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으로 기억하다. 광복 80주년 화성시 만세길이 전하는 이야기
한 동 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장)
최근 곳곳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축소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똑바로 기억하고,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독립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치열한 외침과 피의 대가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번 광복절을 맞아, 우리는 다시금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단순히 ‘기념하는 것’에서 나아가, 구체적인 장소와 사람, 사건을 통해 독립운동의 생생한 흔적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 소개하는 글은 경기도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을 복원한 “화성3.1운동 만세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길은 단순한 탐방로가 아니라, 1919년 4월 3일 화성 우정면·장안면 일대에서 수천 명의 주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던 실제 경로를 복원한 길입니다. 이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그날 그 자리에서 외쳤던 독립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며,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할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입니다.
‘광복’의 진정한 의미는 기억 위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독립운동의 현장을 복원하고 계승하려는 지역의 노력에 주목하며, 이 글을 통해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저항임을 함께 되새겨보았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화성3.1운동 만세길이란?
화성3.1운동 만세길은 화성시 우정, 장안지역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당시 마을사람들이 걸으며 만세를 외쳤던 길을 역사적 고증을 통해 정비한 31km의 도보 탐방로를 말한다.
2000명이 어깨를 걸고 함께 힘차게 걸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소리로 천지가 진동했던 그날, 1919년 4월 3일 우정면 장안면의 삼괴반도 일대의 역사적 감동을 느끼며 걸어보는 길을 다시금 만든 것이 ‘화성3.1운동 만세길’이다.
화성지역은 일제강점기 민중 중심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지역이다. 특히 일본인 경찰 2명을 처단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한 사례였다. 즉 1919년 3월 28일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노구찌를 처단한 일과 4월 3일 우정·장안면 사람들이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를 처단 했던 것이다.
지역민들의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제암리, 고주리 학살과 마을들을 불태우는 야만적 만행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진 화성지역은 남다른 자부심을 지닌 곳이다.
특히 우정면·장안면 일대는 삼한시대 ‘상외국(桑外國)’이 있었던 곳으로 이후 상귀, 삼귀, 삼괴로 입말이 바뀌면서 삼괴반도(조암반도)로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의 만세시위는 어느 지역보다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사전계획을 통한 조직적이고 거국적인 연합 만세시위를 진행했다. 이는 종교와 계층을 초월한 대규모, 조직적인 무력항쟁이었다. 일제의 말단통치기구인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는 공세적 만세운동을 펼치며 삼괴반도(조암반도)를 승리의 기쁨으로 넘치게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쌍봉산에 올라 만세 소리 목청껏 외쳤던 그날, 100년 선조들의 우렁찬 만세소리는 독립을 위한 염원과 굽힐 줄 모르는 기상이었다. 가장 치열하고 격렬했던 승리의 항쟁지였던 그곳, 그날은 해방의 날이었다.
만세길을 만들다
1919년 4월 3일 화성의 우정면, 장안면 지역 30여 명의 만세시위 주동자들을 시작으로 인근 마을 주민 2,000명 이상이 참가하여 격렬한 시위가 진행되었다. 주곡리에서 시작해 옆 마을 화수리까지 시계방향으로 삼괴반도를 한 바퀴 돌며 하루동안의 해방구를 만들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즉 주곡리→ 석포리→ 수촌리→ 어은리(장안면사무소)→ 쌍봉산→ 조암리→ 화산리(우정면사무소)→ 한각리→ 화수리(경찰관주재소)를 돌면서 2,000명의 시위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칠 수 있었다. 이들은 어깨를 걸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들을 따라 마을 친구 이름을 부르며 함께 웃으며 힘차게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만세시위에 참가한 2,000명은 당시 우정, 장안면에서 집집마다 장정 한 명씩 나온 엄청난 숫자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장소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각 지역마다 3.1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시점과 일치하였다. 화성시는 3.1운동을 전국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만세운동을 펼쳤던 곳이라는 자부심에 더해 이를 기억하고 계승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일제는 야만적 탄압으로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폭행하고 잡아갔다. 그리고 이들은 ‘내란죄(內亂罪)’로 처벌하였다. 다른 지역 3.1운동 관계자들이 치안유지법위반이나 출판법위반으로 처벌받은 것에 비해 내란죄라는 중형으로 탄압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기억과 기록을 남겼다. 구술과 재판 기록을 통해 그날의 만세길을 복원할 수 있었다.
