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글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내용 중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_편집자의 말

화성시 기산동 ‘참누리 크로바 도서관’ 김미경 관장이 말하는 작은 도서관의 13년 발자취
“도서관은 책만 보는 곳이 아닙니다. 이웃과 정을 나누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물며 성장하는 마을의 사랑방이죠. 그저 편안하게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으시면 됩니다.”
아파트 단지 한편, 주민들의 발길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매일 도서관 문을 열며 주민들과 아이들의 삶에 따뜻하게 스며든 사람. 올해로 13년째 화성시 기산동에 위치한 ‘참누리 크로바 도서관’을 묵묵히 지켜오고 있는 김미경 관장이다. 작은 도서관이 가진 공익적 가치와 이들이 걸어온 13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가벼운 발걸음이 가져온 13년의 약속, 그리고 성장
김미경 관장이 처음부터 도서관의 책임을 맡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도서관에서 수업을 진행하던 강사였던 그녀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침 첫째 아이 학교에서 학부모 봉사를 하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필요한 책도 찾으려던 소박한 시작이 어느덧 13년이라는 긴 세월로 이어졌다.
“가장 큰 변화는 저 자신의 성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성격상 그저 잠깐 봉사하고 책이나 조금 보다 갈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작은 도서관일지라도 하나의 ‘기관’을 책임지는 장(長)의 자리에 있다 보니 프로그램도 직접 기획하고 도서관의 전반적인 사정을 살펴야 했죠. 그 과정에서 사람을 보는 안목이 생기더라고요. 도서관과 함께 저 역시 더 성숙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쉼터, 동네의 사랑방이 되다
김 관장이 정의하는 작은 도서관의 핵심 가치는 명확하다. 시립 도서관처럼 먼 곳을 찾아가지 않아도, 거창한 목적이 없어도 주민들이 편안한 옷차림으로 언제든 들를 수 있는 ‘동네 사랑방’이 되는 것이다. 특히 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해 있어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되어준다. 학원 가기 전 10분, 20분의 짬이 날 때 언제든 와서 머물다 갈 수 있는 쉼터이자, 이웃들이 오가며 물 한 잔 마시고 안부를 나누는 정겨운 공간인 셈이다.
이 사랑방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도서관의 역사가 된다. 김 관장의 기억 속에는 유치원 시절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매일 도서관을 찾던 한 아이의 가정이 깊게 남아있다.
“당시 딸아이는 낯을 너무 많이 가려서 말 한마디 붙이기도 어려웠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도서관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해, 이제는 도서관의 ‘청소년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받았던 혜택을 다시 도서관에 나눔으로 돌려주는 멋진 청소년이 된 것이죠. 지나갈 때마다 스스럼없이 ‘관장님!’ 하고 인사해 줄 때면 자식처럼 대견하고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아이들의 사춘기와 성장 역사를 함께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작은 도서관 운영의 가장 큰 묘미입니다.”
문화와 정(情)이 흐르는 도서관, 원동력은 ‘연대의 힘’
그림책 강사이기도 한 김 관장은 성인과 아이들이 모두 깊게 교감할 수 있는 ‘그림책 수업’에 가장 큰 애착을 가질 뿐 아니라, 온 가족이 즐기는 보드게임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왔다. 예산과 공간 등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도 도서관이 13년 동안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김 관장은 망설임 없이 ‘봉사자들’을 꼽았다.

▲ 아파트 단지 내 주민들과 아이들을 위해 활짝 열려 있는 참누리 크로바 도서관의 야외 행사 전경

▲ 도서관 내부에서 펼쳐진 '소리극 낭독 콘서트'. 아이들과 주민들이 함께 모여 살아있는 책 공연을 즐기고 있다.
“도서관 봉사자 중 한 분은 10년 차, 나머지 분들은 저와 시작을 같이한 13년 차 베테랑들입니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통하는 가족이나 다름없죠. 행사 때마다 아나바다 벼룩시장을 열고 떡볶이 같은 음식을 직접 만들어 나누곤 하는데, 사실 이게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우리 봉사자들은 늘 ‘하면 되지!’ 하며 흔쾌히 손을 걷어붙입니다. 이분들의 든든한 뒷받침과 연대감이 없었다면 저 역시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작은 관심이 우리 동네를 바꾸는 시작입니다”

▲ 도서관에서 이웃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따뜻한 일상을 꾸려가는 봉사자들의 모습.

▲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작은 도서관만의 친근하고 유익한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아이들.
김미경 관장은 도서관이 책만 딱딱하게 읽는 공간을 넘어, 주민들이 관리사무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서류 복사나 프린트를 요청할 수 있는 곳, 사소한 고민도 해결하고 도란도란 수다를 떨 수 있는 온기 있는 공간이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여전히 아파트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는 존재조차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는 사실에는 아쉬움을 표했다. 6년을 살았으면서도 도서관에 처음 와봤다는 아이를 만났을 때는 안타까움이 더 컸다고 전한다.
“주민분들께서 ‘우리 단지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나?’, ‘거기선 무얼 하나?’ 하고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민들의 관심이 있어야 도서관도 더 좋은 프로그램을 준비할 수 있고, 지자체에도 필요한 지원을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거든요. 모두의 공간이 되려면 주민들의 작은 관심이 꼭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도서관 문을 두드리기를 망설이는 이들에게 따뜻한 초대의 말을 건넸다.
“작은 도서관은 이용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주민 여러분이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여러분의 공간입니다. ‘처음인데 가도 될까?’, ‘책을 꼭 빌려야 하나?’ 하는 걱정은 접어두세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크로바 도서관에 발을 들여놓으세요. 그 작은 시작이 우리 동네를 바꾸는 따뜻한 사랑방의 시작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애쓰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을 취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만남이었다.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역 주민을 사랑하고 공익적 가치를 실천해 온 한 사람을 마주하고 나니, 우리 사회가 여전히 살만하고 따뜻하게 지켜지고 있는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오늘도 동네의 작은 도서관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장 거대한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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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1. 8,000km의 거리감, 스마트폰 화면 너머의 세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켭니다. 화면 속 뉴스는 쉴 새 없이 잔혹한 소식들을 쏟아냅니다. 우크라이나의 무너진 아파트, 가자지구의 울부짖는 어머니, 수단의 끝없는 피난 행렬. 하지만 이내 화면을 쓸어 넘기면 맛집 정보와 지인의 일상 사진이 그 자리를 대체합니다. 참혹한 전쟁의 풍경은 손가락 까딱 한 번에 너무나 쉽게 휘발되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의 고통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을 ‘나의 문제’로 감각하는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멀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 참 안됐네. 빨리 끝냐야 할 텐데...“

