 아픔 그리고 떠나간 이들을 추억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차곡차곡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수강생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이 담긴 기록들 / 사진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기억을 걷다>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수강생들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기록에 동참하였습니다.
     
    <기억을 걷다> 프로그램은 수강생들 모두에게 왜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아픈 기억을 되돌아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기록은 계속해서 퍼지고 퍼져서 우리의 슬펐던 마음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발버둥 쳤던 용기를, 그리고 슬픔에 공감하며 눈물 흘렸던 서러움을 전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록을 통해서 희생자들은 잊히지 않고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슬픈 역사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슬퍼했던 이들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공익활동 기록의 소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의 소명은 비로소 기록을 열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았을 때 마무리되는 것이니까요. 노란 민들레가 흰 홀씨가 되어 퍼져가듯, 여러분의 마음에도 이 기록이, 그리고 4.16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닿기를 바랍니다.
    
     

     

     

    [현장스케치] 시민기록자 양성교육 심화과정 <기억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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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247

    202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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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호의 해린' 공연이 진행된 정조테마공연장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 마음을 여는 첫 울림
     
    무대 위 조명이 은은하게 번져가는 그 순간이었다. 막이 오르기도 전에 먼저 찾아온 것은 북소리도, 춤사위도 아닌, 따뜻한 목소리들이었다. 영상 속에서 흘러나오는 오랜 벗들의 인사말.
     
    "고생 많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 짧은 말속에 스며든 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함께 웃고 울었던 수십 년의 세월,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어온 험한 길들, 그리고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굿판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구나.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음의 장단이 벌써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공연 팜플렛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제1장 ― 신명, 그 첫 만남의 떨림
     
    첫 번째 마당, 진도 북놀이가 시작되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북채가 가죽을 때리는 그 순간, 마치 심장이 한 박자 더 뛰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장단이 울려 퍼질 때마다 객석의 모든 이들은 하나가 되어 몸을 흔들었다. 나 역시 어느새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고, 발끝까지 전해지는 진동에 온몸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1985년 경기대 풍물패 '얼마당'의 청년 이성호가 상상이 되었다. 스무 살 청춘이 처음 북채를 잡았던 그 떨리는 순간부터, 지금 이 무대에 서기까지의 40년. 그 긴 여정이 장단 하나, 하나에 스며들어 있었다. 풍물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숨결이자,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영혼의 다리였다. 그 인연이 이제는 무대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공연 팜플렛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제2장 ― 해린, 그 이름에 깃든 이야기
     
    지승 스님이 정성스럽게 지어주신 ‘해린’이라는 호에는 잔잔한 물결 위로 햇살이 반짝이며, 만들어내는 물비늘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파도와 햇살이 끝없이 춤추고 있는 것처럼 이성호에게 ‘해린’이라는 호는 어울렸다.
     
    두 번째 마당 소리굿에서 그는 정말로 해린 그 자체가 되었다. 거친 목소리에 실려 나오는 살아온 이야기. 풍물 굿패에서의 추억들, 민주주의의 거친 현장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풍물의 울림, 동지들과 어깨를 맞대고 춘 그 수많은 밤들을 보는 듯했다.
     
    소리 하나, 하나가 삶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당당하게, 때로는 그리움에 젖어 들었다. 무대를 채우는 공기마저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같았다. 굿은 단순한 흥겨움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살아온 모든 순간을 품고, 앞으로 걸어갈 희망을 노래하는 깊은 언어였다.
     
     
    공연 팜플렛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제3장 ― 예의 길, 사랑의 춤
     
    세 번째 마당 부포 춤이 시작되자, 나는 숨을 멈췄다. 하얀 부포가 공중에서 꽃잎처럼 흩날릴 때마다, 무대 전체가 환상적인 빛으로 물들었다. 부포는 살아있는 것처럼 춤췄고, 그 속에서 이성호라는 사람의 영혼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굿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그 소중한 가르침이 부포의 원을 그리는 궤적마다 새겨져 있었다. 예술(藝)의 길을 걸으면서도 사람을 향한 예(禮)를 잊지 않았던 삶. 기교를 뽐내기보다는 마음을 전하려 했던 춤사위.
     
    부포가 하늘 높이 치솟을 때마다 나의 마음도 함께 날아올랐다. 이것은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한 풍물꾼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깨달음의 결정체였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삶에 대한 다짐이었다. 객석의 모든 이들이 그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공연 팜플렛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제4장 ― 삶의 터, 함께하는 울림
     
    마지막 판굿이 시작되자 무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다. 함께 한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어 장단을 풀어내는 그 순간, 신명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이 판굿은 그저 흥겨운 마무리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너무나 깊은 의미가 스며들어 있었다.
     
    매향리의 그 메마른 땅에서, 대추리의 눈물 젖은 들판에서, 용산참사의 아픈 현장에서, 세월호의 차가운 바닷가에서…. 그 모든 곳에서 풍물은 늘 사람들과 함께 울었다. 억울하게 떠난 영혼들을 기리고, 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목소리 없는 자들의 외침을 대신했다.
     
    굿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었다. 삶이자 투쟁이었고, 위로이자 연대였다.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오는 장단 소리는 곧바로 광장과 거리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써 내려온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역사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판굿은 진정한 '삶의 터'였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공연 사진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 한 사람의 발자취, 모두의 기억
     
    공연 내내, 그리고 여운이 가시지 않는 지금까지도, 나는 이성호라는 사람이 걸어온 길을 떠올린다. 1988년 수원 민주 문화운동연합에서의 첫 발걸음부터, 문화공간 삶터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만남, 풍물굿 패 삶터에서 함께 만들어온 수많은 감동의 순간들.
     
    정월대보름마다 이어온 지신밟기, 겨울밤을 따뜻하게 만든 달집 축제, 새해를 맞이하는 해맞이 축제까지. 30여 년 동안 지역의 굿판을 이끌어온 그 모든 발자취가 오늘 무대 위에서 되살아났다.
     
    매향리와 대추리, 강정마을, 용산참사, 세월호 현장에서도 절대로 멈추지 않았던 풍물의 울림. 심지어 러시아, 일본, 베트남, 독일까지, 국경을 넘어서도 굿의 감동을 전해온 그 놀라운 여정.
     
    그의 삶은 예술이었다. 동시에 치열한 운동이었다. 무엇보다 사람과 함께 살아온 아름다운 연대의 역사였다. 그 모든 것이 오늘 밤 한 무대 위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공연 사진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 객석에서 흘러나온 진심
     
    공연 내내 객석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힘찬 박수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 무대 위의 주인공만큼이나 객석에 앉은 이들도 특별했다. 이성호와 함께 세월을 살아온 소중한 벗들, 같은 길을 걸어온 동지들, 그리고 그의 굿을 사랑해 온 모든 사람이었다.
     
    함께한 인연들이 보내는 뜨거운 눈물과 환호는 굿판을 더욱 벅차게 만들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이들이 하나의 큰 굿판 안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그 가운데 앉아 있던 나 또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뜨거운 울림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공연을 보았다'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경험이었다. 한 사람의 삶 전체가, 그 삶과 함께 해온 공동체의 소중한 기억들이,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일궈온 민주주의의 역사가 굿판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공연 후 인사 (위: 무대, 아래: 객석)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 늦은 깨달음과 새로운 다짐
     
    공연이 끝나고 여운에 젖어 있던 나는,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오늘 무대에서 풍물을 치던 그 사람이 바로, 수많은 현장마다 늘 앞장서서 함께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음을 기억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무지함이 부끄러웠고, 그런 나 자신이 미안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다짐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소중한 현장에서, 그와 함께 더 자주 마주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앞섰다.
     
    "굿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나금추 선생님의 그 소중한 가르침처럼, 이성호의 굿은 앞으로도 사람과 사람을 잇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며,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울리면서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는 더 평등하고 안전한 세상을,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며 살 것이다.
     
    그의 건강한 모습을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그의 굿이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심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굿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 이성호의 해린
    윤작가

    조회수 310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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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쑤~~” 민요나 판소리를 부를 때 자주 쓰는 추임새다. 흥을 돋우고 소리꾼을 응원하며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마법의 소리다. 안산에는 한 20년 “얼쑤!”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광폭 시민 활동가 얼쑤 김미숙의 일문일답 추임새를 들어 보자. “각자도생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로, 얼쑤!”
     
     
    후원하고 활동하는 단체 목록을 세어보니 26개더라. 조금만 소개해 달라.
     
    안산YWCA의 평생회원이자 현재 회장이다. 활동비를 받는 자리가 아닌 비상근 활동가다. 4.16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안산평화연대 공동대표, 안산 기후위기 비상행동 공동대표기도 하다. 오라는 데 많고, 가야 할 데도 많다. 사랑하는 4.16합창단 소프라노 단원, 시화호생명지킴이와 안산환경운동연합 활동가이자 강사이며 (사)안산공동체미디어 단원FM에서 환경 방송 ‘얼쑤의 얼쓰Earth’를 진행하고 있다.
     
    안산·시흥 지역 노동자들의 생활안정과 권익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사)일하는 사람들의 생활공제회 ‘좋은이웃’의 생활안정팀에서 오래 활동하고 있다. 올해는 캄보디아 노동자들과 만나 잔치 음식도 해 먹고 지지하는 만남을 6번 진행하는데, 8월에는 여행도 간다. 양계장에서 일하는 한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는 한 달에 휴일이 두 번뿐이다. 이동의 자유도 이웃과의 소통도 없다. 외부에서 병원균이 옮겨 와 닭이 조류독감에 감염될 수 있다는 이유다. 모임에서 뭐가 좋았냐 물으니, 올 때 전철도 타고 나무도 보고 자동차도 보고, 사람들과 얘기한 거라고 하더라.
     