3.1운동의 의의를 살리고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2017년 11월 독립운동 유허지 정비 및 만세길 조성 연구가 시작 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2019년 2월에 화성3.1만세길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km 만세길에는 무엇이 있나
주요한 거점 마을을 따라 그때 그 분들의 마음으로 100년 전의 그 길을 다시 걷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접 걷는 화성3.1운동 만세길을 통하여 화성지역의 독립운동의 의의를 널리 알리고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화성3·1운동 만세길은 1919년 4월 3일 우정·장안 지역에서 만세를 외치며 걸었던 길과 역사적 현장을 복원한 길이다. 만세길은 총 31km로 이어져 있으며, 100여 년 전 독립운동가들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복원하고자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현재 만세길은 당시 길의 약 60% 이상을 복원하여 조성 되었다.
1919년, 만세를 외치며 걸었던 길에는 독립운동가의 집터, 생가, 관공서, 횃불시위 장소 등이 남아있어 그날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다.
<3·1운동 만세길 지도>
또한, 총 13개 스탬프 함을 마련해 주요한 포인트 지점에서 스탬프를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만세길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려는 노력이다.
스탬프는 1)만세길 방문자센터, 2)차병혁생가 3)개죽산 횃불 시위터 4) 백낙열 집터 5)수촌교회 6)옛 장안면사무소터 7)쌍봉산 8)조암리 9)김연방묘소 10)옛우정면사무소터 11)각리,죽리 12)한각리광장터 13)화수리 주재소터에 위치해 있다
한편 화수리에 방문자센터를 마련하였다. 예전의 보건소 지소를 리모델링하여 새롭게 방문자센터를 운영하여 31km 만세길을 종합적으로 안내할 수 있도록 했다.
우정읍 화수리의 오래된 옛 보건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조성된 방문자센터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9년에 문을 열었다. 만세길의 출발점이기도 한 이 곳은 선열들의 치열했던 투쟁을 함축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첨탑 형태의 외벽에는 화성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을 활용해 추모의 의미를 더했으며, 내부의 오래된 벽 위로 격자 형태의 구멍이 뚫린 새로운 벽을 쌓아올려 방문객들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심어주고 있다.
<화수리 화성3.1운동 만세길 방문자센터>
만세길 방문자센터는 건물 자체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두 차례의 세계적 어워드에 선정되면서, 전 세계에 일제의 참혹한 만행과 화성3·1운동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만세길 내 주요한 유허지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각 마을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집터를 정비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향후 과제
걷고 싶은 만세길이 되어야 한다. 쾌적하고 아름다운 마을길 조성에 마을주민들과 함께 노력해야 한다. 꽃과 나무를 심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있는 걷고 싶은 만세길이 되어야 한다.
화성시는 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조사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면서 과거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옛길을 복원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하는 작업을 통해 만세길 조성을 해나갔다. 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에 완료하여 더욱 뜻깊은 행사를 갖고자 했다. 옛 3.1운동 만세길을 복원함으로써 화성시의 독립운동 정신을 시민과 공유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조성된 화성 3.1운동 만세길은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걸었던 길을 60% 이상 복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코스가 길고 거점 사이 이동 거리 및 시간이 길어 일반 시민들이 탐방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한계가 있다.
탐방로를 시민들이 이용하기 위해서는 구간별 프로그램 및 콘텐츠의 기획 운영, 홍보, 시설 정비 등 다각적인 운영 및 보완 방안이 필요하다. 이에 단계적인 실행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화성 3.1운동 만세길 전 구간에 대한 현황과 실태 파악을 통해 탐방로 활성화를 위한 단기-중기-장기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구역별 단기 탐방코스를 개발 중이다.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이 화성3.1운동만세길을 탐방하고 체험하면서 3.1운동의 높깊은 역사적 의미를 깨닫는 지역적 명소로 거듭나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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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30
1. 헌법이 살아있다는 의미
헌법이 살아있다는 의미는 헌법에 정한 규범대로 헌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의 문제다. 헌법 자체가 주인이 아니라 헌법의 주인은 따로 있다. 헌법에 규범을 정한 주체는 주권자 국민이다. 헌법은 전문(前文)에서 그 주체가 ‘대한 국민’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헌법을 잘 지켜야 하는 대상은 모든 권력이다.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은 모든 권력이 주권자 국민의 뜻을 좇아 권력을 행사하도록 정한 법이다.
모든 나라의 헌법이 잘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유신 헌법 체제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은 일이 있었다. 물론 한참 전인 1974년 유신 헌법 체제에서의 일이다. 이른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1974. 1. 8.)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하하는 행위와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대법원은 이 긴급조치 제1호에 따라 위와 같은 형을 확정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헌법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표현의 자유, 그리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었다. 대한 국민이 주권자임이 헌법에 또렷이 새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헌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고 다른 내용의 헌법을 모색하는 일은 주권자인 국민이 보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가장 강력하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 중의 권리다. 그러나, 이러한 당연한 권리를 인정한 것은 2013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 제1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한, 39년이 흐른 뒤였다.