미국의 미사일피격으로 사망한 이란 초등학생 175명 장례식(2026.3.4.)
우리가 보내는 안타까움의 시선 뒤에는 항상 은연중에 ‘그곳은 먼 나라 이야기’라는 안도감이 숨어 있습니다.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단단한 심리적 방어벽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훈의 달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과거의 전쟁을 기억하고 순국선열을 추모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무감각합니다.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그곳의 전쟁이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걸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정말로 안전한가? 인류는 지속적으로 평화를 이야기했지만 현실은 왜 전쟁의 연속일까?
2. 남의 전쟁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청구서
전쟁은 미사일이 폭발하는 영토 안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경이라는 물리적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촘촘한 가닥이 되어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세계를 뒤흔든 거대한 두 개의 전쟁은 이를 너무나 극명하게 증명합니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남긴 상흔
2022년 2월에 일어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글로벌 곡창지대이자 원자재 대국인 두 나라의 충돌은 밀과 옥수수 가격의 폭등으로 우리에게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밀과 옥수수 가격의 폭등은 사료 가격을 상승시켰습니다. 이로인해 도산한 축산 농가가 엄청 늘어났으며 가공식품과 외식 물가가 도미노처럼 치솟아 마트 매대와 골목길 밥상에 고스란히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전 세계 해바라기유 수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던 우크라이나의 공급망이 끊기자, 국내 식용유 가격이 무섭게 치솟는 이른바 '식용유 대란'이 현실화되었습니다. 해바라기유 수입 중단은 대두유(콩기름)와 팜유 등 대체재의 가격까지 연쇄적으로 폭등시켰고, 이는 고스란히 동네 치킨집 사장님의 한숨과 가정집 장바구니의 비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에너지 자원의 90% 이상을 수입하는 구조 속에서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원유 공급망 차단은 산업 전반의 생산 비용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고스란히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져 서민들의 실질 소득을 감소시켰고, 사회 전반에 ‘먹고사는 문제’의 불안을 심화시켰습니다.
○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중동 전쟁 위기가 주는 충격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중동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중동은 세계 에너지 공급망의 심장부이며, 한국은 원유 수입의 약 70%를 이 지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 한국 수입 원유의 6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국내 유가를 상승시켰습니다. 주유소의 기름값 숫자가 바뀔 때마다 서민들의 소비 심리는 얼어붙었고, 해운·조선·해외 건설 산업은 불확실성의 늪에 빠졌습니다. 물가 상승과 금리 고공행진은 자영업자들을 한계 상황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미사일 한 발이 한국의 어느 골목길 식당의 폐업으로 이어지는 이 긴밀한 연결고리, 이것이 바로 남의 전쟁이 우리에게 청구서입니다.
3.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평화
우리가 경제적 수치와 물가 상승률을 논하는 사이, 전쟁의 현장에 서 있는 당사국 국민들이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합니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학생이었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난민이 됩니다. 머리 위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폭격의 공포 속에 밤을 지새우고, 단 한 모금의 깨끗한 물과 한 조각의 빵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을 줄 서야 합니다. 전력과 가스가 끊긴 겨울, 추위 속에서 아이들은 병들어가고, 병원마저 포격으로 무너져 간단한 치료조차 받지 못해 목숨을 잃습니다. 어제까지 함께 밥을 먹던 가족의 시신을 무너진 잔해 속에서 맨손으로 파내야 하는 비극, 그것이 전쟁을 겪는 인간의 처절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끔찍한 비극 앞에서 결코 자유로운 관전자일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 평화 국가가 아니라, 잠시 전쟁을 멈춘 '휴전(Armistice)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우리 역사에는 언제든 전면전으로 번질 수 있었던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수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를 흔든 큰 전쟁위기들
① 1968년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시도에 이어 1월 23일에는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영해 침범의 이유로 북한군에 나포되면서 한반도는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극한의 군사적 대치 상태에 놓였다.
② 1976년 판문점 도끼 사건 - 공동경비구역 판문점에서 미군이 미루나무를 자르려고 하자 북한군은 자신들과 협의하지 않았다고 중단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져 미군 2명이 사망한 사건. 미국은 핵 탑재가 가능한 폭격기를 한반도 상공에 출격시키는 등 전면전 직전까지 갔다.
③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과 미국의 영변 핵시설 정밀 폭격 준비로 당시 주한미군 가족들이 철수 계획을 세우고 시민들이 라면과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등 극심한 전쟁 공포가 휩쓸쓸었다.
④ 2010년 연평도 포격전 - 한국 해군의 해상 포격 훈련에 대해 북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연평도에 포격을 가해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 정전 협정 이후 최초로 대한민국 영토와 민간인을 향해 직접적인 포격이 가해졌다.
⑤ 2015년 휴전선 지뢰 사건 - 2015년 8월 비무장지대(DMZ) 수색 중 휴전선에서 지뢰폭발로 우리 군 2명이 부상을 당한 사건. 이로 인해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와 서부전선 포격 도발로 이어졌고, 북한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등 군사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⑥ 2017년 북·미 전면전 위기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대해 미국 대통령이 북의 완전 파괴로 화답을 하자, 북이 다시 괌에 대한 미사일 공격으로 응수하면서 전쟁위기가 일촉즉발로 높아진 사건.
이 역사적 사건들이 증명하듯 우리 사회의 평화는 안전한 평화가 아닌 불안전한 평화기반 위에서 반복되는 전쟁위기를 맞으며 살고 있습니다. 대만-중국 전쟁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재무장화도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불안감입니다. 중국-대만 전쟁 시 미군이 개입을 하면 주한미군과 한국군이 참전할 여지가 높습니다. 이번 이란 전쟁에서 보듯이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자 이란은 미군기지가 있는 중동 8개 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주한미군 기지가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풍경은 당장 오늘 밤이라도 이 땅에서 재연될 수 있습니다.
○ 분단과 군사독재문화로 인한 갈등과 혐오의 문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휴전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오랜 분단 구조가 우리 내부 사회에 심어놓은 갈등과 혐오문화입니다.
적대적 분단은 우리 사회에 오랜 기간 광범위하게 우리의 인식, 마음을 병들게 했습니다. 색깔론과 종북몰이와 같은 이념갈등은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으로 간주고,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반인권적, 반민주적 인식을 온 사회에 만연시켰습니다.
국민의 행복과 권리를 통제하려고 한 12.3내란의 명분도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였습니다. ‘스타벅스를 빨갱이 없는 청정지역으로 만들자’는 등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분단을 자양분으로 해서 갈등과 갈라치기가 계속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분단은 우리 사회에 평화감수성을 약화시켰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시체팔이를 한다’며 낙인을 찍고, 단식농성장 바로 앞에서 ‘폭식투쟁’이라는 반인륜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을 향해서도 위로와 진상규명 대신 차가운 모욕과 냉소를 퍼부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두고 ‘북한군 개입설’과 같은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유포하며 역사적 진실과 희생자들의 아픔을 모독하는 행위까지 버젓이 자행됩니다. 이런 행위를 단순히 생각의 차이로 치부할 수 없으며, 자유민주주의 허용 범위로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모든 야만성은 오랜 시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분단문화'와 '군사독재문화'가 만들어낸 흑백논리의 산물입니다. 휴전선 너머의 군사적 위협을 관리하는 안보 못지않게, 우리 안의 이분법적인 적대감을 거둬내고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치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짜 '우리의 평화'입니다.
4. 평화는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경기평화교육센터
국가 권력과 군사력의 논리는 언제나 거대한 담론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민사회의 역할은 그 틀 자체를 흔드는 것입니다.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공감의 영역에서, 단절이 아닌 ‘연결’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대한 국제정치를 당장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 곁에 있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사회 내부의 상처와 갈등을 평화적으로 치유해 나갈 ‘평화 감수성’의 크기는 교육을 통해 키울 수 있습니다.