     
     
    안산환경운동연합 활동사진(왼), 안산YWCA 활동사진(오) / 사진출처: 얼쑤
     
     
    단원FM 활동사진(왼), 4.16합창단 활동사진(오) / 사진출처: 단원FM, 4.16합창단
     
     
    단체 상관없이 제일 신경 쓰는 건 탈핵이다. YWCA가 2년마다 집중 과제를 선정하는데 10년 넘게 ‘탈핵’이 있다. 우리 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환경운동연합, 안산YWCA 등이 버스 한 대로 월성 원전 이별 퍼포먼스에 갔다. 후쿠시마 핵폭발 사고는 정말 무서웠다. 핵에너지가 안전하고 경제적이라 하지만 잘못된 정보다. 고장도 잦고 터지면 끝이다. 탈핵과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운동이 중요하다. 안산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에서는 작년에 발전 수익으로  사회 기여를 1억 원 했다. 발전 수익을 낼 수 있고,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 귀한 사례다. 그래서 안산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 홍보위원으로 활동하며 햇빛발전에 대해 홍보하고 조합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열심히 권유하고 있다.
     
     
    월성 원전 이별여행 / 사진출처: 얼쑤
     
     
    여성 단체 YWCA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아이를 낳고 나니 환경이 망가진 게 보이더라. 내가 배워서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무언가 기여하고 싶었다. 당시에 돌도 안 된 아기의 사교육을 위해 선생님을 집으로 부르는 주변 사람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와 직접 재미있게 놀고 싶어 아이를 안고 도서관, 서점, 미술관을 다녔다. 아이 교육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어 찾아간 게 YWCA였다.
     
    처음 권유받은 게 NIE(Newspaper In Education) 지도사였다. 당시 N.I.E.가 붐이었다. 신문을 활용한 교육 자료로 아이들의 생각을 키우는 활동이다. 심화 과정 수료 요건이 60시간인가 80인가 봉사 후 보고서 제출이었다. 5살 딸아이를 데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N.I.E. 교육 봉사를 했다. 2년, 3년 계속하니 ‘검증된 강사’ 소리 들으며 강의 요청을 받았다. 새로 문을 연 지역아동센터나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작은 도서관에서 봉사 수업을 하다 보니 입소문이 나고 점점 강사 경험이 쌓였다. ‘시화호생명지킴이’라는 단체도 찾아가 교육을 받고 지역에 봉사하게 되었다. 지금 내 주업이 강사다. 독서 강사, N.I.E. 강사, 환경 강사 등으로 영역이 넓어졌다.
     
     
    아이 잘 키우려던 엄마가 광폭 시민 활동가가 된 어떤 전환점이 있었나?
     
    4.16세월호 참사였다. 단체라고는 YWCA, YMCA, 시화호생명 지킴이, 환경운동연합 정도만 알다가 4.16 참사를 계기로 수많은 시민과 연결되었다. 안산에 연대하는 작은 시민단체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이상하게 여겼던 이 사회가 그래도 여기까지 굴러온 건 이분들 덕분이겠구나, 알겠더라. 시간이 되면 달려가 힘을 보태고, 행동하고 후원하게 됐다. 내 삶이 '각자도생'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로 전환했다.
     
    우리 집이 단원고등학교 근처 빌라 101호다. 302호가 단원고 2학년 4반 고 박수현 군의 집이었다. 2002년 3월에 이사 와서 제일 처음 사귄 이웃이 수현이 엄마 영옥 언니였다. 언니는 “배추전 먹으러 와.” “떡볶이 했으니 올라와.” 하고많은 날 우리를 불러주거나 음식을 갖다주었다. “밥이 똑떨어졌어, 밥 한 공기 줄 수 있어?” “언니 달걀 좀 주세요.” 이게 우리 일상이었다. 수현이가 고2 때 우리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외동인 딸에게 수현이는 가장 가까운 오빠요, 놀이 상대이었다. 수현이는 연년생인 누나의 가방을 들어주고, 밤이 늦으면 누나 마중을 나가는 동생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2014년 4월 16일, 집에서 컴퓨터로 N.I.E. 수업 자료를 만들다 인터넷 속보를 본 거다. 세월호와 단원고, 이걸 보는 순간 수학여행 간 수현이 생각이 나 바로 영옥 언니한테 전화했다. “걱정하지 마, 다 구했대. 그래도 다 젖었을 테니 깨끗한 옷 챙겨서 지금 형부랑 내려가는 중이야.” 그랬다. “너무 다행”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놀란 가슴에 배는 고픈데 먹고 싶은 게 없어 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먹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애들을 못 구했다는 거다.
     
     
    세월호가 내 이웃의 일이자 내 일로 연루되었군요.
     
    그날 아이가 학교에서 오길래 “수현이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모른대. 우리 같이 학교로 가볼까? 사람들이 모여 소식을 듣는 것 같아.” 말하며 단원고에 갔다. 4월 16일, 무사귀환을 간절히 바랐던 첫 번째 촛불 기도회로 4.16활동이 시작됐다. 멈출 수가 없었다. 영옥 언니가 진상 규명이라든가 서명 활동을 계속하니 나는 뭐라도 언니를 도와야 했고 돕고 싶었다. 참사 4일째, 남편과 아이랑 셋이 진도 체육관에 갔다. 영옥 언니와 은희 언니와 유가족이 된 지인들을 보았다. 두 언니는 당시 내 인생의 롤 모델이었다. 울고 소리 지르고 쓰러지고, 민간 잠수사가 어떻고, 왜 찍어, 카메라 뺏고, 막 드잡이하고, 그걸 다 보았다. 사복 경찰이 진짜 많았다.
     
     
    얼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 사진출처: 얼쑤
     
     
    감히 그분들만큼 큰 아픔, 슬픔에 빠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 슬픔을 같이 겪었다. 너무 끔찍한 세월이었다. 영옥 언니가 진도에 계시면서, “뉴스에서 나오는 거 저거 다 거짓말이야”라며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뜨거운 폰을 얼마나 눌러댔던지 오른쪽 집게손가락이 아파서 아직도 잘 못 쓴다. 소식을 전하는 과정에서 거의 20년 가까이 지낸 지인하고 의절하는 일도 있었다. 참사 후 며칠 안 돼서 노란 리본 이미지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쓰는데, 저작권에 걸린다고 1인당 몇백만 원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딸 학교 보내기 전에 노란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주고 뒤통수를 찍어서 그걸 지금까지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있다. 못 바꾸겠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세월호 참사는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군요?
     
    그렇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언니와 함께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했다. 대학을 왜 가는지 몰랐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갔더라면 더 일찍 진보적인 사상을 접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텐데, 모르고 살아 너무 안타깝더라. 나는 부당한 일을 보면 조용히 떠나는 식으로 살았다. 일만 하다 결혼했고, 아이 낳고서야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는 거리를 둘 수 없는 내 일이었다. 우리 애는 수현이네 집에서 먹고 놀기 좋아했다. 오빠 놀아 줘, 하면 수현이는 뭐 하고 놀까, 물어보며 다리에 미끄럼을 태워주는 오빠였다. 수현이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유치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커서 오빠랑 결혼한다고 했다. 수현이가 부모님에게 무언가 사 달라고 하면 “넌 1층 장모님한테 가서 얘기해라” 놀림받을 정도였다. 그런 수현이가 우리 곁을 떠나 너무 안타까웠다.
     
     
    참사가 아이한테도 큰 영향을 미쳤을 거 같은데 괜찮은지?
     
     
    2014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단식농성장을 찾은 얼쑤 가족 / 사진출처: 얼쑤
     
     
    아이가 한동안 수현이를 입 밖에 못 내더라. 딸은 모태신앙이었는데 참사 후 하나님은 없다 했다. 수현이 오빠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거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수업 중에 자꾸 다른 책을 읽었다. 왜 그러느냐니까 “내일 죽을지도 모르잖아. 지금 안 읽으면 모르고 죽잖아.” 그랬다. 수현이 오빠를 며칠 만에 찾았냐 하길래 일주일쯤이라 했더니, 배 안에서 하루만 살고 죽었으면 좋겠다더라.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럽고 무섭고 춥고 보고 싶고 그랬겠냐고. 딸아이는 여주로 고등학교를 갔는데, 어느 날 택시 기사가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안산이라 했더니 ‘세월호!’ 라며, “말 잘 듣는 애들은 가만히 있어서 다 죽고, 말 안 듣는 애들만 살았다”라고 하더란다. 아이가 “그 기사를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라면서, 그 자리에서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세월호의 기억은 여전히 아이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있었다.
     
     
    시민 활동가로서 바쁜 중에 4.16 합창단 활동도 한다.
     
     
    4.16합창단 공연장에서 얼쑤 가족(왼쪽부터 친언니 만주벌판, 얼쑤님 어머니, 얼쑤)과 단원고 2학년 5반 이창현 군 엄마 최순화님 / 사진출처: 얼쑤
     
     
    4.16합창단이 생길 때부터 마음이 갔는데 몇 년 전에야 결합했다. 친언니 ‘만주벌판(별명)’도 단원이다. 좋은 목소리와 건강한 정신을 주신 엄마도 합창단 행사로 자주 본다. 아픔이 있는 곳에서 노래로 폭넓게 연대하니 참 좋다. 최근엔 전태일 의료 센터 건립을 위한 공연도 했다.
     
     
    현재 가장 마음 쓰는 활동이나 고민도 좀 나누자.
     