유신 헌법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는 경우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었고, 이러한 긴급조치는 사법부가 심사할 수 없다는 내용이 헌법에 있었다. 이렇게 보면, 헌법이 당연하게 주권자 국민의 관점에서 권력자를 통제하는 법이라는 말도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뭔가 다른 것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헌법을 제대로 만드는 일 그리고 헌법이 지켜지도록 하는 일의 이면에는 또 다른 버팀목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2. 12․3 비상계엄과 헌법
한국 사회는 1987년 이후 자타가 인정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 민주주의 체제 위에 그리고 그 민주주의 체제의 최고법이 현행 헌법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헌법에 따르면 계엄은 군사상 필요가 있어 군대를 동원하거나 경찰력만으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워 군대가 필요할 때 발동하는 국가긴급권이다. 2024년 12월 3일 그 누구도 계엄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윤석열은 국회의 탄핵소추 발의 또는 예산 삭감 등을 계엄 발령 이유로 삼았다. 뜬금없이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계엄을 선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리고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 국회와 정당 활동 그리고 정치활동 일절 금지, 모든 언론과 출판에 대한 계엄사 통제 등을 담았다. 국회 활동 금지의 조치로서 국회의사당에 군대를 투입했다.
윤석열이 오로지 국회를 겨냥한 것은 틀림없다. 바로 이 점이 12․3 비상계엄의 본질이 내란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판단은 윤석열에 대한 형사처벌이 재판으로 확정되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주권자인 국민이 결정할 몫이다. 국회는 대통령이 계엄이라는 국가긴급권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계엄 해제를 요구함을 비롯하여 대통령이 선전포고 등 군사적인 조치 전에 동의를 얻도록 할 정도로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유력한 헌법기관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를 할 때 헌법재판소에 탄핵을 소추하는 권한 또한 대통령을 견제하는 국회의 권한이다.
대통령이 국회 활동을 정지시키는 일은 국회의 견제 없는 독재를 하겠다는 것의 노골적인 의사 표시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도 국회해산권의 헌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국회를 해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많은 시민이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간 까닭이다. 그런데도 당시 여당인 국민의힘 원내대표인 추경호는 자당 소속 국회의원을 국회가 아닌 자당 당사로 소집했다.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가지 않은 국회의원들이 헌법적인 책임, 특히 일부는 형사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다.
1997년 4월 17일의 대법원판결(96도3376)은 12․3 내란 판단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노태우 등이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내란을 일으킨 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대법원은 헌법이 정한 민주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권능 행사 불가능은 사실상 상당 기간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포함한다. 내란죄가 성립되려면 폭동이 있어야 하는데, 비상계엄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위협을 주는 것이어서 폭동이 되는 협박 행위라고 확인했다.
대법원은 내란범을 넓게 인정한다. 내란에 관여한 가담자들이 비상계엄을 모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란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내란에 포함되는 개별 행위에 부분적으로라도 참여하거나 이바지했다면 내란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12․3 비상계엄이 내란인 점은 분명하므로, 이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함께 국가기구 내에서 비상계엄을 막지 못한 제도적 취약점이 무엇인지를 분석․평가하여 그 개선안을 도출해야 한다. 그것이 12․3 내란으로 질식사할 뻔한 87년 헌법을 다시 살리는 길이다.
3. 헌법을 살리는 방법
12․3 비상계엄 전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른바 ‘7공화국 개헌’을 말한다. 헌법에 공화국 표현의 등장은 5․17 내란 이후 80년 개정헌법에서 제5공화국이라고 규정한 것이 유일한 사례다. 누가 봐도 공화국이 아니었기에 그것을 가리기 위한 장식이었다. 그 이전 72년 헌법의 유신 체제 또한 공화국이라 할 수 없다. 5․16 내란 이후 62년 헌법 체제 또한 공화국이라 할 수 없다. ‘7공화국’ 표현은 대법원이 확고하게 부정했던,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 않은 내란을 정당화하는 일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한편 제왕적 대통령제를 문제 삼아 정부형태를 바꾸는 개헌이 헌법을 살리는 일인지 들여다봐야 한다. 칼 뢰벤슈타인이라는 학자는 헌법이 살아있는지를 옷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어떤 헌법은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잘 지켜지지만, 어떤 헌법은 몸에 비해 너무 큰 경우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헌법에 비해 몸이 자라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몸은 그 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체제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헌법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의원내각제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 안정된 복수정당제, 언론과 정치적 자유의 완전한 보장, 지방자치제의 확립, 정치인과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의 고도화 등을 말한다. 대통령제의 성공 조건으로는 정치인과 시민의 사회적 동질성, 권력 분산, 여론의 자유와 여론에 대한 존중 등을 꼽는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된다면, 대통령제든 의원내각제든 성공할 수 있다.