평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경기평화교육센터(이하 센터)는 바로 이러한 믿음 위에서 숨 쉬는 단체입니다. 센터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교육으로 기여하자’는 생각으로 지난 2012년에 첫발을 내디딘 시민단체입니다.
분단의 오랜 아픔을 치유하고 무력 충돌의 위기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힘은 결국 평화를 사랑하는 깨어있는 시민과 미래 세대의 의식에서 나온다는 신념으로 달려왔습니다.
▣ 경기평화교육센터 주요 교육 및 시민참여 프로그램
① 미래 세대를 위한 학년별 학생 대상 교육 — 초등·중등 학생들의 평화 감수성을 깨우는 〈그림책을 활용한 평화통일교육〉과 〈놀이로 만나는 평화통일교육〉은 학교 현장에서 가장 뜨거운 호응을 받는 대표 프로그램.
② 시대를 이끌어갈 청년 대상 교육 — 깊이 있는 세미나와 토론을 통해 평화적 시선을 확장하는 〈피스리더〉와 청년 동아리 〈워너피스〉를 통해 사회 곳곳에서 평화의 목소리를 낼 청년 리더 양성.
③ 일상에서 실천하는 시민 교육 — 〈통일 톡투유〉, 〈가족이 함께하는 평화캠프〉, 〈제1기 경기도민 평화학교〉 등을 통해 시민들의 평화 감수성을 향상시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④ 현장에서 숨 쉬는 평화통일기행 — 파주·김포·강화도 등 접경지역에서의 평화통일기행을 통해 시민들은 분단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을 눈과 가슴으로 생생하게 느끼기 위한 프로그램.
경기평화교육센터가 펼치는 이 모든 교육의 지향점은 명확합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공감의 언어로 평화감수성을 키우고,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감각을 갖게 하는 데 교육으로 기여하는 것입니다.
5. 나가며: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
로마 시대의 군사 전략가 베게티우스가 남긴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오랫동안 이 말은 인류의 안보 논리로 지배해 왔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진실은 다릅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불안을 자극하고, 이는 끝없는 군비 경쟁과 ‘안보 딜레마’를 낳아 결국 더 참혹한 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낡고 위험한 선언을 뒤집어야 합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
평화는 더 큰 미사일 위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응시하는 공감의 시선, 적대를 멈추려는 단호한 대화, 내 안의 낙인과 혐오를 거둬내는 성찰, 그리고 국경과 이념을 넘어 연대하는 시민사회의 힘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 타인의 눈물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 이웃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으로 연결되는 순간 전쟁과 폭력을 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평화의 감수성’은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경기평화교육센터가 뿌리는 평화교육의 씨앗들이 거대한 세계 평화의 숲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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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7
기억하는 사람이 되자.
다산인권센터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화성에 위치한 접착제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폭발사고 였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곧바로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현장에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고, 심하게 구겨진 건물들은 사고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4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고 소식은 며칠 동안 주요 뉴스로 다뤄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지역의 동료들과 함께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고, 화성시와 노동청 등 관계 기관을 찾아다니며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사건의 내용과 활동을 정리해 진상규명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마지막 기록을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왜 사건이 발생했는지, 무엇이 잘못되어 생명을 잃었는지, 우리 사회는 어떤 책임을 함께 져야 하는지, 성찰의 마음으로 어떤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남겨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쉽게 누군가의 삶이 잊혀지지 않도록, 이 세상을 살다 간 어느 누군가의 오늘이 기억되도록, 기억하는 사람이 되자.”
그것이 제가 공익활동을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아마, 공익활동을 하는 활동가에게는 저의 시간처럼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사명감으로, 누군가는 즐거움,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분노로, 누군가는 변화의 상상으로. 저마다의 이유로 공익활동가가 되고, 세상의 변화에 힘을 보태는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꿀벌’이 없다면 지구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렇게 공익활동에 뛰어든 사람들, 저는 가끔 공익활동가의 존재가 ‘꿀벌’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곳곳을 날아다니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존재 말이죠.
살펴보면 우리 사회 곳곳을 변화시키는 모든 현장에는 공익활동가가 있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면 제일 먼저 뛰어가는 것이 활동가들입니다.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찾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활동가들의 몫이었습니다. 주요한 사안에 대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향을 잡고, 어떤 대안을 만들어갈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법, 제도의 변화는 활동가들의 고민 끝에서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작은 목소리에 가장 먼저 귀 기울이는 사람들도 활동가들이었습니다. 주목되지 않는 이야기, 목소리에 스피커를 대고 세상을 향해 외쳐왔습니다. 소수자와 취약계층, 약자의 권리가 우리 사회 모두의 목소리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왔습니다. 누구도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마음, 그것이 세상을 움직여 온 힘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람, 그것도 활동가들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거리에서, 법과 제도를 만드는 현장에서, 노동의 존엄을 지키는 자리에서, 생명과 안전 사회를 만드는 현장 곳곳에서 공익활동가들은 꿀벌처럼 분주히 날아다니며 세상을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꿀벌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세상이 가끔 망각하는 것처럼, 공익활동가가 얼마나 중요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 이 사회가 눈여겨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공익활동이 처한 지속가능성, 실존하는 어려움 등은 사회 공동의 고민이기보다 활동가들의 몫으로만 남겨지고 있습니다.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의 어려움과 고민을 활동가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두어도 괜찮을까요?
기후 위기로 인해 꿀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의 삶도 위태로워질 것이라 과학자들은 예상합니다. 우리 사회 꿀벌인 공익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익활동 지속가능하지 않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더 나아갈 수 있을까요?
경기도의 변화에도 ‘늘’ 공익활동가가 있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2024년부터 공익활동가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익활동’ 주간이 아닌 ‘공익활동가’ 주간인 것은 활동가들의 삶과 가치에 좀 더 주목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공익활동가 주간의 시작은 ‘공익활동’을 이어온 ‘공익활동가’들의 사회적 성과와 가치를 인정하고, 공익활동가를 지지·응원함으로써 공익활동을 촉진하는 등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026년 공익활동가 주간은 활동의 고민을 풀어나가는 공론장, 쉼을 위한 캠프, 공익활동가 사진전, 응원 밥상, 교류의 장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경기도에서도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공익활동가 주간이 진행됩니다. 경기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과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공동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5월 29일, 2026년 경기공익활동가 주간을 준비하는 추진위원회 발대식이 열렸습니다. 본격적으로 경기지역 공익활동가들을 연결하는 여정의 시작입니다. 경기도는 31개 시·군으로 구성되어 있고, 산업 분포와 위치 에 따라 지역 특색도 다양합니다. 그만큼 공익활동가들의 활동 분야도, 활동에 대한 고민도, 활동가들의 숫자와 역량도 다양합니다. 이 다름과 차이를 엮어, 공동의 고민을 모색하는 자리로 공익활동가 주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활동가 주간의 주요 프로그램인 공익활동가대회에서 활동하며 겪는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장과 강연, 따뜻한 밥 한 끼를 통해 연대를 나누는 활동가의 식탁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최근 유행인 노래 <소문의 낙원> 가사처럼, 지친 활동가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낙원이 될 시간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손절 가득한 세상에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 ‘공익활동가’
최근 <손절사회>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깊어지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인간관계가 손익의 계산이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불편하거나, 상처 주는 관계를 쉽게 정리하고 끊어내는 소위 ‘손절’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언젠가부터 우리는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우선하며 불편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을 멀리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좀 더 나를 위하는 길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래서 더 외롭고, 고립되고, 상처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공익활동은 상처 난 시대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로 다시 잇는 일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해달라고 외치고, 잊혀져 가는 사건과 사람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다시 꺼내 놓는 일, 이윤과 효율이 아니라 사람과 사랑, 책임과 연대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일. 그 위로는 공익활동가들의 손길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익활동가의 존재가 더욱 중요합니다. 세상에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이 더 든든하고 안전하게 자기 일을 하며,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공익활동가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존중, 제도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2026년 세 번째를 맞는 공익활동가 주간을 통해 이러한 고민들이 더 많이 나누어지기를, 우리 사회가 공익활동가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 기울이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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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7
1. 광교산 자락의 야학에서 만난 1987년
1987년 6월을 떠올리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내게는 광교산 자락의 야학 교실, 퇴근 시간에 맞추어 하나둘 들어오던 학생들의 얼굴, 수업이 끝난 뒤 함께 먹던 떡볶이와 라면, 그리고 막걸리잔을 사이에 두고 나누던 어설프지만 진지했던 시국 이야기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1987년 2월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되어 군에 입대한 처지였으니, 제대 후에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연한 시절이었다. 시대는 무거웠고, 내 앞날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후배의 소개로 수원 광교산 자락에 있던 제일야학(현재는 [수원제일평생학교]라는 이름으로 인계동에서 수업을 계속하고 있다)에서 교사로 자원활동을 시작했다.
야학 교사 활동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아니, 흥미롭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곳은 학교이면서 일터였고, 교실이면서 세상과 연결된 작은 창이었다. 수업은 저녁 6시에 시작했지만, 그 시간에 맞추어 등교하는 학생은 절반 정도였다. 나머지는 수업 중간에 들어오거나, 때로는 수업이 다 끝난 뒤에야 모습을 보였다. 낮 동안 공장에서, 가게에서, 사무실에서 일하고 온 학생들이었다.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도 책상 앞에 앉으면 눈빛이 달라졌다. 늦었다고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학교에 늦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들에게 배움의 시간을 충분히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근처 분식집에 들렀다. 떡볶이와 라면, 조금 나이가 많은 학생들과는 막걸리도 마시면서 시국 이야기, 더 살기 좋은 미래 이야기, 노동자의 삶과 노동, 노동조합 등에 대한 생각도 나누었다. 나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내가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책에서 배운 민주주의가 아니라, 삶으로 겪는 불평등과 억울함 속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워가고 있었다.
2. 수원의 거리에서 마주친 야학 학생들
그해 6월, 거리는 생기를 찾은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6월항쟁은 한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된 전국적 ‘시민항쟁’이었다. 1987년 6월 10일을 기점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이어졌고, 결국 6·29선언과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역사는 교과서의 몇 줄 문장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 역사는 거리의 먼지와 최루탄 냄새, 흩어졌다 다시 모이던 발걸음, 낯선 사람과 눈을 맞추며 느꼈던 이상한 용기 속에 있다.
수원에서도 거리의 움직임을 활발했다. 어느 날은 팔달문에서 시작한 시위가 수원역 방향으로 이어졌고, 어느 날은 중동파출소 앞에서 출발해 아주대 방향으로 행진이 이어졌다. 대학생들이 앞에 있었고, 시민들이 그들을 지켜주었다. 서로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날 거리에서는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것,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 더는 침묵할 수 없다는 것. 그 마음만은 분명했다.
그런 거리에서 가끔 야학 학생들을 마주쳤을 때 나는 반가웠고 대견했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하던 민주주의가 교실 밖 거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걱정도 되었다. 학생들의 수업은 어쩌나, 혹시 다치지는 않을까, 일터에서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그래서 나는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꾸짖기도 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말했다. “선생님이 늘 말씀하셨던 민주시민의 역할을 하려고 나왔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말 앞에서 나는 선생이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 배우는 시민이었다. 교학상장이라는 말이 그날처럼 선명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내가 가르쳤다고 생각했던 말이 그들의 발걸음으로 되돌아와 나를 가르쳤다. 민주주의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며, 시민은 누가 임명해주는 자격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자리라는 것을.
시위가 마무리된 뒤 그들과 함께한 뒷풀이 자리는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했다. 우리는 여전히 가난했고, 불안했고, 앞날을 알 수 없었지만, 그날만큼은 우리가 역사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확신과 함께 우리가 사는 이 도시의 거리도 민주주의의 무대가 되고 야학의 학생들도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확인했다.
3. 2024년 12월 3일, 민주주의는 다시 질문이 되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직선제를 얻었고, 선거를 치렀고, 지방자치를 부활시켰고, 여러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되었고, 절차가 되었고, 일상의 언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을까?
2024년 12월 3일의 밤은 그 질문에 다시 답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했다.
계엄, 군, 국회, 포고, 통제라는 단어들이 한밤중에 다시 등장했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결코 자동으로 유지되는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밤과 그 이후의 광장에서 우리가 본 것은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다시 모였다. 예전의 거리에서 손수건과 유인물과 결연한 다짐으로 어깨를 맞댄 스크럼이 있었다면, 2024년 이후의 광장에는 형형색색의 빛과 노래와 새로운 언어가 있었다. 나는 그 빛 속에서 1987년 거리의 시민들을 보았다.
응원봉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시대 시민들이 자기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표현하는 언어였다. 누군가는 분노를 품고 나왔고, 누군가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나왔고, 누군가는 친구와 함께, 가족과 함께, 혹은 혼자 광장에 섰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 올린 빛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헌법을 지키자는 것, 권력은 국민 위에 설 수 없다는 것,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는 시도 앞에서 시민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
4. 달라진 광장, 달라지지 않은 시민의 민주의식
1987년의 거리와 2024년의 광장은 닮았고, 또 달랐다. 달라진 것은 많다. 1987년의 우리는 군사독재를 끝내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집회는 폭력적으로 탄압받았고, 거리에는 온통 최루탄 가스와 매케한 냄새가 짙었고 정보는 사람을 통해 전해졌다.
2024년의 시민들은 스마트폰으로 소식을 확인했고, 온라인에서 서로를 불러냈고, 각자의 방식으로 광장을 만들었다. 청년과 여성 시민들이 보여준 주체성과 창조적 표현력은 한국 민주주의가 새로운 세대의 언어를 얻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 권력은 여전히 시민의 감시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탱크와 총칼만은 아니다. 때로는 음모론이, 때로는 냉소가, 때로는 무관심이, 때로는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체념이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기념일의 언어로만 말하면서, 정작 일상의 권한과 책임은 나누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시민사회의 언어는 다음세대에게 닿고 있는가. 우리가 민주주의를 기억하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민주주의를 새롭게 만드는 일에는 둔감해진 것은 아닌가. 늘 자신에게 묻고, 가끔은 상대방에게 슬쩍슬쩍 던져보는 질문들이다.
5. 광장의 열기를 일상의 민주주의로 옮기는 일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는다. 언제나 미래를 향해 열려있고, 창조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가는 미래진행형이다. 완성되었다고 믿는 순간, 민주주의는 약해진다. 민주주의는 늘 다시 배워야 하고, 되돌아보며 점검해보아야 하며, 다시 만들어야 가야 한다. 1987년의 성취가 오늘의 민주주의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듯, 2024년 광장의 뜨거움도 내일의 민주주의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광장의 에너지는 뜨겁지만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구호는 높지만 일상은 복잡하다. 분노는 사람을 모이게 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것은 결국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열정과 창의력이다.
여기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시작된다. 시민사회는 광장의 열기를 일상의 변화로 전환해야 한다. 거리에서 확인한 주권자의 힘을 지역의 공론장, 마을의 의제, 생활 속 공익활동으로 이어가야 한다. 민주주의의 근육은 교육에서, 대화에서, 감시에서, 참여에서 자란다.
6. 기억을 살아 있는 언어로 바꾸는 시민사회
몇 가지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첫째, 시민사회는 기억을 살아 있는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6월항쟁을 기념하는 일은 ”우리는 위대했다”는 회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1987년의 거리가 오늘의 청소년과 청년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말해야 한다. 야학 학생들이 “민주시민의 역할을 하려고 나왔다”고 말했던 것처럼, 민주주의는 역사 교과목의 한 단원이 아니라, 내가 일하는 곳과 사는 동네와 사용하는 온라인 공간에서 매일 부딪히는 삶의 방식이고 습관이어야 한다.
둘째, 시민사회는 민주주의를 지역의 문제로 옮겨와야 한다. 민주주의는 시청과 도청, 구청과 군청, 주민자치회와 학교운영위원회, 복지관과 공원, 마을버스 노선과 보행로, 청년 주거와 돌봄 정책 속에 있다. 내가 낸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묻는 일, 우리 동네 조례가 누구의 삶을 바꾸는지 살피는 일, 지역일꾼의 공천과 선거가 얼마나 공정한지 감시하는 일이 민주주의의 근육을 키우는 활동이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의 가장 가까운 얼굴이다. 시민사회는 지역에서 좋은 후보를 키우고, 지방의회를 감시하고, 주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넓혀야 한다. 지방자치의 퇴보를 비판만 하지 말고 실천적인 대안을 마련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
셋째, 시민사회는 극단화에 맞서되 시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혐오와 음모론, 폭력적 선동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헌정질서를 부정하거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시도에는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시민사회는 왜 어떤 사람들이 극단적 주장에 흔들리는지도 살펴야 한다. 불안정한 삶, 고립, 불평등, 지역의 소외, 정치에 대한 불신은 극단주의가 자라는 토양이 된다. 민주주의는 단호함과 포용을 함께 필요로 한다. 파괴적 선동에는 선을 긋되, 불안한 시민을 민주주의의 언어 안으로 다시 초대하는 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시민사회는 다음세대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청년에게 참여하라고 말하면서, 이미 정해진 회의의 말석만 내어주지는 않았는가. 새로운 방식의 표현을 가볍게 여기거나, 낯선 정치 감각을 미숙함으로만 판단하지는 않았는가. 2024년의 광장은 다음세대가 민주주의를 모르는 세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었고, 다른 언어로 표현했으며, 다른 감각으로 광장을 만들었다. 시민사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과 함께 배우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계승은 기억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다. 권한을 나누는 것이다.
7. 다시, 제일야학의 학생들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제일야학의 학생들을 떠올린다. 늦은 시간에 교실로 들어오던 학생들, 수업이 끝난 뒤 분식집에 모여 앉던 학생들,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민주시민의 역할을 하려고 나왔다”고 말하던 학생들. 그들은 내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함께 배우고 서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민주주의는 상호 학습과 실천의 과정이다. 때로는 젊은 세대가 오래된 세대를 가르치고, 거리의 시민이 제도를 가르치며, 광장의 빛이 정치의 어둠을 가르친다.
1987년의 거리와 2024년의 광장으로 이어지는 사이 한국 민주주의는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고, 멈칫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후퇴의 위험 앞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민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다시 나타났다.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노래를 부르고, 다른 도구를 들었지만, 시민은 다시 광장을 만들었다. 우리가 이어가야 할 것은 과거의 형식이니 기억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주의의 방식과 감각이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느끼는 감각, 권력이 국민 위에 설 수 없다고 말하는 감각, 나와 다른 사람의 권리도 함께 지켜야 한다는 감각, 내 삶의 문제를 공동의 의제로 바꾸는 감각. 그 감각이 세대를 건너 이어질 때 민주주의는 살아 있다.
8.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기에 희망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 말은 절망의 문장이 아니다. 오히려 희망의 문장이다.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참여할 수 있고, 다음세대가 새롭게 만들 수 있으며, 시민사회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광장에서 집으로 돌아온 시민들이 다시 외로운 개인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시민사회는 곁에 있어야 한다. 분노가 냉소로 식지 않도록, 참여가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기억이 다음세대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도록, 지역 곳곳에 민주주의의 작은 교실과 공론장과 실천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거대한 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야학의 교실에도 있었고, 수원의 거리에도 있었고, 2024년의 광장에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사는 동네, 일터, 학교, 온라인 공간, 시민단체의 작은 회의실 안에 있다. 그곳에서 민주주의는 오늘도 묻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이어갈 것인가. 그리고 다음세대와 함께 어떤 민주주의를 새로 만들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일, 그것이 6월항쟁을 기념하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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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7※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글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내용 중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_편집자의 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2030 여성이 있다면, 사람들은 ‘있는 집 딸’이라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 로스쿨생 중 압도적으로 가난해서 국가장학금으로 공부해 변호사 시험 합격증을 받은 사람이 있다.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이 “대포통장 사기 사건”이었고, 그 ‘진흙탕 바닥’이 인생의 길을 가르쳐 주었단다.
안산의 새내기 법조인, 정민지 변호사의 꿈과 포부를 들어보자.
Q 시간 내 줘서 고맙다. 자기소개부터 부탁한다.
나는 대한민국 30대 여성이고 한 달 전에 제15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까, 즐거운 상상 속에 지내고 있다. 목회자 부모의 세 자녀 중,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낀 외딸이다. 부모가 나를 고명딸이라며 떠받들어 키우지도 않았고, 오빠랑 연년생이라 쌍둥이처럼 자랐다. 그래서인지 태어난 순서로는 장녀가 아닌데, 현실에서는 ‘K-장녀’로 자랐다. 진짜 장녀들이랑 만나면 말이 되게 잘 통하더라. 나 또한 나를 항상 큰딸로 정체화한다.
Q 살면서 지금처럼 신나고 여유 있는 시기가 없었을 거 같다. 축하합니다.
맞다. 대한변협이 하는 합격자 연수를 들으면서, ‘의식적으로’ 천천히, 내가 가고 싶은 일자리를 찾아보려 한다. 안산시 공무원 3년 하고 2021년 로스쿨에 진학했으니, 지금 5년 만에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려 한다. 공무원은 대학 졸업하고 당장 돈을 벌어야 해서 시작했었지만, 이제는 돌고 돌아 내가 하고 싶은 거, 해야 하는 일, 살고 싶은 삶을 찾았다. 아무 데나 들어가서 대충 시작하기 싫어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찾고 있다. 굉장히 설레고 기대된다.
Q 안산시 9급 일반 행정직으로 3년 일하고 그만두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
가정형편 상 취준생으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어서, 졸업 전에 합격해 놓고 졸업과 함께 일했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내 길을 찾아볼 작정이었다. 민원 업무든 행정사무든 일은 잘 해냈지만 조직 문화가 힘들었다. “이제 공무원 됐으니, 시집만 잘 가면 된다”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어린 여성이라고 친절, 애교, 미소 같은 태도 요구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남자 상사랑 있을 땐 전문 직업인이 아니라 위안을 줘야 할 거 같은, 내가 너무 ‘대상화’되는 위치에 놓이더라. 그때마다 뻔뻔하게 받아칠 짬밥이랄까 요령이랄까, 그게 없어서 미치겠더라.
내 능력에 비해 너무 소박한 보상과 인정만 주어지는 현실에 회의감이 컸다. 누군가의 권력과 위계에 따르기보다 내 목소리를 내며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 2019년 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다큐 영화
Q 청소년기부터 변호사를 꿈꾼 건 아니었나 보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하다.
초등학교 통지표에 ‘용모 단정하고 질서를 잘 지키나 의사 표현이 부족함’이라고 적힌 소심한 모범생이었는데, 신기하게 운동할 땐 날아다녔다. 아빠가 형제들이랑 차별 없이 축구, 야구, 배구, 농구에 자전거까지 다 가르쳐줬다. 우리집에서 유일한 사교육으로 수영, 태권도도 배웠다. 덕분에, 나는 운동선수가 될까 한 적도 있다. 몸을 내 마음대로 통제하는 독보적인 아이였다. 그러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운동선수가 될 사람은 이미 여기 없어야 한다고 툭 던지는 말에 ‘나는 늦었구나’ 싶어 마음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고교 비평준화 시절 안산 동산고에 진학했다. 입학하자마자 바닥을 치는 성적에 충격을 받았다. 가장 어려웠던 건 수학이었는데, 1년 내내 슬럼프였다. 1학년을 마친 후 어떻게든 수학을 정복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부모의 교육철학과 경제적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학원이나 과외 없이 공부했던 나에게 선택지는, ‘자기 주도적으로 문제 해결하기’ 그것뿐이었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겨울방학 내내 수학에만 매달렸다. 그런데 고2 첫 모의고사에서 수학을 반타작했다. 좌절감에 울고 있는 나에게 아빠는 “공부를 똑바로 안 한 거다”라며 비수를 꽂았다. 그 말에 오기가 생겼는지 나는 계속 밀고 나갔다. 지난한 자기 싸움 끝에 수학을 가장 잘하는 과목으로 만들며 정시로 서울의 한 사범대에 합격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스스로 방법을 찾아가는 공부 맛을 청소년기에 익힌 셈이다.
Q 대학 생활과 청소년기 공부는 달랐을 거 같다. 자기 길 찾기는 어땠나?
모범생으로만 살아서인지, 대학에서 스스로 길을 뚫는 게 무서웠다. 등록금은 국가 장학금으로 해결됐지만 용돈은 벌어 써야 했다. 안산에서 2시간 통학하며 공부하고 알바하느라 늘 시간이 부족했다. 4학년 앞두고, 진로도 안 잡히고, 학점도 별로고, 휴학하고 돈을 좀 벌며 길을 찾고자 했다. 마침, 월급 200만 원에 물류창고 알바 공고가 뜨더라.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엄마가 간암 수술 후 퇴사해 요양 중이었고, 아빠는 투잡을 뛰며 목회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완벽한 결과를 내놓고 싶다는 강박에 쫓기고 있었다.
돈에 혹하고, 출입증 등록용이라는 말에 속아, 체크카드와 통장과 비밀번호를 넘겨주고 말았다. 이상하다 싶었을 땐 이미 내 통장이 보이스피싱 대포통장으로 쓰인 후더라. 나도 모르는 사람들 이름으로 수백만 원씩 돈이 들어왔다 빠진 기록을 다음 날 확인했다. 가해자 신분이 되어 버렸다. 빨간 줄이 그어질 대형 사고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 바닥을 경험했다. 이 사건으로 전혀 계획에 없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되면서 내 인생의 방향이 급선회했다.
Q 대포통장 사건이, 정민지라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줬나?
그전까지는 보이스피싱 뉴스를 보면, 사람들이 조심성이 없어서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궁지에 몰려 휘말리고 보니, 내 뜻대로 안 되는 삶의 영역이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요양 중이던 엄마가 내 소식을 듣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소통이 부재해서 일어난 문제”라고 하더라. 혼자 완벽하게 잘하고 결과만 “짜잔!~” 보여주려 하지 말고 못난 모습도 나눠야 함을 깨달았다. 통장이 정지되고, 경찰조사를 받고, 검찰에서 ‘혐의없음’으로 불기소 결정을 받기까지 반년을 보내며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인생 바닥에 던져질 때 현실을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그 바닥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Q 공무원을 그만두고 로스쿨에 도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나도 “로스쿨은 돈스쿨이지 내가 어떻게 가”라고 생각했었다. 3년 학비와 생활비 하면 억 단위가 든다. 나는 로스쿨생 중 압도적으로 가난했다. 소득 분위 장학금을 신청할 때 부모 재산이 들어가는데, 우리 부모는 수입과 재산이 바닥이었다. 엄마는 간암 수술 후 퇴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공부하느라 고정 수입이 없었고, 아빠도 미자립 교회의 투잡 목사였다. 그런데 이 사정들이 역설적으로 완벽히 증명되면서 나는 3년 내내 전액 국가 장학금으로 공부했다. “엄마 아빠 가난한 김에 제대로 가난해서 고맙다.”라고 농담을 즐길 정도였다.
Q 로스쿨 학생들도 사교육(학원 인터넷 강의) 한다고 들었다.
변호사 시험 시장의 현실 이야기와 자기 주도적 공부 과정도 들려달라.
로스쿨은 변호사 시험(변시) 통과를 위한 ‘입시 학원’으로 전락했다고들 한다. 대부분 사법시험 출신이거나 학계에만 있던 교수들 강의에 대한 만족도가 학원보다는 낮았다. 대다수 학생이 수업 시간에 뒤에 앉아 대형 학원 인터넷 강의(인강)를 듣거나 학원 교재를 보는 게 현실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고집스럽게 교수님 강의와 책을 붙잡고 독학을 밀고 나갔다. 인강에 쓸 돈도 없거니와, 처음부터 하나하나 스스로 해나가는 공부가 나에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령이란 걸 모르니 법의 1부터 100까지가 다 중요해 보여서 공부 분량이 살인적일 수밖에 없다. 삼수 때까지도 “이 방법이 맞나?” 수없이 의심하며 두려움을 늘 끼고 공부했다. 독학 합격은 보편적인 레퍼런스가 없으니, 스스로 실험하고 시도하며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해야 했다.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도 완전히 자신할 수 없었는데,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Q 그 억눌린 멘탈을 어떻게 붙잡아 끝까지 버텨낼 수 있었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있다면 이야기해 달라.
시험 점수가 안 나오면 흔들리다가도 “결국 내가 해야 끝나는 싸움”이라며 크게 울고 금방 일상으로 돌아왔다. 특히 부모님과 교회 공동체와 토론 모임에서 내 취약함과 어려움을 나눴다. 가족이 무조건적인 안전 기지였다. 그리고 삼수 중에도 매월 3개의 ‘페미니즘 토론 모임’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법조계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이라, 공부하다 보면 ‘엥? 이게 말이 돼?’ 싶은 판례가 많더라. 그런 판례로 쌓인 스트레스를 토론 모임에서 “거지 같은 법리들이다!”라고 소리 지르고 날카로운 성평등의 칼을 벼렸다. 멀리 보는 자기주도적 공부였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무래도 나의 엄마다. 내가 속한 여성단체 회원이고 내가 참여하는 토론 모임들의 모임장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영화를 모녀가 같이 보고 토론했다. 엄마는 “너도 저런 길을 갈 수 있다”라며, 영화를 내 현실로 끌어와 주었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책 읽고 질문하고 글 쓰는 사람이다., 작가요 활동가로 사는 여성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엄마가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자원이다.
Q 수험생들에게, 꿈을 찾아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노하우가 있다면.
2030 여성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책도 추천해 달라.
수험생들에겐 “내가 왜 이 힘든 길을 가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절대 놓지 말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답 찾기 공부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겠다는 배짱을 가지길 바란다. 비혼 여성으로서 한국 사회를 보면 숨이 막힐 때가 많다. 여전히 ‘이성애적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사회다. 2030 여성들이 쉽게 비혼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그 깊은 고뇌를 사회가 모르는 거 같다. 소수자가 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엄청난 용기를 내는 거다. 가부장제 구조는 여성을 주체가 아니라 인구수를 채울 ‘애 낳는 도구’로 취급하는 거 같다, 젊은 여성들이 출산과 자아실현 중 하나를 강제 포기해야 하니 ‘여성 우울’을 겪는다. 국가는 다양한 생활동반자를 법적 가족으로 확장해야 한다. 비혼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재생산권을 보장해야 한다. 법조인이자 페미니스트로서 내 과제이자 살고 싶은 세상이다.
이 맥락에서 역사 속 금기를 깨고 주체적으로 길을 개척한 여성 서사를 생생하게 복원해 낸 역사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 《붉은 궁》,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추천하고 싶다.
Q 마지막으로 정민지 변호사의 미래 설계와 포부를 이야기해 달라.
실제 법조 생태계에서 기득권의 목소리를 더 키우는 데 법률 기술이 쓰이는 게 보이더라. 나는 침묵 당하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이크로 일조하고 싶다. 좋은 동료들과 연대해서 누구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안전한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싶다.
그리고 부모님께 말하는 포부가 있다. 두 분은 젊은 날부터 사람들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약한 데로 가서 힘을 나누며 사느라 평생 가난하다. 내가 돈을 벌면 건물을 지어서, 한쪽에는 엄마가 집필하고 책을 공유하는 사랑방이자 ‘작가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다. 다른 한쪽에는 아빠가 돈 걱정 없이 소신을 펼치는 목회 공간을, 그 위에 내 ‘변호사 사무실’을 갖고 싶다. 지역에서 여성단체와 연대하는 변호사로 살 것이다.
나아가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갈 주체적인 실험으로서, 나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다정한 파트너를 만나 내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확장의 경험도 기꺼이 해보고 싶다. 5년 후, 10년 후 내가 이 포부대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이 꼭 검증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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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0※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글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내용 중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_편집자의 말