     
    2025 안산YWCA 김미숙 회장(얼쑤) 취임식이 진행되었다. / 사진출처: 얼쑤   
     
     
    아무래도 YWCA 회장이라는 중책이 마음 쓰인다. 지금 회원 증모 기간인데, 이걸 내가 잘 못한다. 대신 남편이 평생회원에 가입하게 했고, 내년에 우리 딸 돈 벌면 평생회원 가입시키려 한다. YWCA는 기독청년여성회(Young Women Christian Association)이다. 나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이 왜 필요한가, 계속 질문한다. 내가 나가는 교회와 한국 기독 교회들이 정말 예수를 따르는지, 세상의 빛과 소금인지,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을 때 함께 좋아해 주는가, 의심스러웠다.
     
    남편은 교회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내가 “왜 교회를 비판하지 않아?”라고 하면 그는 "나는 좋은 것만 들으려고해, 부분적으로 동의되지 않는다 해서 굳이 기분나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라는 식이다. 답답함을 느끼지만, 그 말이 또 틀린 건 아니다. 나는 일부 교회가 없어져도 된다고 본다.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게 아니니까. 헌금도 교회 말고 사회로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인데, 남편은 다르다. 그가 우리 가정의 주 수입을 담당하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내 수입은 사회로 12조 13조도 낸다. YWCA가 있어서 사회 정의나 연대의 갈증이 해소되고 내 신앙을 이어가는 거 같다.
     
     
    YWCA 활동가로서 정체성을 좋아하는군요?
     
    그렇다. 7월 초 YWCA 신입 직원 교육이 있었다. 작년에 못 해서 올해 교육 대상이 꽤 많았다. 사람들은 삼성이나 SK에 입사 지원할 때 그 회사에 대해 공부한다. 그런데 모 법인에 대해서는 모르고 오는 사람이 태반이다. 회장으로서 YWCA의 100년 역사와 안산YWCA의 40년 역사를 강의하며, “YWCA를 알고 나면 내가 참 좋은 기관에서 일하고 있구나, 자부심을 느낄 거예요.”라고 말해 줬다. YWCA가 교회는 아니지만, 이젠 교회보다 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목소리와 행동을 계속해야 한다.
     
     
    안산YWCA 소속으로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연대활동을 하고 있는 얼쑤님 모습 / 사진출처: 안산시민사회연대, 4.16안산시민연대
     
     
    YWCA 회장으로서 자부심 뿜뿜인데, 어려움은 없는지?
     
    역사 인물 최용신 선생은 안산의 자랑이자 YWCA의 자랑이다. YWCA에서 공부하고 농촌 계몽 운동(을) 하셨는데, YMCA로 아는 사람들이 있더라. 최근에는 내가 어느 단체에 가니 안산 YMCA에서 오신 얼쑤라고 소개를 해서 ‘YWCA’라고 바로잡곤 한다. 최용신 기념관 관련 기사에도 몇 년에 한 번씩 YMCA라고 나온다. 재작년에도 메일로 항의했다. 시에서 발행한 책자도 스티커로 다 수정하게 한 적 있다. 남성이 디폴트인 사회라 여성 단체를 더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얼쑤 / 사진출처: 얼쑤
     
     
    ‘회장님’, ‘이사님’ 호칭 보다 ‘얼쑤’가 좋다. 사람들은 ‘얼쑤’ 말고 ‘회장 김미숙’을 쓰라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야 어쩔 수 없지만, 활동가로서는 ‘얼쑤’가 편하다. 지금까지의 내 활동을 보고 “대단하다, 기왕이면 학위를 좀 업그레이드해서 더 많이 강의하고 돈도 더 받아봐”라고 말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러면 지역에서 적은 돈만 줄 수 있는 데서 누가 활동하나.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더러는, “왜 그렇게 활동이 많냐", “정치할 거냐” 한다. 정치하란 말은 10년 전부터 들었지만, 내 대답은 같다. 너무 열심히 하다 병나서 죽을 거라고. YWCA 회장만으로도 ‘거룩한 부담감’이 큰데 더는 아니다.
     
    효순이 미선이 저금통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우리 딸이 재작년엔가 “엄마 생일 선물 뭐해줄까?” 하다가 “엄마는 물건은 안 좋아하니까 엄마 이름으로 기부해 줄게.” 그러더니 효순이 미선이 평화공원 짓는 데 딸이 5만 원을 기부해 준 적 있다.
     
    그때그때 마음 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위해, 내 할 만큼만 한다.

    

     
     
     
    “회장님”보다 활동가 “얼쑤”가 좋아요!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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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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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2일 목요일 오전 10시. 더함 파크에서 열린 공익활동가 학교 전문가 과정 입학식에 다녀왔습니다. ‘공익 활동’이라는 단어는 익숙했지만, 뒤에 붙는 ‘전문가’라는 말에 저는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생겼는데요. 공익 활동의 전문가 과정이란 어떤 프로그램일지,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분들은 어떤 분들일지 궁금한 마음을 안고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었던 것은 ‘공교히’라는 단어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보통 ‘공교롭다’라는 말로 익숙한데요. ‘공교히’는 이번 공익활동가 전문과정의 메인 키워드이자 익활동가 육에서 망 찾자”의 줄임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밑에 적혀있는 말풀이가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우연히 일어나다.’는 뜻 외에 ‘솜씨 있고, 실력 있다.’라는 또 다른 뜻이 있다는 건데요.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중의적으로 사용하여, ‘성실한 노력으로 솜씨 있고 실력 있는 수준에 올라서면, 생각지도 못했던 (바라던) 일이 우연히 일어난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마음속으로 잔잔한 울림을 느끼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도 떠올랐는데요. 전문가 과정을 앞두고 공익활동가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로이 한다는 의미에서 정말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대의 말을 전하는 유명화 센터장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곧 입학식이 시작되었는데요. 먼저 경기도 공익활동 지원센터 유명화 센터장님이 따스한 환대의 말로 활동가들을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그토록 염원했던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맞이할 수 있어서 기쁘지만,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던 문제들이 수면으로 올라오는 것 같다.’며, 공익활동가들의 앞으로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당부와 기대도 잊지 않았습니다.
     
     
     
    아이스브레이킹 시간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이어 참여자 간의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이 이어졌는데요. 각자 오면서 이 자리에 가지고 온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물음표, 느낌표, 졸지 않겠다는 마음, 아파도 꼭 참여하겠다는 굳은 의지 등등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육에 임하는 각자만의 진지한 각오가 엿보여, ‘공익활동 전문가’라는 말에 어울리는 분들이 이곳에 모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강의 주제는 <공익활동 조직 내에서 만나는 인권 감응성>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인권교육센터 '들'의 배경내 강사님은 먼저 ‘인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대체 인권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서요.
     
     
     
    <공익활동 조직 내에서 만나는 인권 감응성>이라는 주제로 배경내 강사의 강연이 진행되고 있다.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공익활동이란 세상의 문제를 발견하고 개인이 아닌 모두에게 도움이 될 변화를 시도하는 활동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세상의 문제를 발견하는 것, 즉 세상을 읽기 위한 필수적인 문법이 바로 인권입니다”
     
    배경내 강사님은 먼저 재난 참사를 대표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가 재난 참사에 대해 생각할 때 단순하게 ‘우연히 발생한 사고’,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 ‘불가항력’ 정도로 알고 있지 않냐고, 그리고 바로 그러한 생각에는 ‘재난 인권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재난 인권 감수성’이란 재난이 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재난이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재난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변화해야 하는지를 읽는 역량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재난 참사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참사이기에, 재난은 ‘인재’라고 불러야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하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인재 대신 ‘관이 만든 재난’, ‘기업 재난’ 등 그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하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배경내 강사님이 제시한 두 번째 예시는 한때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주호민 작가의 이야기였습니다. 단순하게 자폐아의 부모와 특수학교 선생의 갈등과 대립으로만 보면, 이 문제는 결국 서로를 향한 혐오, 그리고 상처와 2차 피해만이 남겨지게 될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볼 때 그 너머의 문제를 바라봐야 하며, 그것은 환경과 구조의 문제. 개개인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갈등 상황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시스템의 문제임을 읽어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의 근원을 읽어내는 힘, 그것이 바로 ‘인권 감응성’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인권교육을 처음 듣는 저에게도 너무나 깊이 와닿았습니다. 어느새 취재를 왔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강의에 몰두하게 되었죠. 그동안 자극적인 뉴스로만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사건들이 떠오르며, 그 이면에 있을 각자의 사연들이 제 사고의 문을 두드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권 감응성'으로 살펴보는 조별 활동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2부는 각자의 조직 안의 문제를 ‘인권 감응성’이라는 시각으로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조별 활동으로 커다란 전지 위에 자신이 생각하는 조직 내의 문제를 떠올려 적어보는 그런 시간이었죠. 1부를 통해서 평소에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약간의 불편함으로 잊고 넘겨버렸던 것들을 떠올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활동가들 모두가 비슷한 환경에서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들이었기에 이야기들은 술술 흘러나왔습니다.
     
     
    조직의 문제 찾기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이어 조별로 각자 적었던 조직 내의 문제들을 발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두드러졌던 것은 ‘ 고쳐지지 않는 서열 기반 문화’, ‘업무와 비업무시간의 구분되지 않음’ 등이었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공감했던 것은 ‘대표자 혹은 핵심 인물에게 모든 정보가 집중되는 현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정보는 권력으로 이어지기에, 정보의 독점은 곧 권력의 독점과 같은 이야기였고, 그런 사람에게 반대 의견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의견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만약 그 사람이 나가기라도 하면 그 사람에게 집중되던 자원들이 모조리 사라져서 조직의 존속 자체가 어려워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별 발표 및 토론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모두가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그동안 활동하면서 쌓아왔던 이야기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열띤 토론의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그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만 생각했던 것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문제인 줄 몰랐던 일들이 ‘인권 감응성’이란 틀로 바라보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된 공익 활동을 위해서는 우리 내면의 문제부터 다시 들여다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말이 되고 다짐이 되어 오갔고. 활동가들의 얼굴에서는 후련함과 비장함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취재원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공익활동가 전문가 과정 입학식. 솔직히 앞으로 수업을 듣게 될 활동가분들이 너무 부러워지는 시간이었는데요. 앞으로의 탄탄한 강의 그리고 토론과 소통을 통해 졸업식을 맞이할 활동가분들이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현장스케치] 공익활동가 학교 전문가 과정 입학식 “인권 감응성으로 세상을 읽다” 
    마시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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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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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키비스트, 이제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죠.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는 6월 한 달간 4회에 걸쳐 경기시민사회 공익활동 아키비스트 양성과정을 마련했습니다. ‘공익활동 아키비스트’란 공익활동 자료 수집 및 보존을 통해 가치를 확산하는 활동가를 말합니다.
     