헌법이 위기에 빠졌을 때 주권자가 등장했다. 3․1혁명을 비롯한 항일독립운동, 제주 4․3항쟁, 4․19혁명, 반(反)유신 항쟁, 5․18 광주민중항쟁, 80년 6월항쟁과 7․8․9월의 노동자투쟁 등 많은 투쟁과 항쟁이 있었다. 문제는 다음의 일이다. 48년 제헌헌법은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도록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60년 헌법은 반민주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도록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87년 헌법은 62년․72년․80년 내란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지 않았다. 개헌한다면 진실 규명, 내란 행위에 대한 책임 추궁, 피해자에 대한 명예 회복과 배․보상, 사회적 기억, 재발방지책 마련 등 민주화를 확장하고 심화하며 공고히 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헌 이전에 국회에서 법률의 제정․개정․폐지를 통해 헌법을 살리는 법도 있다. 가장 쉬운 법률 폐지는 한 줄의 법률 제정으로 가능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은 이를 폐지한다.”라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법률’, “사형제도는 이를 폐지한다.”라는 ‘사형 폐지에 관한 법률’ 등이다. 다음으로 헌법을 고치기 전에 기본권을 강화하는 법률 개정도 할 수 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을 개정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차별금지법’, ‘생명 안전 기본법’, ‘블랙리스트 특별법’, ‘아동․청소년 및 학생 인권법’ 등을 제정하는 일이다.
헌법을 살리기 위해 그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다수이면서 약자 또는 소수자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곧 주권자고 헌법이다. 국회가 국회답게 일을 하려면 이들 주권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소리 없는 함성을 들어야 한다. 매일 공청회와 청문회를 열어 입법 작업을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굳이 헌법을 고칠 필요도 없이 헌법은 오래오래 잘 살아갈 수 있다. 헌법은 문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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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2
푸른솔합창단(광주): 2015년 6월 ‘합창’을 통해 민주 인권 평화로 상징되는 ‘광주정신’을 전달하고, ‘광주공동체’의 희망을 노래하고자 창단했다. 2017년, 2018년 창작 뮤지컬 ‘빛의 결혼식-임을 위한 행진곡’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615시민합창단(서울): 2009년 8.15행사 공연을 시작으로, 민족의 역사와 겨레의 삶에 수많은 아픔을 안긴 분단 장벽을 허물고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의 새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창단했다.
1987합창단(광주): 광주 전남의 1980년 5.18민중항쟁의 불꽃을 1987년 6월 항쟁의 횃불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헌법을 쟁취한 그 뜻을 노래와 합창으로 계승하고자 2018년 창단했다.
광주흥사단합창단(광주): 191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민족운동 단체 흥사단. 독립운동, 대한민국의 민주화, 청소년 계몽, 육성 운동으로 2017년 3월 창단, 형화와 자유를 노래한다.
박종철합창단(부산):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와 6월 항쟁의 정신을 기리고, 시민문화운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자 2016년 8월 16일 창단했다.
416합창단(경기 안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 일반 시민으로 2014년 창단됐다. 소외와 불의, 불평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에 함께 한다.
이소선합창단(서울):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의 영결식을 계기로 2011년 결성된 노동자 합창단이다. 서울시로부터 2020년 전문예술 단체로 지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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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항쟁의 연원 오월광주로 연어처럼 몰려오는 민주시민들. 고향 집 부모의 마음으로 뜨겁게 환영하는 오월 광주 공동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금남로에서 새로운 세계를 전망하다.
항쟁의 연원 5·18: 계엄의 밤, 장갑차 앞을 맨몸으로 가로막은 시민들의 용기는 광주 시민군의 헌신이었습니다. 남태령의 새벽, 고립된 농민들을 끝내 지켜낸 연대의 마음은 오월 어머니들의 사랑이었습니다. 한남동의 눈보라를 맞으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낭만은 민주대성회의 횃불이었습니다.
승리의 약속 5·18: 오월의 기억으로 내란과 맞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이 민주주의 승리의 염원을 안고 광주로 달려올 것이며, 광주 공동체가 고향 집 부모의 마음으로 뜨겁게 환영할 것입니다.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내란 청산과 민주 승리를 약속하는 축제를 펼칩니다.
미래의 표상 5·18: 5·18은 미래의 표상으로 승화할 것입니다.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민주국가, 국가 주권이 실현되는 자주 국가는 오월 광주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입니다. 계급과 계층, 성별과 세대를 넘어 누구나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대동세상을 오월 광주가 먼저 체험했던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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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6조회수 933
2025-03-21독도를 향한 의정의 물결, 경기도의원들의 특별한 동행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200리 외로운 섬하나 새들에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우리땅!
- ‘독도는 우리땅’ 가사 일부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 ‘홀로 아리랑’ 가사 일부
여기 누구한테 물어 여기가 우리 땅인데 별들에게 물어?