안산초지종합사회복지관 온마을 네트워크 자원봉사단 이야기
"다음에 또 오지요?"
활동이 끝나고 어르신 한 분이 봉사자의 손을 잡았습니다.
잡은 손을 놓지 않으시면서 한참 뒤에야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오지요?"
봉사자는 웃으며 "다음 달에 또 올게요." 라고 하자 그 말 한마디에 어르신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기다리는 날이 생긴 것입니다.
온마을 네트워크는 그렇게, 기다려지는 날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1. '온마을'이라는 이름에 담긴 두가지 바람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자리한 안산초지종합사회복지관은 지역 주민의 삶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복지기관입니다. 어르신 돌봄, 아동·청소년 교육, 가족 상담 등 다양한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지역사회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는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데 꾸준히 힘을 쏟아온 곳이기도 합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초지복지관은 2026년 봄, 지역 주민 스스로가 기획자이자 실행자가 되어 시니어를 위한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는 자원봉사 모델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바로 '온마을 네트워크'입니다.
'온마을'이라는 이름 안에는 두 가지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온 마을 사람이 함께한다는 뜻, 그리고 온기로 가득 찬 마을을 만들겠다는 뜻. 이 두 가지가 겹쳐진 이름처럼, 온마을 네트워크는 마을 안의 사람들이 서로를 살피고 돌보는 공동체의 모습을 꿈꾸며 출발했습니다.
이 글은 그 온마을 네트워크의 주민기획단 다섯 명이 어떻게 모였고, 어떤 마음으로 어르신 곁에 서 있는지를 기록한 현장 이야기입니다.