    경기도 전역의 활동가와 도민 대상이기 때문에 강의는 의정부와 수원을 오가며 진행되었습니다. 센터 북부에서 진행된 1-2차시에는 (협)아카이빙네트워크연구원 손동유 원장을 모시고 공익활동 아카이브의 이해와 방법, 특히 구술 아카이브에 대해 들었습니다. 한국저작권보호원 이선민 변호사를 통해 저작권 관련 내용도 배웠습니다.
    

    아키비스트 양성과정 웹자보 / 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공익활동을 위한 아카이브 활용법
     
    저는 경기도여성비전센터 나혜석홀에서 진행된 3차시에 참여했는데, 잠시 그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5번째 강의를 맡은 분은 한국외대 정보기록학연구소 겸임교수이신 김태현 강사님입니다.
     
    ‘우리는 기록의 민족’이라는 얘기로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199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하지만 일제의 역사 말살에 많은 기록이 유실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실제로 아카이브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두루 쓰이게 된 것은 2000년대 이후라네요.
    
     
    3차시 강연 / 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기록과 콘텐츠와 아카이브의 관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역사의 경험을 기억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기억을 기록함으로써 과거를 수집하고 현재를 생산하여 미래를 준비합니다. 즉, 기록은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액션입니다. 이 기록에 서사를 입혀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면 콘텐츠가 됩니다. 기록을 인과관계로 배열한 것이 콘텐츠라면 상관관계로 배열한 것은 아카이브입니다. 아카이브는 논리적인 시스템으로 기록을 데이터베이스화합니다. 이 세 가지는 구분되면서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억을 기반으로 세 가지 개념이 상호 연결될 수 있는 게 바로 시민사회의 일상사 영역이라고 교수님은 설명합니다.
     
     
    기록의 수집과 생산
     
    기록의 수집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멈춤 기능’이 있습니다. 멈춤 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어떤 내용을 수집할 것인가?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 기록을 모으는 방식도 중요한데 저인망식 무작위 수집보다는 주제를 가지고 수집해야 훨씬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창고에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을 창고에 넣어놓기만 해도 일단 없어지는 일은 막게 되죠. 더 나아가 그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어떤 물건이 창고 몇 번째 선반에 있는지 정리해 놓는 게 아카이브이고, 그 노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아키비스트입니다.
     
     
    콘텐츠와 아카이브로 활용된 사례들
     
    강의 후반부에는 기록이 하나의 주제에 따라 콘텐츠로 재탄생한 사례들을 소개했습니다. 모두 교수님이 직접 진행한 프로젝트인데요, 그중 몇 가지만 추려봅니다.
    
     
    6.10민주항쟁 30주년 기념전 <1987, 우리들의 이야기> 포스터와 디지털 콘텐츠 /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10민주항쟁 30주년 기념 전시회 <1987, 우리들의 이야기>는 박종철 열사 하숙집 아주머니, 시내버스 운전기사 등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캐릭터 작업을 거친 보통 시민 30명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한 것입니다. 수채화로 그려낸 서울시청 일대가 인상적이죠? 전국 순회 전시회와 함께 오마이뉴스를 통한 웹 전시회도 병행했습니다.
    
     
    
    증평기록관 개관 전시 <증평, 첫 번째 기억> 전시실과 주제 아카이브 / 출처: 증평기록관
     
     
    증평은 기록 분야를 줄곧 앞서가는 지자체인데요. 2020년 증평기록관 개관 전시 <증평, 첫 번째 기억> 이래로 훌륭한 기획의 전시가 계속됩니다. ‘주간 증평’이라는 디지털 주제 아카이브도 흥미롭습니다. 기록관의 보수적 풍토를 뒤엎고 힙한 형광색을 메인 컬러로 고집하여 결국 온 마을을 핫핑크로 물들였다는 일화가 재미있네요. 증평기록관 콘텐츠는 유튜브에 다양한 쇼츠로도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JPArchives)
    
     
    
    세월호 참사 1주기 기억 전시 <아이들의 방> 포스터와 디지털 콘텐츠 / 출처: 4.16기억저장소
     
     
    세월호 참사 1주기 기억 전시 <아이들의 방>은 죽은 이의 물건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깨고 주인 잃은 방을 사진과 글로 남겼습니다. 전시회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오스트리아 시골 라디오에서까지 인터뷰 요청을 해왔습니다. 규모가 어떻든 메시지가 강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찾아온다는 걸 확인했지요. 처음에 공개를 거부했던 유족들도 마음을 돌려서 2015년 61개였던 방이 지금은 200개 가까이 열렸습니다. 오마이뉴스 디지털 콘텐츠에서 그 아이들의 방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Event/416memory/index.aspx)
     
     
    아카이브도 브랜드가 되는 시대
     
    한때 외래어 대신 기록은행이라는 말을 사용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카이브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교수님이 어디 가든 첫 번째 받는 질문은 ‘기록관이 뭐냐’는 질문이랍니다. 누구나 아는 도서관처럼 더 이상 이 질문이 안 나오는 날이 곧 오겠지요.
     
    그러려면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아카이브의 주인이 누구인가? 지금껏 역사 콘텐츠에서 스스로 주인이 된 적이 없었던 시민들이 목적의식을 갖고 풀뿌리 방식으로 아카이브의 주권자가 될 때 아카이브는 브랜드가 됩니다. 12.3 비상계엄 아카이브도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갈 것입니다.
     
     
     
    
    공익활동 아키비스트 양성과정 3차시 단체사진 / 출처: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강의를 마치고 수강자 두 분의 소감을 살짝 들어보았는데요.
     
    “저는 다산인권센터 자원활동가이고 지금은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카이빙 활동을 해보려고 신청했는데, 앞선 강의들에 비해 이번 강의는 조금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아카이빙과 실제 아키비스트로서의 아카이빙이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욕심도 더 들었어요.” (다산인권센터 듬솔)
     
    “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2027년이면 30주년이에요. 선배님들이 그동안 쭉 해오셨던 것들을 정리해 보고 싶어서 온라인 아카이빙을 고민하는데, 오늘 구체적인 예시로 실무 얘기를 해주셔서 가닥이 좀 잡히고 주의할 점들도 도움이 됐습니다. 저희가 몇 년 전 ‘숲과 나눔’ 재단 통해서 기록물을 1천 건 이상 온라인에 올려놓긴 했는데, 단순히 창고여서는 안 되고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이걸 가공해서 뭔가 다른 가치를 창출해 볼까? 그런 아이디어를 오늘 많이 얻게 돼서 30주년 때는 뭔가 좀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 사무차장 이동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생각나네요. 구슬 한 알 한 알이 기록이라면 그 구슬들을 꿰어 만든 목걸이나 팔찌는 콘텐츠, 구슬의 아름답고 일정한 패턴은 아카이브쯤 될까요? 그중 독창적이고 고유한 스타일의 목걸이는 뜨거운 반응을 얻고 하나의 브랜드로 거듭나겠죠. 양성과정을 수강하는 분들 모두 자기 브랜드를 가진 보배 같은 공익활동 아키비스트가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얼마 전 개관한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떠나게 될 마지막 4차시 현장 탐방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현장스케치] 공익활동 아키비스트 양성과정 3차시_기록을 콘텐츠로! 아카이브를 브랜드로!
    참비움

    조회수 677

    2025-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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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한 말이다. 5.18민주화운동 이야기인 《소년이 온다》를 쓸 때 그와 함께 한 질문이라 했다. 그 책을 쓰는 동안만의 질문이었을까. 지난 5월 17일(토) 광주의 5.18전야제를 다녀오는 동안 내게도 살아 있는 질문이었다. 과거가 현재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45년 전의 광주가 오늘 대한민국을 구하고 있었다. 총칼이 아니라 노래와 시로, 춤과 연극으로 연대하는 민주주의 대축제였다.
     
    부끄러운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1980년 5월에 나는 대구에 사는 여고 2학년이었다. 당시 TV 화면에 나오는 광주는 ‘폭도’와 ‘빨갱이’의 도시였다. 대학생이 된 후에도 광주는 두려운 ‘벽’이었다. 독재와 냉전 시대 교육에 길든 아이가 광주의 진실을 마주하기까지는 20년이 더 걸려야 했다.
     
    제45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로 올해도 광주를 다녀오는 복을 누렸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4.16합창단으로서 ‘민주주의 대합창’ 공연에 서는 덕분이었다. 구묘역 신묘역을 방문하고 5.18민중항쟁기념행사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전야제도 즐길 수 있었다. 올해는 18일 밤까지 1박 2일로 확대 진행된 전야제를 하루만 보고 돌아온 게 아쉽다. 5.18 민주 광장, 동구 금남로 1~3가 차 없는 거리, 동구 중앙로 일대는 시민 참여 부스 물결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질 때마다 누구라도 목청껏 함께 부르는 축제였다.
     