누구한테 물어 여기가 우리 땅인데 별들에게 물어? 너를 기다리고 있어 여기 독도리
- ‘독도리’ 가사 일부
10월 25일은 1900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한 날이다. ‘민간단체 독도수호대’는 독도 수호 의지를 표명하고 대내외적으로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0년 10월 25일을 ‘독도의 날’로 지정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는 민간단체에서 지정한 기념일로 현재로선 법령상 국가기념일은 아니다.
인터넷에 ‘독도’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여러 가지 기사들이 나온다.
日섬마을의 독도 도발…"14년만의 집회에 각료 참석하라"
'서면심의' 만으로 독도모형 철거, '경미한 사항'이라는 전쟁기념관
[채이는삶의현장] '독도 그림' 향한 뚝심, 결국 대박 터졌다…“내가 넣겠다는데 무슨 상관”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대한민국의 고유의 영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유권 분쟁 등 외교적 이슈와 독도 관련 각종 논란들이 대내외적으로 끊이질 않고 있다. 일본의 반복되는 역사왜곡과 영유권 침탈 문제에 강력히 항의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경기도의회는 2016년 의원동호회인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를 출범시켜 영토주권 수호와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추진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다. 더불어 반전⋅평화⋅인권운동 등을 통한 사회 변화와 공익 실현으로 진정한 시민사회로 이끌어내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1)는 광역의회 차원에서 독도수호와 나라사랑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자 2016년 9월, 민경선 前 회장(경기도의회 제10대 경기도의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순수 의원동호회이다.
현재 제2대 회장인 김용성 의원(경기도의회 제11대 경기도의원)을 필두로 20명의 경기도의원들은 바쁜 의정 활동 중에도 독도를 포함한 해양 영토 수호와 올바른 역사 인식 제고를 위한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표명해 오고 있다.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위원들은 다양한 의정활동을 펼치며 경기도를 대표하는 ‘독도지킴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강행한 ‘다케시마의 날’ 행사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일본 정부 관계자들의 망언에 반발해 2017년 2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 릴레이 피켓 시위를 벌였고, 2021년과 2024년에는 일본의 ‘다케시마의 날’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22년에는 경기도의회 신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천명하면서 과거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한 일본의 진정어린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내기도 했다. 2019년과 2020년 일본 초⋅중등 교과서에 ‘독도(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고 한 일본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를 강력히 규탄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또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침탈 야욕이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 2018년부터 매년 독도를 직접 방문해(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인 2021년과 2022년 제외) 독도 수호 결의를 다졌으며, 올해 10월에도 ‘독도의 날’을 맞이하여 독도 방문을 추진 중이다. 그 밖에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던 해인 2019년 독도는 물론, 중국 하얼빈의 안중근 기념관과 북간도 지역의 윤동주 생가, 봉오동전투 격전지 등 항일운동 독립유적지를 답사해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위로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독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 정담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2019년 10월에는 ‘영토주권을 위한 지방정부, 시민사회, 그리고 시민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열어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가 독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정책 방향 수립 및 지방정부의 역할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그 다음해인 2020년 7월에는 ‘찾아야 할 동해, 지켜야할 독도’의 저자 동해표기추진위원회 홍일송 위원장을 초청해 교과서 내 동해표기 법안 통과의 필요성과 독도지킴이 활동 등에 대해 교감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외에도 독도 관련 문화예술 행사를 열기도 하였다. 