2.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 5명이 스스로 모인이유
초지복지관은 2026년 2월~3월, 시니어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분을 찾는 주민기획단모집을 시작했습니다. 나이도, 직업도, 살아온 방식도 서로 다른 다섯 명의 사람이 이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복지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지역사회 활동 경험이 풍부한 중장년 봉사자, 아이를 키우는 주부, 재능을 나누고 싶은 직장인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였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무언가를 직접 해보고 싶다는 마음.
처음 모인날, 다섯명은 서로의 이름을 알아가며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기획을 맡을게요”,“홍보는 제가 해볼까요?”, “ 현장진행은 제가 이끌게요,”,“ 물품준비랑 기록은 제가 챙기겠습니다.” 초지복지관과 함께 준비 기간을 거치면서, 각자의 강점을 나누고 역할을 분담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온마을 네트워크가 단순한 봉사 모임을 넘어 체계적인 팀 운영 방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역할을 찾고 채워나가는 방식. 그 안에서 봉사자들은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빠르게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3. 어르신을 위한 세 가지 선물 — 음악, 두뇌, 손끝
온마을 네트워크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됩니다. 단순히 시간을 채우는 활동이 아니라, 어르신의 몸과 마음과 손끝을 모두 살피는 통합적인 돌봄 프로그램입니다.
첫 번째, 음악을 활용한 신체활동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리듬에 맞게 박수를 치거나 간단한 동작을 따라 하는 이 시간은, 어르신들이 가장 즐겁게 참여하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음악은 기억을 깨우고, 감정을 움직이며, 몸을 자연스럽게 활성화시킵니다. 치매 예방과 우울감 해소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봉사자들은 어르신들이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동작의 난이도를 조율하고, 친숙한 옛 노래와 트로트 곡을 함께 선정하는 등 매번 세심하게 준비합니다.
음악이 흐르는 순간, 어르신들의 표정은 달라집니다. 쑥스럽게 앉아 계시던 분도 노래가 시작되면 어느새 몸을 흔들고 손을 두드리십니다. 이 짧은 순간이 쌓여 활동의 즐거움이 되고, 다음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힘이 됩니다.