     
    행사장 일대 사진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다시 만난 소년, 아! 오월이여
    17일(토) 오전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된 추모식부터 소개하고 싶다. 안산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구묘역을 들르고 신묘역에 도착했을 땐 5·18민주유공자유족회가 주최 주관하는 추모식은 끝나고 있었다. 식전 공연으로 놀이패와 장애인 예술단의 공연이 있었고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전통 제례 의식을 마친 전통 한복을 입은 분들을 볼 수 있었다. 2부 순서인 국민의례로 시작하는 추모식(10시 30분)은 내빈 소개, 추모사, 유가족 대표의 인사가 있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과 헌화와 분향이 있었다.
     
    추모식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순서는 ‘다시 만난 소년, 아 오월이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5·18민주화운동 추모 시 낭송 퍼포먼스’였다. 광주시낭송협회 사람들이 5·18 광주 추모 시를 모아서 한 편 한 편 낭송하는 공연이었다. 오월 광주를 추모하되 시와 음악으로, 피로 쓴 민중항쟁의 역사가 노래와 시로 살아나는 시간이었다.
     
    이창병의 ‘망월동에서’ 첫 자락을 보자. “광주 금남로에서/ 이 나라 최후의 거리마다 쓰러진 넋들의 통곡은/ 우리들의 침묵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고정희는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라고 읊었다. 김준태의 ‘오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는 광주일보(구 전남일보) 1980년 6월 2일 자 조간 1면에 실렸던 시다. 계엄 당국의 검열에 기자들이 사표로 저항한 그 시였다.
     
     

     
     
    “우리는 사람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신문에는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45년 전 전남일보 기자들의 그 절규가 시로 다시 살아나는 시간이었다. “끝나지 않는 오월 다시 찾은 민주주의 당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80년 오월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날을 잊지 않겠습니다.” 시와 노래로 하는 기억의 다짐이었다.
     
     
    민주주의 대축제 대합창
    3부로 구성된 민주주의 대축제 5·18전야제는 지정남 배우가 진행했다. 1부 ‘오월광주 환영대회’는 오월길맞이굿을 시작으로 금남로에 집결하는 수만 명의 민주 평화 대행진 대열을 노래와 춤으로 환영하는 행사였다. 2부는 ‘민주주의 축제’로 뮤지컬과 노래로 꾸며지고 3부는 ‘빛의 콘서트’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비롯한 노래 밴드들의 무대였다. 전야제 중앙무대는 금남로 4가역 교차로에 설치되고 양방향으로 여러 개의 대형 스크린이 있었다.
    내가 416합창단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 대합창’ 공연은 17일(토) 오후 3시 반에 시작했다. 5.18민주광장에 마련된 특설무대에서였다. 서울 부산 안산 광주 등에서 온 7개 시민합창단이 개별 공연으로 두 곡씩 부른 후 대합창단으로 함께 두 곡을 불렀다. 광주는 광주였다. 7개 합창단 중 푸른솔합창단, 1987합창단, 광주흥사단합창단 3개가 광주 소재 합창단이었다.
     
     
    박종철 합창단(부산) / 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1987합창단(광주) / 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7개 민주주의 합창단이 함께 대합창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출전가'를 불렀다. / 사진출처: 4.16합창단
     
     
    푸른솔합창단(광주): 2015년 6월 ‘합창’을 통해 민주 인권 평화로 상징되는 ‘광주정신’을 전달하고, ‘광주공동체’의 희망을 노래하고자 창단했다. 2017년, 2018년 창작 뮤지컬 ‘빛의 결혼식-임을 위한 행진곡’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615시민합창단(서울): 2009년 8.15행사 공연을 시작으로, 민족의 역사와 겨레의 삶에 수많은 아픔을 안긴 분단 장벽을 허물고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의 새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창단했다.
    1987합창단(광주): 광주 전남의 1980년 5.18민중항쟁의 불꽃을 1987년 6월 항쟁의 횃불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헌법을 쟁취한 그 뜻을 노래와 합창으로 계승하고자 2018년 창단했다.
    광주흥사단합창단(광주): 191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민족운동 단체 흥사단. 독립운동, 대한민국의 민주화, 청소년 계몽, 육성 운동으로 2017년 3월 창단, 형화와 자유를 노래한다.
    박종철합창단(부산):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와 6월 항쟁의 정신을 기리고, 시민문화운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자 2016년 8월 16일 창단했다.
    416합창단(경기 안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 일반 시민으로 2014년 창단됐다. 소외와 불의, 불평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에 함께 한다.
    이소선합창단(서울):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의 영결식을 계기로 2011년 결성된 노동자 합창단이다. 서울시로부터 2020년 전문예술 단체로 지정받았다.
     
     
     
    민주주의 대합창에서 불린 노래 제목을 소개해 본다. 아, 민주정부/ 무궁화/ 다시 만난 세계/ 타는 목마름으로/ 죽창가/ 깍지손 평화/ 그날이 오면/ 죽순밭에서/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개벽/ 껍데기는 가라/ 인간의 노래/ 돌덩이/ 오월의 노래2/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체 합창단이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출전가’를 불렀다.
     
     
    <봄의 겨울, 겨울의 봄> 뮤지컬이 진행되고 있다. / 사진출처: 뉴시스
     
     
     
    전야제 2부 순서를 연 뮤지컬 <봄의 겨울, 겨울의 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80년 봄과 2025년의 겨울이 중첩되는 판타지 스토리의 뮤지컬. 공연은 “계엄이 계엄이 계엄이 계엄이 계엄이 선포됐다.”를 반복해 부르면서 시작했다. 이어서 “2024년 12월 3일 도시를 통제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두겠다고 계엄령이 선포됐다.”라는 가사는 45년 광주와 현재의 서울을 관통하는 ‘계엄’을 보여 주었다.
     
    “응 엄마, 나? 여의도 가는 길.”
    “응 여보. 걱정 말게. 서울 다 와 부렀어. 아 어치게 가만히 있나. 국회 앞에 탱크가 처들어와부렀다는디!”
     
    이어서 노래한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거리에는 탱크부대가. 상상해 본 적 없어. 이런 세상이 다시 올 거란 걸.”
     
    그랬다. 45년 전의 그 계엄령 세상이 21세기에 다시 올 줄은 나도 상상하지 못했다. “추운 겨울이 더욱 추워질지도 모른다”라고 노래하면 “안 돼! 우리가 만든 나라야”라고 화답했다. “어떻게 가만히 있어. 학교에서 배웠는데. 나도 다 알아. 이거 5·18 때랑 똑같은 거잖아. 우리도 광주 사람들처럼 나서야 되는 거잖아.”라고 젊은 여성이 외치면 “어쩌면 다시 봄이 오지 않을지 모른다”라고 노래했다. 현재와 과거를 노래와 춤으로 연결해 주었다. 1980년 오월은 2024년 12월이 되었고, 광주의 영령이 오늘의 우리를 구했음을 알렸다.
     
    가수 이은미가 작곡가 김형석이 해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광주에서 사람들과 같이 부르고 싶었단다. ‘서른 즈음에’, ‘가슴이 뛴다’ 그리고 ‘애인 있어요’를 열창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라서 일까, 시종 가슴 뭉클하고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작곡가 김종률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존경,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찬사 그리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담아” 작곡했다고 했다. 5·18전야제 브로슈어의 글을 옮겨 본다.
     
     
    민주항쟁의 연원 오월광주로 연어처럼 몰려오는 민주시민들. 고향 집 부모의 마음으로 뜨겁게 환영하는 오월 광주 공동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금남로에서 새로운 세계를 전망하다.
    항쟁의 연원 5·18: 계엄의 밤, 장갑차 앞을 맨몸으로 가로막은 시민들의 용기는 광주 시민군의 헌신이었습니다. 남태령의 새벽, 고립된 농민들을 끝내 지켜낸 연대의 마음은 오월 어머니들의 사랑이었습니다. 한남동의 눈보라를 맞으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낭만은 민주대성회의 횃불이었습니다.
    승리의 약속 5·18: 오월의 기억으로 내란과 맞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이 민주주의 승리의 염원을 안고 광주로 달려올 것이며, 광주 공동체가 고향 집 부모의 마음으로 뜨겁게 환영할 것입니다.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내란 청산과 민주 승리를 약속하는 축제를 펼칩니다.
    미래의 표상 5·18: 5·18은 미래의 표상으로 승화할 것입니다.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민주국가, 국가 주권이 실현되는 자주 국가는 오월 광주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입니다. 계급과 계층, 성별과 세대를 넘어 누구나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대동세상을 오월 광주가 먼저 체험했던 미래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리고 ‘5.18헌법’
    5·18전야제 시민참여 부스의 인상을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올해도 45년 전 오월의 ‘주먹밥’이 있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와 사랑의 밥을 3개나 받아먹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모델인 독일 기자 한스 패터를 기리는 초록 택시와 운전자가 있었다. 그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어 보여주면 광주의 소주 ‘잎새주’ 샘플 한 병 받을 수 있었다. 소주 병 라벨에는 “1980년 5월, 광주로 간 택시운전사”라는 문구와 초록 택시가 새겨져 있었다.
     