먼저, 일본군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주거복지시설인 ‘나눔의집’과 사단법인 영토지킴이 독도사랑회의 후원으로 2017년 11월 27일부터 12월 8일까지 경기도의회 1층 로비에서 ‘독도와 위안부 사진 전시회’가 열렸으며, 전시회 기간 중 ‘우리 땅 독도, 위안부 사과’를 주제로 붓글씨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이어서 2023년 10월 25일에는 ‘독도의 날’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독도, 경기도의회에서 마주치다!’라는 주제로 디어월, 입체사진전, 3D입체영상 관람, VR콘텐츠 체험독도 체험 전시회가 열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행사는 ‘독도의 날’을 맞이해 본회의장에서 울려퍼진 경기도의원들의 홀로아리랑 합창이다. 2019년 10월 15일, 제339회 임시회가 열린 본회의장에서는 경기도의회 의원들과 경기도청 합창단이 서로 손을 마주잡고 목소리를 모아 ‘홀로아리랑’을 합창했다. 경기도의원 모두가 한마음으로 독도 관련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경기도의회 공식 유튜브에 공개되면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독도의 날 맞이, 경기도의회 의원이 함께 부르는 홀로아리랑(출처 : 경기도의회공식 유튜브)
중앙정부와 집행부에 독도에 대한 제언을 하기도 했다.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회장인 김용성 의원은 경기도의회 제377회 임시회 제4차 본회의(2024. 9. 23.)에서 5분자유발언을 통해 역사 왜곡과 영유권 침탈을 일삼는 일본 정부에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덧붙여 경기도민과 도내 학생들의 올바른 국가관과 역사관 정립을 위하여 경기도청과 경기도교육청 내부에 영토 주권의 상징인 독도 조형물 설치하고, 독도에 대한 경기도민 인식 제고를 위해 ‘경기도 독도의 날’ 기념행사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는 ‘독도’ 수호 외에도 평화⋅인권 신장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왔다. 이에 지방의회 최초로 2018년 12월 14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베를린 미테구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아리’의 영구 존치를 위하여 올해 9월 23일부터 29일까지 독일을 방문해 독일 미테구의회 녹색당, 좌파당, 사회민주당 의원 등과의 소통, 미테구청에 ‘아리’의 영구 존치에 관한 성명서 전달, 수요집회 참여 등 세계의 평화와 인권의 위대한 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목소리를 외치기도 했다.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 회장인 김용성 의원은 “역사왜곡과 부정을 일삼는 일본정부의 만행을 볼 때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반드시 이를 바로 잡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며 “한ㆍ일 관계 개선의 선행조건은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의 회장으로서 일본의 역사왜곡에 맞서 대한민국의 고유영토인 독도를 수호하고, 나라사랑 기반을 다지기 위한 활동을 적극 추진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소회를 밝혔다.
1) ‘경기도의회 독도사랑⋅국토사랑회’는 회장 김용성 의원과 사무총장 임창휘 의원을 선두로 국중범, 김동규, 김성수, 김옥순, 김종배, 김철진, 김태형, 김태희, 서현옥, 오지훈, 유종상, 이병숙, 이재영, 이채명, 장윤정, 정윤경, 최효숙, 황세주 의원 등 20명의 경기도의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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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4
포즈를 취해 주신 안한수 화백
화성시 동탄 신도시, 계획도시라는 이름답게 반원 모양으로 구획 지어진 도로망과 빌딩 숲을 에워싸고 있는 부채꼴 모양의 반석산 둘레 한편으로 오산천이 흐르고 바로 옆에 ‘노작 공원’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원이 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뿐, 봄에는 고라니가 출몰하기도 하고, 청설모 같은 작은 산짐승과 오산 천변 자연 습지 쪽으로는 두꺼비와 뱀 같은 파충류, 백로와 청둥오리들이 종종 보이기도 하는 곳. 그곳 주변에 언제부터 새로운 미술전시관이 생긴 걸 알게 되었다.
‘미산 아트스페이스’라고 쓰인 그림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크기의 대작들이 걸린 그림들에 눈을 압도당할 수 있다. 그림이 주는 위압과는 다르게 동네 분들과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혹은 한켠에 마련된 작업공간에서 음악을 들으며 붓질을 하고 계신 소탈하기 그지없는 화가 선생님을 만나 볼 수 있는데 그분이 오늘 소개할 민중미술가 안한수 화백이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는 말에 자칭 화려한 백수, 안한수 화백이라며 능청스럽게 웃기신다. 1959년 생으로 32년 교직생활을 하시다가 2015년 2월에 명예퇴직을 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볼까 하는 생각으로 그야말로 화려한 백수 생활을 하고 계시다고 한다. 고향 광주를 떠나 2003년 경기도 분당 쪽으로 올라오셔서 교직생활을 이어가셨는데, 동탄으로 오신 건 은퇴 후 2020년에 옮기셨다고 하니, 코로나가 덮친 그 무렵 동탄 노작골로 이사 오셔서 꼼짝없이 몇 년간 갇힌 생활을 하게 되셨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이 끝난 지금은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하시고 계시는데 앞으로 갤러리 운영과 그림 작업에 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Q. 선생님 그림의 소재들도 예사롭지 않지만, 기법이 굉장히 섬세하다고 느껴지는데요, 이 점들은 하나하나 점으로 찍으신 건가요?
네, 일일이 붓으로 하나하나 찍은 겁니다.