두 번째, 두뇌를 자극하는 퀴즈 타임
상식 퀴즈, 단어 맞추기, 그림 연상 퀴즈, 간단한 계산 문제 등 다양한 형식의 문제들을 통해 어르신들이 두뇌를 활발히 사용하도록 돕는 시간입니다. 뇌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는 경험이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의학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봉사자들은 너무 어렵지도, 너무 단순하지도 않은 적절한 난이도의 퀴즈를 매 회 새롭게 준비하며 어르신들의 집중력과 성취감을 동시에 높이고 있습니다.
정답을 맞히셨을 때 어르신의 눈이 반짝이는 그 순간을 위해. 조심스럽게 앉아 계시던 분이 시간이 지날수록 먼저 손을 들어 답을 외치시고 짓는 함박웃음이 봉사자들에게는 가장 큰 보람이 됩니다.

세 번째, 소근육을 활용하는 만들기
손을 사용해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활동은 소근육 발달과 집중력 향상에 효과적이며, 완성된 작품을 보는 성취감은 어르신들의 정서적 안정에도 크게 기여합니다. 봉사자들은 재료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챙기며, 어르신이 손을 움직이기 어려운 부분에서는 나란히 앉아 함께 작업합니다. 이 시간이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어르신과 봉사자가 나란히 앉아 손을 맞대는 교감의 시간이 되도록 늘 신경 씁니다.

이 세 가지 프로그램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을 깨우고, 두뇌를 자극하고, 손끝으로 표현하는 흐름이 하나의 활동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어르신들은 한 시간 남짓의 프로그램 안에서 몸과 마음이 함께 활기를 찾게 됩니다.
4. 스승의 날, 양말목 카네이션으로 전한 마음
스승의 날을 앞두고 진행된 양말목 카네이션 만들기 시간이었습니다.
양말목 공예는 버려지는 양말 자투리 천, 즉 '양말목'을 활용하여 꽃이나 소품 등을 만드는 업사이클링 공예입니다. 버리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친환경 활동으로, 만들기가 어렵지 않으면서도 결과물이 아름다워 어르신들에게도 인기가 높습니다.
봉사자들은 어르신들을 생각하며 함께 양말목으로 카네이션을 직접 만들고, 그것을 인생의 선배님이자 인생의 스승님인 어르신들께 선물로 드리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꽃 한 송이를 두 손으로 받아 드신 어르신 몇 분은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이 카네이션 하나가 단순한 공예 작품이 아니라, 곁에 있어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나한테 주는 거예요? 참 예쁘다... 고마워요."
꽃을 받아 드신 어르신의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어르신들은 그저 받기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직접 손으로 행운을 뜻하는 네잎클로바를 만들며 세대와 세대가 마음을 나누는 진짜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양말목 클로바만들기는 만들기 프로그램이기도 했지만, 환경 상식을 전하는 에코 활동이기도 했습니다. 버려지는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업사이클링의 의미를 어르신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환경에 대한 인식을 일상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5. 활동을 넘어 — 환경 상식과 따뜻한 안부 인사
온마을 네트워크 활동이 다른 봉사 프로그램과 구별되는 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매 회 활동 안에 환경 관련 상식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리배출 방법, 일상 속 에너지 절약 습관, 친환경 소재 이야기 등 생활 밀착형 환경 정보를 짧은 코너로 구성해 어르신들과 함께 나눕니다. 어렵고 딱딱한 환경 교육이 아니라, 우리 동네 이야기처럼 친근하게 전달하는 방식이어서 어르신들의 반응도 좋습니다. 환경이라는 주제가 봉사 활동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 온마을 네트워크만의 특색 있는 접근입니다.
또한 봉사자들은 활동 시간 안에서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와 일상을 자연스럽게 살핍니다. "요즘 잘 주무세요?",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세요?", "지난주엔 외출도 하셨어요?" 이런 일상적인 말 한마디가 어르신들에게는 진심 어린 돌봄으로 느껴집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될 위험이 높은 노인 1인 가구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봉사자의 존재 자체가 안심의 이유가 됩니다. 온마을 네트워크는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프로그램 운영을 넘어, 지역사회 내 시니어 돌봄의 촘촘한 연결망 역할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6. 2회 만에 느낀 감동 — 만족도와 보람
온마을 네트워크는 한 달에 걸친 준비 기간을 거쳐 202년 봄, 첫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 총 2회의 정규 활동이 진행되었습니다. 아직 시작 단계임에도 활동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르신들은 "기다려지는 날이 생겼다"고 하십니다. 봉사자들은 "이런 보람은 처음"이라고 말합니다. 준비하고, 진행하고, 마무리하고, 다음 회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봉사자들 사이의 팀워크도 눈에 띄게 탄탄해졌습니다.
참여 어르신들의 반응도 대단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앉아 계시던 분이 시간이 지날수록 먼저 손을 들어 답을 외치시고, 옆 어르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만들기 작업에 열중하시는 모습. 그 변화가 봉사자들에게 가장 큰 보람이 됩니다.
온마을 네트워크는 202년 11월까지 월 2회 정기 활동을 이어갑니다. 앞으로 더 많은 어르신들을 만나고, 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마을의 온기를 더해나갈 예정입니다.
봉사자들은 한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이 활동이 어르신들에게만 선물이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삶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고. 봉사란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받는 것임을 온마을 네트워크는 매 회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7. 다섯 명의 이야기 —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사람들
온마을 네트워크를 이끄는 다섯 명의 봉사자는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활동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 명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모두가 받는 봉사가 아닌, 함께 성장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의 지혜를 배우고, 팀원들과 기획하며 협력하는 법을 익히고, 낯선 어르신께 먼저 말을 건네며 용기를 키웁니다.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가 이 젊은 봉사자들에게는 살아있는 교과서가 됩니다.