     
    주먹밥 나눔, 택시운전사x잎새주 인증사진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 불리는 광주인권상을 아는가? 5·18기념재단이 2000년부터 인권과 평화를 위해 기여한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올해 수상자는 동남아시아에서 군사 폭력과 인권침해에 맞서 생존자 보호, 진실 규명, 평화 구축 활동을 펼쳐온 인권 단체 ‘아시아 정의와 권리(Asia Justice and Rights, AJAR)’다. 특별상은 필리핀 코르딜레라 지역에서 34년간 예술을 통해 인권과 공동체 권리를 옹호해 온 ‘DKK문화동맹’이 받았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인 고 문재학 열사를 비롯한 민주유공자들의 묘비를 찾아보자. 구묘역에도 신묘역에도 너무나 어리고 젊은 얼굴들을 보라. “5·18정신 계승 민주유공자법 제정하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유족과 가족들을 위한 교육 지원, 취업 지원, 의료 지원, 대부와 양로 지원, 양육 지원 등 다양한 지원뿐 아니라, 국가와 지자체가 각종 기념·추모 사업을 실시하고 민주화 운동 관련 시설과 교양 시설을 설치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5·18정신 계승 민주유공자법 제정 손피켓(왼쪽),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부채(오른쪽)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이라 적힌 부채를 보았다. 홍보 부스에서는 “청원 참여”를 유도하는 유인물이 배포되고 있었다. 5·18정신을 국가가 책임지고 헌법에 새겨야 한다는 요지였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광주의 희생과 단호한 투쟁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지켜졌다. 12·3 불법 계엄의 국민 승리가 바로 오월광주의 승리”라며 “5·18정신 헌법 전문 수록을 통해 대한민국을 지켜온 힘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새기겠다"라고 말했다.
     
     
     
     '아 오월, 다시 만난 오월'를 주제로 5·18민주화운동 45주기 기념행사 진행 / 사진출처: 아시아경제
     
     
     

     
     

     

    민주주의 대축제 5.18 전야제를 다녀와서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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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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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된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통일’의 문제는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주제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모두가 알고 있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항상 통일 정책은 중요하게 거론됩니다. 하지만 분단된 지 80여 년이 가까워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세대는 분단된 대한민국만 경험하다 보니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통일의 문제는 사실 멀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이 매년 실시하고 있는 「통일의식 조사(2023)」 결과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43.8%입니다. 이는 정기 조사를 시작한 2007년 이래 최저치라고 합니다. 반면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은 조사 이래 최고치인 29.8%까지 상승했다고 합니다.
     
    분단을 논하며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평화’의 문제입니다. 1950년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은 후 현재까지 남과 북은 '종전'이 아니라 '정전' 상태입니다. 한반도는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엄밀히 말하면 언제 전쟁이 다시 개시될지 모르는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외국 군대인 주한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으며, 남과 북의 접경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 곳곳에서 끊임없이 전쟁 훈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단지 남과 북 사이의 대결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반의 대결 구도, 그 한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가 놓여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화’의 문제는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제40기 평화통일지도자과정 입학식 / 사진출처: 에디터 직접 촬영
     
     
    이런 현실에서 꾸준히 평화 통일을 주제로 시민 아카데미를 진행하는 비영리 공익 단체가 있습니다. 경기도 안산에서 20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을 진행해 오고 있는 사단법인 한겨레평화통일포럼입니다. 지난 4월 17일 제40기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을 시작한 (사)한겨레평화통일포럼을 찾아가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제40기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 입학식에는 (사)한겨레평화통일포럼 강신하 이사장·이천환 상임대표를 비롯해 동문, 40기 입학생 등 7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입학식은 (사)한겨레평화통일포럼 동문들과 입학생들을 맞이하는 강신하 이사장의 환영 인사말로 시작됐습니다. 강 이사장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북에 대한 왜곡된 정보만 알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번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 강의를 통해 북을 제대로 알고 통일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평화통일이 아닌 멸공통일을 추구했던 지난 정부의 논리를 넘어, 헌법에 근거한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라며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이천환 상임대표는 "한국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역사적 과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참사를 후대들에게 물려주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며 "좋은 강의 듣고, 서로 토론하며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배움의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지도자 과정의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제40기 평화통일지도자과정 강의 현장 / 사진출처: 한겨레평화통일포럼 제공
     
     
    이어 입학식의 주요한 순서로 40기 입학생 한 명 한 명 서로 소개하고 기대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입학생들은 “솔직히 평소 통일에 관해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데, 강사진을 보니 기대됩니다.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지인의 추천을 받아 큰 고민 없이 참여했는데, 그 마음이 지도자 과정을 수료할 때는 소중한 경험으로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라는 등의 소감을 전했습니다.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 40기는 입학식을 시작으로 6월 26일까지 매주 다양한 분야의 전문 강사를 초청해 강연을 진행하며, 접경 지역인 연천·동두천 현장 기행을 통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시간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재봉 원광대 명예교수, 김진향 前)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 장창준 한신대학교 교수, 김태형 심리학자, 최현진 평화통일 기행 전문 해설사, 김누리 중앙대학교 교수, 진천규 통일 TV 대표, 신대광 지역사교육연구소 소장, 손미희 우리 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공동대표가 나서 평화통일에 대한 강의를 진행합니다.
     
    이번에 40기를 시작한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은 (사)한겨레평화통일포럼이 창립한 이후 연 2회 꾸준히 진행하고 있으며, 매 기수마다 40~5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11주간 진행되는 과정을 마치면 총동문회에 소속되고, (사)한겨레평화통일포럼 회원으로 가입해 시민이 주축이 되는 평화통일 운동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안산 지역에서 역사성을 지닌 시민 교육 프로그램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을 주최하고 있는 (사)한겨레평화통일포럼은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평화통일의 흐름에서 창립했습니다.
     
     
    5.18영화 공동체 상영 현장 / 사진출처: 한겨레평화통일포럼 제공
     
    백두산-단둥 평화번영탐방(백두산 천지) / 사진출처: 한겨레평화통일포럼 제공
     
    인문학 기행 현장 / 사진출처: 한겨레평화통일포럼 제공
     
    다문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체험활동 현장 / 사진출처: 한겨레평화통일포럼 제공
     
     
    (사)한겨레평화통일포럼 김현주 사무국장은 “평화통일에 대한 인식을 넓혀가고, 평화통일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정책사업 등을 실천하는 단체로 시민들과 함께 통일 운동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어 “(사)한겨레평화통일포럼이 진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교육 사업인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은 평화통일 문제를 비롯해 국내외 정세, 남북의 역사·경제·문화 등을 주제로 강연을 듣고 비전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사)한겨레평화통일포럼은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 외에도 ‘남북경제교류협력아카데미’, ‘백두산-단둥 평화번영탐방’, ‘청소년 평화통일교육’, ‘고려인·새터민·다문화 아이들과 함께하는 문화 체험’, ‘이북 영화 상영’, ‘인문학 기행’, ‘평화통일 관련 정책활동’(토론회, 심포지움, 기자회견 등) 등 다양한 평화통일 관련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조금은 멀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평화’와 ‘통일’은 반드시 생각해 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입니다. 더불어 시민으로서 평화통일의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기 위한 다양한 시민운동에 참여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는 6월 15일은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25주년입니다. 25년간 남북 관계는 수없이 부침을 거듭하고 있고, 오히려 분단이 더 고착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번 더 평화통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 6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통일 시대를 준비하는 시민 교육, ‘평화통일 지도자 과정’
    레지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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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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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21일 안산에는 아주 특별한 생일잔치가 있었다. 풀뿌리 여성 단체이자 전국에 하나뿐인 ‘함께크는여성울림’의 창립 10주년을 축하하는 좌담회였다. 안산 고잔동의 울림 교육장이 “세상을 향한 큰 울림 함께 걸어온 10년 이야기” 꽃으로 가득했다. 김혜정(우공) 전 대표와 조창아(짱아) 신임 대표의 육성으로 여성 단체 ‘울림’을 들어보자
     
     
    자기소개부터 부탁한다.
     
    김혜정(우공, 왼쪽), 조창아(짱아, 오른쪽) / 사진출처: 함께크는여성울림
     
     
    우공: 10년간 울림 활동가이자 2년의 전임 대표 자리를 벗어나서 회원으로 살기 시작한 지 3개월째인 우공이라고 한다.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완전히 활동가의 탈을 벗지 못했지만 어쨌든 마음은 자유로운 개인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짱아: 나는 지난 2년간 울림의 이사였다가 올해 대표이사까지 맡게 돼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내가 대표를 맡기 전후로 내란 불법 계엄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덕분에 활동가로 갑자기 성장한 대표라고 소개하겠다.
     
     
    울림이 뭐지? ‘함께크는여성울림’을 소개해 달라.
     
    함께크는여성'울림' 깃발을 들고 광장에 참여한 회원들 / 사진출처: 함께크는여성울림
     
     
    우공: 사무실은 안산에 있지만 회원이 다른 지역과 해외에도 있는 전국구 여성 단체다. 일상의 차별과 성 역할에 갇혀 살던 여성들이 모여 떠들고 설치고 자유롭게 말하는 안전한 공간이자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지역의 작은 배움터다. 이름 그대로 나만 잘나가는 게 아니라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하는 곳이고 더 큰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다.
     
    짱아: 온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13개의 회원 소모임이 활발하다. 성 평등 가치를 담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 지역사회의 인권 관련 현안, 세월호 참사 등 안산의 민주시민 단체와 연대 활동도 한다. 12.3 계엄의 밤 이후 123일 동안 ‘비상행동’과 함께 윤석열 파면을 끌어냈다. 올해 4월 울림 10주년 기념 자료집을 펴내고 좌담회를 비롯한 기념사업을 진행했다.
     
     
    10년 전 ‘함께크는여성울림’의 창립 과정이 궁금하다.
    우공: 여성 단체 활동 경험이 있는 세 사람이 주축이 되어 만들었다. 2014년부터 사회적 기업 등 여성 공동체 설립을 위한 공부를 했다. 지인들과 발기인을 모으고 돈을 모아 2015년 2월에 안산에서 74명으로 창립총회를 하고 4월에 법인설립을 완료했다. 돈이 없어서 페인트칠, 벽지 등 실내장식을 회원들이 손으로 다 했다. 목재로 된 글자 하나까지 발로 뛰어 찾아서 ‘함께크는여성울림’ 현판을 달았다.
     