제가 퇴직한 후로 그래도 와이프가 반대하는 퇴직을 했기 때문에 뭔가를 좀 보여줘야겠다. 작품으로 보여줘야겠다. 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말이 지금 저렇게 점으로 찍어서 그림 그리는 거지, 이게 아주 골병 들어요. 중노동에 골병드는 거예요. 눈도 안 좋고 그래서 퇴직한 지 2년 정도 지나고, 그러니까 2017년 정도부터 여러 가지로 몸에 이상 신호가 오더라고요. 갑상선 항진증 저하증부터 시작해서 위장병에다가 모든 게 한 번에 막 터지더라고요. 심지어 이 방아쇠 수지라고 손가락이 이렇게 안 펴지더라고요. 그것뿐만 아니라 어깨는 또 이렇게 굳어 가지고 어깨도 이렇게 올리지도 못하고, 막 이렇게 여러 가지로 이제 그때가 여기 분당에 살 때 여기 오기 전에 퇴직하고 2년 정도 지나서부터 이제 몸이 망가지더니... 어떻게 보면 너무 열심히 그림에 점을 찍었던 거죠.(웃음)
그리고 이렇게 예를 들어서 저런 문익환 목사 그림이 있다 하면 저 사진을 내가 어떻게 연출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신경도 많이 쓰고 고민도 많이 하다 보니까 또 이렇게 운동도 잘 안 하고 이렇게 웅크리고 이러다 보니까 위장도 많이 안 좋아지고 엄청 쓰리고 막 여러 가지로... 지금은 여기 동탄으로 이사 온 후로 많이 건강해졌어요. 지금은 좋아요.
특히나 이제 우울증까지 정신적으로 몸도 안 좋아지고 그러니까 예..
이게 퇴직하고 계속 혼자만 이렇게 처박혀 있고 작품 한답시고, 총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좀 불안하고 잠도 안 오고 이렇게 좀 자꾸 이렇게 다 허무해지고 막 그런 여러 가지로 안 좋더라고요.
이게 내가 뭘 위해서 또 이러는가 싶기도 하고 막 이렇게 사람 만나기도 싫고 그냥 쳐박고 그러다가 이쪽으로 이제 이사 온 후로 좀 변화를 준 거죠. 지금은 많이 좋아요.
Q. 음...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잠시) 선생님은 자기 스스로를 보시기에 어떤 사람 같으신가요?
저는 좀 세상을 멍청하게 산 것 같아요. 아무리 예술한다해도 그래도 자기 경영도 잘하고 이렇게 세상 시류를 잘 타고 그런 사람도 많아요. 그 좋은 교직에서 승진할 수 있는 그런 모든 기회도 그냥 다 외면해 버리고 내 생각은 그거 아니다. 그런 조건도 다 이렇게 뿌리쳐 버리고 또 그림을 그려도...
제가 그림을 별로 팔아본 적이 없어요. 제가 멍청하다는 게 죽도록 고생은 해요. 내가 스스로 아이고 난 왜 이렇게 어렵게 그림 그리는 거지? 이거 이제 보상을 좀 받아서 다시 그림 그릴 수 있는 어떤 힘을 이렇게 받아야 되잖아요.
그게 이제 뭐 인기를 얻는다든가 내지는 이름이 날린다든가 아니면 돈으로 누가 비싸게 사 간다고 한다든가 그런 뭐가 좀 작품에 대한 어떤 보상이 좀 있어야 되는데...
나는 그런 걸 거의 바라지 않고, 특히나 또 이 목적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표현을 해서 다른 사람한테 공감을 얻어내는 데 목적이 있어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게 사람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에요. 내 생각 내 사상을 이렇게 그려서 공감을 얻고 싶다 그런거에요. 이제 남북 분단 상황이 이렇다,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 인물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이런 걸 그려서 내 보여주고 싶은 욕심 뿐이지...
그러니까 좀 영악하게 살지 못하는 점이 좀 있어요.
내가 월급쟁이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정말 무능력자였을 거예요.
교사고 다행히 거기에 호구지책이 됐으니까 와이프한테 이 정도라도 대접받고 살지...
Q. 선생님 그림을 보면 개인화랑에 걸려 있을 그림은 아닌 듯해요. 대통령 관저나 기록관 이런 곳에 걸려 있어야 할 그림 같아요.
(웃음) 대통령 관저가 아니고, 어떻게 보면 기념관 개인의 예를 들어서 저기 김구 선생 기념관이라든가 안창호 도산전시관 이런 데는 이제 물론 가야 될 성격의 그림이기는 한데, 거기에 또 염두에 두고 그린 건 또 아니고.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린 거예요. 그리고 대통령 관저는 또 그래요. 이제 예를 들어서 대통령 관저 말이 나왔으니까 대통령 관저라면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좋아할 수 있는 그림을 걸어야 되겠죠.
제 그림이 그 정도의 깜냥은 안되고... 지금은 각자의 어떤 영역을 이렇게 존중을 해주지만 민중미술이 처음 생길 때만 해도 그것도 미술이냐 서로가 그랬죠.