8. 마을은 결국 사람으로 이루어집니다.
초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지역사회 기반의 시니어 돌봄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습니다. 국가와 지방정부의 공식 복지 서비스만으로는 모든 어르신의 일상적 필요를 채우기 어렵습니다. 이웃이 이웃을 살피고, 마을이 마을의 구성원을 돌보는 공동체 돌봄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온마을 네트워크는 바로 그 빈자리를 채우는 실천입니다. 시설이나 제도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연결로 만들어지는 돌봄. 전문 복지사가 아닌 마을 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프로그램. 이것이 가진 힘은 친숙함과 지속성에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낯선 전문가보다 익숙한 이웃에게 더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봉사자 자신도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성장합니다. 온마을 네트워크는 어르신과 봉사자 모두에게 "내가 이 마을의 주인이자 구성원"임을 실감하게 해주는 공익적 실천입니다.
화려한 인프라나 큰 예산 없이도, 사람의 마음과 시간이 모이면 지역사회가 달라진다는 것을 온마을 네트워크는 매 회 직접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모여 따뜻한 마을이 됩니다
어르신들의 웃음 속에, 눈가의 눈물 속에, 그리고 "다음에 또 오지요?" 라는 한 마디 속에 이 활동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들의 마음이 모여 더 따뜻한 마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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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0※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글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내용 중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_편집자의 말

마이크 앞에 선 사람들
수요일 오후, 수원공동체라디오 스튜디오 안에 시민 한 명이 앉아 있다.
방송 경력도 없고, 유명인도 아니다. 그냥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다. 마이크 앞에서 잠깐 숨을 고르더니,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래된 수원 통닭거리 이야기, 어릴 적 팔달문 근처를 뛰어다니던 기억, 요즘 장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골목 가게 사장님의 말.
그 목소리가 96.3MHz를 타고 수원 전역으로 흘러나간다.
스마트폰과 유튜브, 짧은 영상 콘텐츠가 일상이 된 시대다. 정보는 빠르게 소비되고 사람들의 관심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 속에서 라디오는 오래된 매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마음을 전할 수 있고, 화려한 영상이 없어도 사람의 일상과 감정을 연결할 수 있다.
특히 지역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전할 수 있는 매체가 바로 공동체라디오다.
경기도 수원시에 시민이 직접 참여해 지역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송국이 있다.
수원공동체라디오 SoneFM.
어린이와 청소년, 시니어, 마을활동가, 자영업자, 문화예술인 등 다양한 시민이 방송 제작에 참여한다.
누군가는 직접 원고를 쓰고, 누군가는 인터뷰를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음악을 선곡하고 오디오 편집을 배운다.
시민의 삶이 그대로 방송 콘텐츠가 되는 곳이다.
이번 취재에서는 수원공동체라디오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그리고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수원의 첫 공동체라디오, SoneFM의 시작
수원공동체라디오 SoneFM은 수원의 첫 공동체라디오 방송이다.
2021년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FM 96.3MHz 주파수 허가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됐다.
같은 해 ‘수원마을공동체미디어사회적협동조합’이 설립되었고, 시민이 참여하는 지역 미디어 플랫폼 구축이 추진됐다.
공동체라디오는 상업성과 청취율 중심의 일반 방송과는 방향이 다르다.
지역 주민이 직접 방송을 제작하고 지역 현안을 이야기하며, 마을의 문화와 삶을 기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즉, 시민이 단순한 청취자가 아니라 콘텐츠 생산자로 참여하는 방송이다.
수원공동체라디오 역시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초기에는 방송 장비 구축과 스튜디오 마련, 방송 제작 교육 등 기반을 만드는 과정과 함께 시민을 대상으로 한 방송 교육 프로그램과 미디어 교육도 함께 진행되며 공동체 미디어의 토대를 다져나갔다.
2022년에는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다. FM 개국 이전 단계였지만 시민들은 인터넷 스트리밍을 통해 방송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마을 소식, 지역 인터뷰, 음악 프로그램, 생활 정보 등이 하나둘 만들어지면서 지역 주민과의 연결도 점차 확대됐다.
그리고 2023년 7월 14일, 수원공동체라디오는 FM 96.3MHz 정식 개국을 알렸다.
시민들이 직접 만든 목소리가 실제 전파를 통해 수원 전역에 송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방송 개국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지역 주민 스스로 지역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공미디어가 등장한 순간이기도 했다.
현재 수원공동체라디오는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방송 내용은 지역 정보와 생활문화, 음악, 상권 홍보, 재난방송, 마을 소식 등 시민 생활과 밀접한 주제로 구성된다.

마이크 앞에 서는 법을 가르친다 — 방송활동가 양성 교육
수원공동체라디오는 단순히 방송만 송출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 미디어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사진 속 ‘방송활동가 10기 모집’ 포스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기적으로 시민 대상 방송 제작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방송활동가 과정은 5월6일부터 6월17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2시부터 4시까지 운영되며,
방송 기획부터 대본 작성, 라이브 방송 실습, 오디오 편집까지 실제 방송 제작 과정을 체계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교육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차시 방송 기획, 2차시 방송 대본 작성, 3·4차시 라이브 방송 실습, 5차시 오디오 편집, 6차시 콘텐츠 제작과 수료식. 6주 동안 아무것도 모르던 시민이 실제 방송을 만들어 내보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교육은 단순한 기술 전달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방송 제작을 배우는 과정 속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일상과 경험을 콘텐츠로 바라보게 된다. 평범한 골목길 이야기, 오래된 시장의 풍경, 지역의 작은 가게, 주민들의 삶과 추억이 방송 소재가 된다. 거창한 뉴스보다 더 깊은 공감과 지역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공동체라디오의 교육은 단순한 기술 전달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방송 제작을 배우는 과정 속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일상과 경험을 콘텐츠로 바라보게 된다.
실제로 방송활동가 교육에 참여한 시민들 가운데는 이후 시민PD로 활동하거나 지역 행사와 마을 기록 활동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마이크 앞에 처음 앉던 날의 긴장이, 어느새 지역을 기록하는 힘이 된다.
목소리 - 지역을 기록하는 또 하나의 방식
수원공동체라디오는 단순한 오디오 방송이 아니다. 지역을 기록하는 또 하나의 아카이브 역할을 하고 있다.
대도시에서는 빠른 개발과 변화 속에서 오래된 마을의 기억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쉽게 사라지곤 한다. 그러나 공동체라디오는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긴다.
누군가는 동네 오래된 시장 이야기를 전하고, 누군가는 어린 시절 수원의 모습을 기억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현재의 마을 문제와 변화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콘텐츠는 시간이 지나면 지역의 역사 자료이자 공동체 기록으로 남는다.
특히 수원은 화성과 전통시장, 오래된 주거지와 신도시가 공존하는 도시다. 전통과 현대가 함께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세대와 문화가 섞여 있다. 공동체라디오는 이러한 수원의 복합적인 모습을 시민의 목소리로 담아낸다.
지역 예술인과 소상공인들에게도 방송은 중요한 홍보 창구가 된다. 공연 정보와 지역 문화행사, 작은 가게 이야기 등이 방송을 통해 소개되면서 지역경제와 문화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이는 상업 방송에서 쉽게 다루지 않는 지역 밀착형 콘텐츠라는 점에서 공동체라디오만의 가치다.
사람 냄새 나는 방송이 필요하다.
오늘날 미디어 환경은 거대 플랫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사람들은 전국 단위, 글로벌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소비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이야기와 이웃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공동체라디오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역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볼수 있다.
수원공동체라디오 역시 시민이 직접 지역 이야기를 만들고 공유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단순한 취미 방송이 아니라 주민 참여 민주주의와 공동체 문화 형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세대별 의미도 다르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 소외되기 쉬운 시니어 세대에게 공동체라디오는 새로운 소통 공간이 되고 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활용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도 라디오라는 친숙한 매체를 통해 지역사회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도 공동체라디오는 중요한 경험이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콘텐츠로 만들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과정은 표현력과 소통 능력을 키워준다.
무엇보다 공동체라디오는 사람을 중심에 둔 방송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보다 사람의 일상과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방송이기 때문이다.


96.3MHz ‘누구나 함께하는 라디오’를 향하여
사진 속 문구처럼 수원공동체라디오 SoneFM은 ‘96.3MHz, 누구나 함께하는 라디오’를 지향하고 있다.
이 문장에는 공동체라디오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다. 방송은 특정 전문가나 유명인만의 영역이 아니라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수원공동체라디오는 지역 주민들에게 열린 공간이 되고 있다. 시민들은 방송 교육을 받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지역사회에 전하고 있다.
또한 공동체라디오는 지역 네트워크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공동체 활동가와 시민단체, 문화예술인, 소상공인 등이 방송을 통해 연결되며 새로운 협력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앞으로 공동체라디오는 단순한 FM 방송을 넘어 팟캐스트와 유튜브, 온라인 스트리밍 등 다양한 플랫폼과 연계될 가능성도 크다. 지역 기반 콘텐츠가 디지털 플랫폼과 결합하면 더 많은 시민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을공동체 활동가와 시민단체, 문화예술인, 소상공인 등이 방송을 통해 연결되며 새로운 협력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라디오가 단순한 기술이나 플랫폼이 아니라 지역 주민이 직접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공감하는 과정 자체가 공동체라디오의 가장 큰 가치라는 것이다.
모두의 목소리를 담아, 연결하는 소리
수원공동체라디오 SoneFM은 단순한 지역 방송국이 아니다. 시민의 일상과 지역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공동체 플랫폼이다.
특히 시민이 직접 방송 제작에 참여하고, 다양한 세대가 함께 콘텐츠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공동체라디오는 지역사회 소통의 중요한 모델이 되고 있다.
수원공동체라디오 SoneFM의 96.3MHz 전파에는 단순한 방송 신호만이 아니라 수원 시민들의 삶과 기억,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사람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한 힘을 가진다.
그 목소리가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전파가 닿는곳 마다 공동체는 조금 더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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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0※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글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내용 중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_편집자의 말

1. ‘가짜 뉴스’라는 말 올바른 ‘신호’를 놓치게 할 수도 있다!
2026년 5월 8일 금요일 오후 2시, 경기도여성비전센터 206호에 6기 아카이브 에디터들이 3월에 있었던 발대식 및 양성 교육 이후 다시 모였습니다. 이날 역량강화 교육은 수원에 있는 경기도여성비전센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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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5※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글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내용 중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_편집자의 말

작은 가게에서 시작된 변화, 아이들의 삶에 닿다 - 스시히로미 이형락 대표의 일상 속 공익 실천
“그 아이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아이의 ‘첫 초밥’이 제가 만든 것이라면,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익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우리는 공익을 이야기할 때 종종 거창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현장이나 조직화된 캠페인, 혹은 이름이 알려진 활동가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면 공익은 어딘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조금 다른 곳에서 시작됩니다. 의정부의 한 초밥집, 그리고 그곳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는 한 사람의 실천입니다.
스시히로미를 운영하고 있는 이형락 대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저는 그냥 초밥집 하는 사람입니다.”
짧은 말이지만, 그 안에는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역아동센터를 찾아가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준비하고 만들어 아이들에게 건네는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처음, 그냥 지나칠수 없었습니다.
이 활동은 특별한 계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개인적인 기억에서 출발했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시골에서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서울에 와 보니까 다르더라고요.”
그는 장사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초밥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아이들’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고아원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구조적인 이유로 지속적인 활동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지역아동센터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고, 그 선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계획보다 마음이 먼저였다는 점입니다. 한 번의 마음이 반복되면서 지금의 활동이 만들어졌습니다.