     
    당시 안산에 여성노동자회와 YWCA 두 여성 단체가 있었다. 차별점이 뭔가?
    우공: 여성노동자회는 일하는 여성들이 중심에 있고 YWCA는 기독교적 이념에 기초해 평화운동, 청년운동을 함께하는 좀 더 포괄적인 여성공익 운동 단체다. 각각 엄청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생활 중심형 여성 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여성 취업률이 꾸준히 늘어나고는 있지만 단시간 시간제 노동과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도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지역을 기반으로 사적 공간에 있는 여성들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공적 활동과 연결되는 통로가 필요했다. 한마디로 울림은 일상에 밀착된 여성운동 단체다.
     
     
    지금은 회원이 얼마나 되나? 많이 가입하고 또 탈퇴했을 것 같은데.
    우공: 현재 200명쯤 된다. 한 해 보통 30명씩은 들어왔지만 나가는 사람도 많아 생각보다 증가 속도가 느렸다. 그리고 초창기에 “도와주세요”, 읍소해서 100명 채워준 이들이 시간이 가면서 떠나갔다. 사돈의 팔촌 회원들 빼면 한 50명으로 시작해 10주년에 200명까지 왔다. 상당수 회원들이 기존 회원의 소개로 오니, 울림은 회원들이 함께 키운 단체가 맞다.
     
     
    두 분 삶에 울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는 울림의 장점을 자랑해 달라.
     
    울림은 다양한 소모임과 여성연대의 장이다. / 사진출처: 함께크는여성울림
     
     
    짱아: 가장 든든하고 신뢰하는 여성들의 집합체다. 울림을 빼면 나를 설명할 수 없을 거 같다. 울림 활동 7년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가 커졌다. ‘성 평등한 민주 사회 실현을 위해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생활 중심형 여성운동’이라는 모토 그대로였다. “울림이 뭐 하는 곳인 줄도 모르고 좋은 사람 따라왔다가 배우게 되고 실천으로 연결됐다.” 이런 고백 많이 들었다. 나도 그랬다.
     
    13개 회원 소모임을 자랑하고 싶다. 페미니즘 모임, 4.16세월호 참사 기억 모임, 걷기 인증 모임, 산행모임, 글쓰기 및 합평 모임, 영어 모임, 그림 모임, 우쿨렐레 모임, 환경모임 등 여성의 관심사만큼이나 다양하다. 홈페이지 제작 모임, 코딩 모임 등 IT 관련 교육도 늘고 있다. 정치 성향 상관없이 관심 분야로 모여 놀며 배우며 활동한다. 소모임에서 어울려 회의나 여성대회 등 큰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연대 집회로도 연결된다. 나도 처음 울림에 발을 들인 건 활동가들의 인성이 좋아 보여서였다.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별을 품은 사람들’에서 세월호 기억 활동을 하며 내적 외적으로 성장을 경험했다.
     
    우공: 개성 넘치고 재능 있고 멋진 여성들이 울림의 자랑이다. 울림은 여성들이 서로 연결되는 만남의 장이자 사랑방이다. 사람이 연결되면 거기에 재미난 이야기와 다양한 정보가 오가고 활동을 만들어내고 참여와 연대도 이루어진다. 아쉬움은 내가 이슈 파이팅 활동에 많이 참여하지 못한 점이다. 연대체들과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울림도 나도 더 확장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다. 이제 새 대표가 잘해줄 거라 믿는다.
     
     
    각자 여성운동에 몸을 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우공: 나는 좀 늦게 발을 들인 편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세 딸 중 둘째로 남자가 없는 집에서 자라 그런지 여자라고 차별받은 경험은 많지 않았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몸담았지만, 당시 여성운동에는 별 매력을 못 느껴 안타깝게도 페미니즘 세계를 모르고 20대를 지나쳤다. 그런데 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 가부장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걸 바로 느끼게 되면서 성차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났다. 아이 낳고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 재미가 없고 무의미해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더라.
     
    직업상담사 자격을 따고 1년간 봉사했다. 경력 중단 여성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과 현실의 괴리가 컸고, 여성들과 상담하다 보니 직장 내 성희롱과 가정폭력 얘기를 많이 듣게 되더라. 야, 여성에게는 취업보다 폭력 문제가 더 심각하구나, 깨닫고 관련 공부를 하게 됐다. 30대 후반 본격적으로 여성운동 판에 들어간 게 안양여성의전화였다. 젠더 폭력에 대응하는 상담도 중요하지만, 성차별 세상을 바꾸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싶어 사무국 일을 주로 했다. 그때 처음으로 안산에도 이런 단체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결국 뜻 맞는 활동가들과 울림을 만들 수 있었다.
     
    짱아: 2018년에 김혜정 사무국장을 만나게 되면서 울림에 가입했지만 별 활동은 없었다. 순천에서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안산으로 돌아오면서 글쓰기 소모임을 만들어서 울림 활동가들과 더 가까워졌다. 울림 3년 차에 이혼했다. 이혼 후, 울림 회원들이 자주 찾아와, 걷고 차 마시고 밥 먹고 가끔 술도 마시며 '함께'라는 걸 실감했다. 그러다 소모임 ‘별을 품은 사람들’에 들어가면서 이전에 피하던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마주하게 됐다. 그때까진 내 슬픔이 가장 컸는데 생각의 전환이 오더라. 외로워서 슬프고 남편이 떠나서 슬프고, 그런 슬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지더라. 그러니까 내 슬픔에 매몰됐을 땐 해결되지 않더니 다른 아픔에 동참하니까 내 슬픔이 작아지고 연대가 주는 위로가 아주 크게 다가왔다. 도망치지 않고 슬픔의 한가운데에 서는 법을 배운 거 같다. 그러다 울림 이사 제안도 수락했고 대표이사 제의도 수락하지 않았나,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계엄 사태 한 달쯤 지났을 때 대표이사 투표가 있었다. 시국이 내가 빨리 대답하게 했다. 우리 사회 어떡하지, 울림 어떡하지, 모두 내 문제로 다가왔다. 새로 시작한 생업을 하며 대표이사를 맡고 매주 광화문 집회에도 나갔다. 그때 절박하게 느꼈다. 정치와 내 삶이 따로 있지 않구나. 내 삶을 뒤흔드는 게 정치구나, 내란 시기에 날마다 그런 각성을 했다. 내가 실천을 조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우리나라 전체 이 선박이 좌초되는 건데, 내가 지금까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내가 할게 없다 생각하고 내버려뒀구나, 부끄러웠다. 개인적인 상황 국가적인 상황 울림의 상황이 다 하나로 연결됐다.
     
     
    울림의 신임 대표로서 취임 3개월의 소회가 궁금하다.
     
    조창아(짱아) 신임 대표 / 사진출처: 함께크는여성울림
     
     
    짱아: 2월 6일에 취임했지만, 작년 12월에 이미 대표이사 투표가 있었고 내 마음의 결정은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1월 중순에 했던 걸로 기억한다. 돌봄으로부터 자유로워서 가능했다. 그때 활동가들이 10주년 기념 자료집을 준비하고 쓰고 있었다. 그 작업을 도우면서 이 힘든 일을 왜 하느냐고 조심스레 문제를 제기했다. 울림 10년 역사를 네 명의 활동가가 책으로 엮기엔 역부족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부담이 컸다. 그러나 자료집 초고를 읽다 보니 지난 10년의 사람들과 역사를 다시 보게 됐다. 그 수고 덕에 내가 안정적으로 5대 대표로 이어받을 수 있었다.
     
    책임을 맡고 보니 전에 안 보이던 게 많이 보여서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연대 활동에 대표가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활동가 풀이 크지 않아서 지속적으로 나갈 사람이 적은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항상 시의적절하게 매듭 할 거 매듭짓고 자료 정리 잘해준 활동가들이 새삼 고맙더라. 며칠 전 꿈을 꿀 정도였다. 내가 앞으로 2년간 일을 하고도 흩어놓고 쓸려가게 만들지 않을지 걱정돼서였다. 생업과 울림 활동을 병행하며 일상을 살아내려니 마음 관리도 잘하려 하고 있다.
     
    2015~2025 함께크는여성울림 발간 자료 모음(왼쪽)과 10주년 기념 자료집(오른쪽) / 사진출처: 함께크는여성울림
     
     
    파면 전전주에 한 회원이 처음으로 집회 참여를 한 후 들려준 소감이 생각난다. 원래 “저는 광장 그런 데는 안 나가요.”라던 분인데 내가 지나는 말로 같이 가자 그랬다. 울림은 누구도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분이 탄핵 광장에 다녀온 후엔 “민주주의를 바라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 함께한 시민들의 모습에 감동했다. 역사의 현장에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라고 고백했다. 이게 함께하는 재미다.
     
     
    창립 멤버로서 전임 대표직을 마치는 소감은 어떤가?
     
    광장에서 울림 회원과 김혜정(우공, 왼쪽) 전 대표와 조창아(짱아, 가운데) 신임 대표 / 사진출처: 함께크는여성울림 
     
     
    우공: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성 평등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다. 울림도 마찬가지다.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책임을 내려놓는 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물러나도 계속 함께 하는 활동가들이 있고 임원을 비롯해 적극적인 회원들이 있다. 또 새 대표가 엄청 적극적으로 해 나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언젠가 넘어야 하고 이제는 넘어가는 걸 시도해 봐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적기였다. 내 선택이 옳았고 울림도 잘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창립 위원들이 돌아가며 대표를 해 왔는데 이제 다음 세대로 대표 이전이 되고 임원진들이 바뀌고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10년을 탈 없이 잘 왔다. “울림이 있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보면 보람을 느낀다. 10주년 앞두고 몇 차례 비전 워크숍을 하며 우리 단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임원들이 많아진 걸 보았다. 이사진 중심으로 역할 배분도 되고 공동 운영 마인드도 생겼다. 조창아 대표가 사람을 포용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마음을 모아주고 있는 게 느껴진다. 성공적으로 잘 가고 있는 것 같다.
     
