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메뉴열기

공익웹진

  • 영화 '비밀의 언덕'은 경기도콘텐츠진흥원의 지원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헤아려 봅니다

     

    영화 '비밀의언덕' 감독 이지은

     

    해마다 어버이날이 되면, 꽃집마다 예쁘게 단장한 카네이션들이 방긋 미소 지으며 손님을 기다립니다. 꽃 아래 리본에는 사랑합니다혹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지요. 부모님 하면 당연하게 연상되는 단어가 사랑이기에, 어느 날 문득 사랑은 어떤 모양이지?’라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글쎄요, 저로서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솜처럼 몽글몽글하다라고만 표현하기엔 다소 성긴 감이 있습니다. 그 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모님께 서운했던 마음, 차별받았던 마음과 같이 제때 해소되지 못한 뾰족한 가시들이 촘촘히 박혀있기 때문입니다. 한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때의 부모님도 참 젊으셨구나. 나를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라고 뒤늦게야 부모님에 대한 감사함을 깨달았음에, 남들처럼 철든 어른이 되었음에 어깨를 으쓱하며, 그 못난 가시들을 싹둑 잘라버리거나, 설령 보여도 안 보이는 척하며 살았지만, 마음속 한편에선 언젠가 한 번쯤은 그 가시들을 골똘히 들여다봐야지하는 창작자로서의 욕망을 조심스럽게 품어왔습니다. 왜냐하면 그 못난 가시는 성장의 토양 위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귀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부모님은 기억나니? 너 옛날에 그랬다~”로 시작되는 저의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제가 기억하든 못하든 가족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공식 인증된 추억 속 명장면이겠지요? 그렇게 가족의 역사에 당당히 등극한 부모님이 알고 있는 기특한 성장담도 있겠지만, 떳떳하게 공개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끙끙 앓다가 조용히 묻어야 했던, 부모님이 알지 못하는 저만의 성장통도 있을 것입니다. 영화 <비밀의 언덕>넌 가족의 역사가 될 자격이 없어라고 스스로 결론지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게 했던, 비밀스러운 성장통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명은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말입니다.

     

     

     

    1996, 12살의 명은이는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가정환경조사 면담을 하는 것이 꺼려집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께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선생님 연구실에서 개인 면담을 하는 것이 어떨는지 정성을 다해 편지를 쓰는데요, 하필이면 선생님이 그날 지각을 하는 바람에 명은이의 편지를 읽지 못하고,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공개적인 면담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명은이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온 신경은 선생님의 책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명은이는 선생님을 마주합니다. 친구들이 떠들어서 자신과 선생님의 대화가 제발 좀 묻혔으면 좋겠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조용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명은이의 기분 탓일까요?

     