음식이 아니라 경험을 줍니다.
이형락 대표의 활동에서 눈에 띄는 점은 단순한 나눔이 아니라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아이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직접 초밥을 만들어 보게 하며 ‘1일 요리사’ 상장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돈은 금방 사라집니다. 그런데 경험은 남습니다.”
현재는 여건상 체험을 줄이고 식사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아이들이 직접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해본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묻자 그는 한 아이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자기 것을 먹지 않고 할머니께 가져다드리겠다고 싸 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그는 결핍이 아니라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면 잘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익활동은 단순히 주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따뜻한 마음을 발견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3년 넘게 활동을 이어오는 이유를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초밥 한 접시는 하루, 이틀의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즐거워하며 웃는 모습은 제 마음속 오래도록 따뜻한 행복으로 남습니다."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자신에게 더 깊이 남는다고 합니다. 그는 이 감정을 '중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못 갔을 때 미안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는 봉사 일정을 먼저 정하고 나머지 일정을 맞추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공익활동이 삶의 일부가 된 것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 된 모습입니다.

혼자 잘났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이형락 대표는 자신의 활동을 개인의 선행으로 보지 않습니다.
“제가 혼자 하는 일이 아닙니다. 가게 손님들이 함께하는 일입니다.”
손님들이 지불한 금액의 일부가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직원들과 함께 준비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이 활동은 자연스럽게 공동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같이 하는 거지, 혼자 잘났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에는 공익이 개인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에게 공익의 의미를 묻자 그는 간단하게 답했습니다.
“자기 만족입니다. 그게 아니면 못 합니다.”
공익은 의무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느껴야 이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의 말은 공익활동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자영업자 역시 공익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영업자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세금을 내고,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현실적인 조건도 함께 이야기합니다.
“장사가 잘 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여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공익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유지되지 않고, 현실과 구조가 함께해야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실천을 더 단단하게 만듭니다.
초밥 한 접시가 향하는 곳
아이들을 만나온 시간은 이형락 대표의 시선을 조금씩 넓혔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더 많아졌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특히 그는 최근 탈북민에 대한 고민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탈북민분들도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라도 도와보고 싶습니다.”
이 생각은 별도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온 나눔 속에서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초밥을 만들어 주던 경험이 ‘누구를 더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그 시선이 더 넓은 사회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즉, 초밥 나눔은 하나의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했는가
이형락 대표는 거창한 변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매달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했는가.”
공익은 어쩌면 거창한 일이 아니라, 오래 이어지는 작은 실천일지도 모릅니다. 초밥 한 접시가 세상을 바꾸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접시가 누군가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또 다른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아이의 첫 초밥이 제가 만든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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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1※ 「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글의 내용은 경기도민 에디터가 직접 취재·작성한 것으로, 내용 중 일부 의견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_편집자의 말

소리가 비워진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
- 수어 연극 〈영지〉 4기를 보고
2026년 5월 3일 / 모두 예술 극장

모두예술극장 입구
1. 걱정하는 자의 입장
나는 수어통역사다. 동시에 수어로 노래하는 지구인수어공연단의 대표이기도 하고, 극단 유혹에서 무대에 서는 현직 배우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면, 연극도 알고 수어도 안다. 그러니까 이 감상문은 순진한 관객의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하고, 비교하고, 납득하고, 다시 의심한 사람의 기록이다.
수어연극 〈영지〉 4기를 예약했을 때, 내 안에는 기대보다 걱정이 먼저 앉았다. 농인 배우들이 몸을 쓰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건 걱정이 아니었다.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대사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까? 수어를 언어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아름다운 춤으로 소비해버리지는 않을까?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 하나. 연극이란 장르가 어디까지 수어로 가능할까?
이 질문들을 품고 나는 5월 3일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으로 향했다. 마치 면접관처럼. 아니, 정확히는 오랜 친구의 첫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처럼 -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90퍼센트지만 그래도 냉정하게 보겠다는 그 마음.

'단지'라는 부사 하나가 이렇게 묵직할 수 있다니. 나는 그 말을 한참 씹었다.

공연 시작 전 무대


출처 국립극단 홈페이지
4. 수어는 언어다 -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증명했다.
막이 오르자 내 눈은 바빠졌다. 수어통역사의 눈은 손을 먼저 쫓는다. 그런데 이 배우들의 몸은 손에서 멈추지 않았다. 손이 말하는 동안 얼굴이 함께 말했고, 몸 전체가 문장이 되었다.
농인 배우들은 판토마임에 가까운 신체 언어와 수어시(手語詩), 즉 수어문학의 형식을 능숙하게 활용했다. 그것은 수어가 단순한 손동작의 나열이 아니라 고유한 문법과 문학성을 가진 언어라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수어예술감독 이미선님이 인터뷰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나비가 날다'는 문장 하나도 손의 모양과 움직임으로 나비의 섬세한 날갯짓을 다채롭게 형상화할 수 있다고. 이론으로 알고 있던 것을 눈앞에서 보았다.
주인공 영지 역의 박지영 배우는 압도적이었다. 3년 전 이 작품에서 수어 통역을 맡았던 그가, 이번에는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다. 11살 아이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그를 보면서, 나는 배우로서도 혀를 내둘렀다. 단 1분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 연습실에서 플랭크와 복근 운동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효정 역의 이소별 배우도 인상적이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그는 달랐다. 순종적이던 효정이 영지를 만나며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을 수어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물 밖으로 나온 어린 물고기가 나에게도 투명 다리가 있었어 하고 외치는 장면'은 수어 특유의 표현력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소리가 없어도 목이 메었다.
조명도 놀라웠다. 모두예술극장의 첨단 조명 장치들이 수어 연기와 맞물리면서 무대를 빛나고 화려하고 환상적으로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각 언어가 주언어인 무대에서 조명은 단순한 분위기 연출이 아니라 언어의 일부가 된다. 연출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웃음도 있었다. 어른이 아이를 꾸짖는 장면에서, 영지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가 억울한 듯 다시 눈을 치켜떴다. 청인 아이라면 고개를 숙이겠지만, 농인은 시선을 피하면 대화가 끊긴다. 그 불가피한 눈맞춤이 반항처럼 보이는 농문화 특유의 개그 코드. 농인 관객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나도 웃었다. 이쪽 세계를 아는 사람의 웃음으로.

출처 국립극단 홈페이지
5. 게으른 해설사, 그리고 베리어 프리는 누구의 것인가
한 가지 내내 마음에 걸린 것이 있었다. '게으른 해설사'였다.
수어 연극이라는 본질을 지키면서도 청인 관객을 완전히 내버려둘 수 없다는 현실적 고민이 낳은 존재, 소리꾼 신유진이 무대 한 켠에서 판소리로 간간이 해설을 얹었다.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않았고, 판소리 특유의 질감이 수어 연기와 묘하게 어울렸다. 연출이 적절한 수위를 찾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만약 해설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동안 농인들이 청인의 세계에서 느껴왔던 그 답답함을, 청인 관객들이 잠깐이라도 체감해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언어를 모른 채로 그 세계에 던져지는 경험. 그래도 맥락이 읽히고, 감정이 전해지고, 어느 순간 손짓이 언어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 경험. 그것이 사실 이 공연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 아닐까.
하지만 나도 안다. 돈을 내고 온 관객에게 '장애 체험'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는, 예술가가 평생 씨름해야 할 질문이다. 이번 공연은 그 질문에 나름의 답을 찾았다. 나는 그 답에 80점쯤 주겠다. 나머지 20점은 다음 기수를 위해 남겨두겠다.
그 20점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공연 후 '예술가와의 대화'에서 영지 역의 박지영 배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지금까지의 베리어프리는 청인 중심이었다. 비장애인이 만든 세계에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방식이었다. 이제는 달라야 한다. 배우도 스태프도 장애인이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베리어프리다.
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어통역사로서, 수어 공연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무대에 서는 배우로서 - 세 겹의 마음으로.
6. 여기까지, 그리고 아직 더
〈영지〉는 '장애인도 볼 수 있는 연극'이 아니다. 농인이 주인공인 연극이다. 수어가 장식이 아니라 언어인 무대다. 그리고 그 무대를 보러 온 청인 관객들은, 처음으로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본다. 그 낯섦이 이 공연의 진짜 선물이다.
나는 반짝이는 손들의 박수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소리 없이 흔들리는 두 손이 객석을 가득 채우던 그 순간, 연극이 어디까지 수어로 가능하냐는 내 질문에 무대가 조용히 답했다. 여기까지. 그리고 아직 더 남아 있다고.

관객과의 대화(사회자, 작가-허선혜, 연출-김미란, 악마선생-하재성, 수어통역사)

(수어감독-이미선, 영지-박지영, 소희-금예지, 효정-이소별, 악마선생-양지은, 우지양)
*수어연극 〈영지〉 4기는
2026년 4월 30일부터 5월 10일까지 모두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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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