    향후 10년 울림의 비전과 과제가 있다면?
     
    함께크는여성울림 10주년 좌담회 / 사진출처: 함께크는여성울림
     
     
    짱아: 탄핵 광장에 나온 2030 여성들에게서 감동과 자극을 많이 받았다. 그분들과 연대하는 페미니스트 단체 울림으로 계속 성장하고 싶다. 근데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한다고 가다 보면 사람들을 놓칠 수 있더라. 오히려 사람들과 하루하루 함께 걷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지금까지 그랬듯 함께 이야기 나누고 함께 공부하고 글 쓰고 하는 그 자체가 울림의 존재 이유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의 도전과 과제는 교육과 홍보, 재정 확충, 세대 간 연대 등이 있다. 운영진과 회원들의 페미니스트 역량 강화도 과제겠다. 현재로선 울림 자체가 내 꿈이다. 울림이 있다는 자체가 내 기쁨이다.
    
     

     
     
     
    생활 밀착형 여성 단체 ‘함께크는여성울림’ 이야기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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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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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8일은 무슨 날일까요?
     
    노동자의 날, 근로자의 날, 메이데이…
    많은 사람들이 5월 1일을 ‘노동자들의 날’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4월 28일이 어떤 날이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날은 일터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다시는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는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입니다. 이 글은 4월 28일이 어떤 날인지, 한국에서는 이날을 어떻게 기억해왔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이날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한 인형 공장에서 시작된 추모의 날
     
     
    태국 방콕 장난감 공장 화재 사진 /출처: KBS
     
     
    1993년 5월, 태국 방콕 외곽의 케이더(Kader) 장난감 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무려 188명의 노동자가 숨지고, 469명이 다쳤습니다. 그들은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인형을 만들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참사는 안전장치 부재와 기업의 탐욕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공장에 화재경보기와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직원들의 목숨보다 비싼 인형의 도난을 막는다는 이유로 문을 잠그고 작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불이 난 순간 노동자들은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6년, 유엔 뉴욕 본부에서 열린 지속가능발전위원회 회의에서 국제자유노련(ICFTU)의 대표들이 이 사건을 추모하며 촛불을 들었습니다. “선진국 아이들의 장난감에는 개발도상국 노동자의 피와 죽음이 묻어 있다.” 이러한 각성이 국제 사회를 흔들었고, 이후 국제노동기구(ILO)는 4월 28일을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로 공식 지정했습니다. 현재 미국, 영국, 캐나다 등 19개국은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전 세계 110개국 이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달
     
     
    '4.28 산재사망 추모 건강한 노동, 안전한 사회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에서 세운 안전화 탑 / 출처: 오마이뉴스
     
     
    한국에서 4월 28일은 민주노총과 노동조합 그리고 산재노동자 단체, 노동안전보건운동 단체 등 시민사회가 안전과 건강을 담은 한 해의 요구를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4월을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달'로 지정하며, 정부의 산재사망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살인기업'을 선정 및 발표하는 '살인기업 선정식'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전 세계적으로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을 시민사회에서 추모하고,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일하다 죽지 않는 일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행동들이었습니다.
     
    시민사회가 주도하여 진행되었던 4월 28일이, 올해부터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바로 작년 9월 국회 본회의에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4.28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 법정 기념일이 된 것입니다. 개정안에는 제9조의 2(산업재해 근로자의 날)을 신설하였고, 이로 인해 매년 4월 28일을 '산업재해 근로자의 날'로 지정하고, 4월 28일부터 1주간을 추모주간으로 정했습니다.
     
     
    법정 기념일 그 이상의 의미가 되길
     
     
    23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 민주노총 결의대회 / 출처: 뉴시스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하는 것은 법정 기념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매년 2,400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고, 부상과 질병으로 15만 명의 노동자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한국은 슬프게도 OECD 가입 국가 중 산재사망이 가장 많은 국가입니다. 특히 작년 경기도 화성에서 발생한 '아리셀 중대산업재해 참사'를 생각하면, 일터에서의 안전은 아직 먼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안전하지 않은 사회, 건강하지 않은 일터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공감대가 모여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등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터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망사고를 통해, 여전히 우리 사회제도의 부족함을 알려줍니다.
     
     
    추모를 넘어서, 더 이상 죽지 않는 사회로
     
    4월 28일은 더 이상 몇몇 활동가들만의 기억이 아닙니다.
    국가가 인정한 공식적인 추모의 날이 되었고, 우리는 그 의미를 더 깊게 되새겨야 합니다. 산재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노동자를 추모하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를 바꾸는 것. 그 두 가지가 함께 갈 때, 4월 28일은 진정한 ‘기억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사회.
    위험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터.
    추모를 넘어서,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4월 28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권리, 4월 28일을 아시나요?
    라이언

    조회수 830

    202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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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날의 아픔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안전이 기본이 되는 사회, 믿고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 기억 편지 낭독 중(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장애진 씨)
     
     
    출처: 4.16재단
     
     
    매년 4월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다양한 자리를 만듭니다. 2025416일은 세월호 참사 이후 열한 번째 맞는 416일이었습니다. 16일 오후 3시부터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이 열렸습니다.
     
    노란 옷을 입은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 노란 팔찌를 끼고 노란 리본 배지를 가슴에 단 많은 시민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또 참사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고자 해양수산부 장관, 국회의장, 안산시장, 각 정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 및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의 참여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억식 행사는 304명 희생자에 대한 묵념, 각 분야를 대표하는 분들의 추도사, 영상 상영과 뮤지컬 공연, 생존 학생의 편지 낭독, 4.16합창단의 합창 공연으로 이어졌는데요. 현장에 참석한 3,000여 명의 시민들을 비롯해 언론사의 생중계로 수많은 시민이 기억식을 지켜봤습니다.
     
     
    출처: 4.16재단
     
     
    기억식을 함께 준비한 4·16재단의 박승렬 이사장은 무대에 올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1년이 지나고 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사회적 참사와 자연 재난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라며 생명의 소중함과 일상의 안전이 최우선시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모두 세월호 참사를 평생 잊지 않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생명존중과 안전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4.16생명안전공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을 대표해 무대에 오른 단원고 2학년 1김수진 학생의 아버지 김종기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참사 이후 11년이 지나도록 아직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왜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는지 우리 가족들은 알고 있지 못합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어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이 의무를 성실히 지키면서 국가를 믿고 의지하듯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책무임을 명심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출처: 4.16재단
     
     
    추도사에 이어 상영된 <10년의 세월, 그리고 다시 첫 시작>이라는 제목의 영상은 참가자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는데요.
     
     
    절대 변할 수 없는,
    그래서 결국 그 무엇도 이겨내는
    엄마의 약속
     
    (중략)
     
    10년 하고도 다시 1년 이제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서야 아이들이 돌아올 보금자리의 첫 삽을 떴다.
    아이들이 우리 품으로 온전히 돌아오면 그때는 진짜 봄이 올까?
     
    진짜 진실이, 진짜 사죄가, 진짜 새 세상이 올까?
    10년 하고도 다시 1년 오늘도 다시 약속한다.
    꼭 밝히겠다고, 꼭 밝혀내고 말겠다고
     
    - 영상 <10년의 세월, 그리고 다시 첫 시작>
     
    [영상] 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영상 <10년의 세월, 그리고 다시 첫 시작> / 출처: 4·16재단 
     
     
    참사 이후 10년이 넘도록 아이들이 왜 희생되어야만 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고자, 나아가 안전사회를 만들고 재난 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지켜내고자 걸어온 세월호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이었습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켜내겠다는 엄마들의 굳건한 의지가 숭고하게 느껴졌습니다.
     
     
    출처: 4.16재단
     
     
    영상을 다 같이 본 후 희생된 단원고 학생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공연 , 여기 있어요가 펼쳐졌습니다. 지난해 10주기 기억식 무대에서 시 낭송을 했던, 그리고 세월호 참사 10주기 프로젝트로 제작된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의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던 박원상 배우가 열연을 펼쳐, 참가한 시민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음 순서로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인 장애진 씨가 무대에 올라 기억의 편지글을 낭독했는데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들과 시민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믿고 언젠가는 괜찮아지리라 생각했지만, 봄이 올 때마다 아직 마음 한편은 차가워지고 봄은 여전히 멀기만 합니다.”, 두 번 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그대들과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했지만, 또 다른 비극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우리가 아직 멈춰서 있는 것은 아닌가 자책도 하게 됩니다. 그날의 봄은 멈춰있지만 언젠가는 영원히 따뜻한 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며 진심을 눌러쓴 편지글을 전했습니다.
     
    기억식의 마지막 순서는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과 시민들이 함께 만든 4.16합창단의 공연이었습니다. 4.16합창단의 노래는 기억하고 행동하는 모든 시민들의 마음을 울리는 빛나는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기억식이 진행되는 도중 오후 416, 1분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 사이렌이 안산시 전역에 울려 모두가 함께 마음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맞은 416일에는 오후 3시 안산에서 열린 기억식 뿐만 아니라 오전 1030분에는 참사가 벌어진 해역에서 선상 추모식, 오전 11시에는 인천에 위치한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 광장에서 일반인 희생자 추모식, 오후 416분에는 서울에 위치한 세월호 기억 공간에서 시민 기억식을 진행해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영상] 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식 본행사(full 영상) / 출처: 4·16재단 
     
     

     
     
     
    세월호 참사 11주기, “다시 봄이 온다”
    레지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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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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