    <비밀의 언덕>의 시작은 초중고 시절에 행해지던 가정환경조사서였습니다. 학기 초만 되면 예외 없이 작성해야만 했던 표 서식 안에는 사는 곳, 부모님의 직업과 학력, 더 나아가 저희 부모님 세대에선 집은 자가인지, 집에 자가용이 있는지, 피아노가 있는지의 유무를 적게 되어 있었는데, 당시 저는 이것을 작성하는 것이 좀 불편한 학생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였겠지요. 왜 의식하느냐고 묻는다면, ‘정말 왜 그럴까? 언제부터 그랬을까?’라고 자문하게 됩니다. 아마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차이를 발견하고 비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와 타인을 비교하기 시작한 최초의 순간이 언제였지?’하고 돌이켜보니,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엄마만 아는 출처가 불분명한 운동화가 아니라 광고에도 나오고 친구들도 모두 신는 메이커 운동화를 나도 신고 싶고, 우리 집만 아는 유별난 가훈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아는 유명한 가훈을 우리 집도 갖고 싶었던 그 시기 말입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쓸 때면 우리 가족이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가족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단어를 깎고 또 깎았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직업이 뭐냐고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명은이는 답합니다. 아빠는 회사원이고, 엄마는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라고요. 이것은 명은이가 영화 속에서 하는 최초의 거짓말입니다. 사실 명은이의 부모님은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명은이의 부모님의 직업이 정말 객관적으로 창피한 직업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창피한 직업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직업은 숭고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명은이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까닭은 자신의 부모님이 당시에 사회가 관습적으로 그리는 표준적인 가족의 예시 - 대개는 양복을 입고 회사에 다니는 아빠, 앞치마를 두른 가정주부로서의 엄마 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은이가 부모님의 직업만 창피해 하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매우 복합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있던 명은이는 학교에 다니면서 부모님이 모르는 자신만의 사회가 생겼습니다. 명은이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새롭게 맺은 관계들 속에서 대부분의 경험들이 최초일 것이며, 사회에서 보이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 역시 수많은 인간관계와 시행착오들을 통해서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게 무엇인지 확고한 신념이 생겼을 것입니다. 한 가족이지만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감수성의 시간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은이에게는 중요한 일이 부모님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일일 수 있으며, 부모님의 쿨함이 명은이에게는 창피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명은이와 부모님은 감수성에 있어 그 격차가 현저히 벌어져 있습니다. 명은이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인정 많은 사람이고 싶지만, 부모님은 자신들의 고생을 강조하며 돈 한 푼 기부하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명은이는 반장이 되어 의욕적으로 반을 이끌고 싶지만, 부모님은 반장보다 반장 엄마가 하는 일이 더 많다며 반장직을 무르라고 합니다. 사소하게는 도시락 반찬과 옷 스타일, 크게는 환경, 종교, 인간관계까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극과 극입니다. 명은이의 진정한 스트레스는 부모님의 직업만이 아닌, 총체적으로 부모님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함에 있습니다.

     

     

    평소 명은이의 섬세한 감수성을 눈여겨보던 선생님이 명은이에게 글쓰기를 제안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탐구해 나가면서 명은이의 인식이 멀리 나아갈수록, 부모님과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부모님과의 갈등은 더더욱 커집니다. 그렇게 가족과 멀리 벌어져 있던 명은이는 시 주최의 글짓기 대회에서 가족이라는 주제를 마주하고, 비로소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깊이 사유할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명은이가 보는 가족의 모습이 나오고, 명은이가 보지 못하는 가족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관객은 이 모두를 보게 됩니다. 영화 상영이 끝난 뒤, 명은이의 아빠 역할을 맡았던 강길우 배우가 한 말이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명은이가 학교에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 줄 몰랐다고 말입니다. 명은이는 집에서는 원하는 걸 해달라고 떼쓰고 투쟁하는 철부지처럼 보일지 몰라도, 학교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프로페셔널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명은이 역시 부모님이 직장에서 어떤 모습일지는 잘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명은이 눈에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억척스러운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엄마도 새벽시장의 문을 혼자서 여는 것이 무서운 연약한 사람일 뿐입니다. 영화라는 도구를 통해서 어른과 아이가 혹은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다른 감수성을 확인하고, 이해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명은이가 가족 모르게 숨긴 성장통이 있듯, 아빠, 엄마, 오빠도 명은이 모르게 숨긴 저마다의 성장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나면, 다 안다고 생각했던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특별하게 다가오고, 예시에 없기 때문에 맨땅에서 일구어나갔던 식구들의 궁상맞은 시행착오가 오히려 굉장히 드라마틱한 가족 대서사시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글짓기 대회를 준비하며 명은이가 삼촌에게 묻습니다. “삼촌, 가정의 달은 왜 있는 거야?” 삼촌은 말합니다. “사람도 1년에 한 번씩은 생일을 축하해주잖아. 가족도 그런 거지. 가족이 나이를 먹어나간다는 건 대단한 거니까”. 삼촌의 말처럼 가족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도, 쉬운 일도 아닙니다. 서로 다른 감수성의 시간대를 통과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시간과 노력의 공들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문득, 가족이 함께 그려나간 영광의 주름을 헤아려봅니다.

     
     
     
     
     
    [기획]헤아려 봅니다
    영화감독 이지은

    조회수 165

    2025-05-01
  • 연번
  • 제목
  • 작성자
  • 날짜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