홍범도 장군, 2016. 2. 안한수 작
Q. 선생님 전시회는 어느 정도 하셨나요?
전시회는 다섯 번 했는데 첫 개인전을 저는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했어요. 그만큼 제가 대학 다닐 때부터 솔직히 이 화가에 대한 열망이 상당히 컸어요. 상당히 컸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열린 전시회는 이제 여기서 화랑 열기 전에 국회에서 ‘국회 아트 갤러리’라고 있어요. 국회의원회관 1층 로비에. 그때가 2019년 6월인데 국회 사무처에 전시하겠다는 서류를 다 넣어요. 거기 넣어서 심사를 하고, 그때가 마침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이어서 제 그림이 독립운동가들 통일운동가들 그렸던 게 딱 그 컨셉에 맞았던 거예요. 특히나 저는 이런 걸 예상 안 하고 2014년 정도부터 이렇게 독립운동가들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너무 컨셉이 잘 맞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튼 유월의 작가라 해가지고 거기서 모든 전시 부대 비용 제공하고 한 달간 ‘국회 아트갤러리’ 내에서 했던 거죠.
거기에는 또 누가 사겠다는 사람 한 사람 전화 온 적이 있어요. 제가 안 판다고 했어요. 윤동주 그림을 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근데 보통 사람들과 제 생각이 다른 게 뭐냐면 저는 그림을 좀 아까도 말했지만 멍청하게 그려요. 이렇게 점을 찍어서... 쉽게 빨리 안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려요. 예를 들어서 아무리 작은 그림도 한 달 정도 이상 걸리는데 그것도 열심히 그리고 해서... 이게 사는 사람은 제 뭐랄까 노력을 제대로 안 쳐줘요. 싸게 가져가려고 하지. 그래서 아예 흥정도 안 했어요.
그리고 저는 또 이런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었어요. 나는 어차피 내 그림은 누가 살 사람들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또 뭐 이렇게 내 생각 그리고 싶은 것을 굽힐 생각도 없고 나는 계속 이렇게 그려갈 거야. 그렇지만 나도 언젠가는 내 그림들을 세상에 내보일 거야. 그래서 만든 공간 이런 공간이죠.
지금도 누가 사 간다고 하면은 제가 별로 그렇게 흥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먹고 사는 데 지장 없기 때문에. 솔직히 참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예요.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이렇게 마음 놓고 백수로 그림을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제 좀 자랑 같지만 연금이 있기 때문에... 다른 화가들한테는 좀 미안하죠. 그 사람들은 참 열심히 자기 소신대로 그리기 위해서 노동일도 하고 여러 가지 막노동도 하고 온갖 거 다 이렇게 해가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 많이 있어요.
안중근, 안한수 작
Q. 저번에 선생님께서 어떤 그림 스타일은 싫다고 하신 거 같은데...
아니, 뭐 싫다기보다는 그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거죠. 그건 이제 우리 많은 화가들 그림 그리는 사람들 중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에요. 이게 자기 캐릭터를 형성해야 돼요. 그게 또 프로고. 전시장에 갔는데 기법과 소재를 다양하게 내보였을 때 보통 사람들이 보면 이 사람 개성 있다 하는 거지.
대개 화가들이 자기 캐릭터를 관심사 있는 것을 집중적으로 해 나가는데, 문제는 당연한 결과이긴 한데 자기 복제를 너무 많이 하더라... 자기 그림 하나 그려놓고 비슷한 걸 또 그리고, 비슷비슷하게 그래서 이거나 저거나 막 계속 너무 복제를 많이 한다는 거고,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거죠.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팔리는데 뭐, 일반 대중이 좋아한다는데 계속해야죠. 그리고 저는 그래서 인물을 주로 그리기 때문에 인물이 이렇게 자기 복제하기는 쉽지가 않아요.
Q. 멋있으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일 계획은 무엇일까요?
제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이 공간을 만들었는데 혼자 또 사치 부리기에는 또 미안한 거예요. 미안하단 말이라기보다는 좀 유용하게 쓰고 싶은 생각인 거죠.
제가 미술 교사로 이렇게 32년 근무를 했고 또 아까 말했듯이 작품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 2세들 미술 교육도 그만큼 사람을 키우는 것도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행위이다. 그런 생각을 좀 갖고 있고 해서 여기가 미술하는 학생들의 미술 발표장이 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제가 이 개관할 때도 한마디 하라고 할 때 그랬어요. 저는 교사로서 교육에 굉장히 관심이 아직도 있다, 그래서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간에 자기 작품을 발표할 만한 학생이 있다면 여기 무료 대관을 하고 싶다 그랬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개인전 한다 하면 성인들 그림 잘 그리는 어른들이 주로 하는 일로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부모들 관심도 개인전을 시킬 정도의 어떤 열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어 영어 수학 같은 데 많이 관심 있고 해서 제가 좀 홍보는 합니다마는 아직 우리 애 이렇게 그림이 있으니까 여기 전시하고 싶어요. 하는 학부모는 아직 못 만났어요. 주변에 누가 있으면 알려주세요.(웃음)
Q. 선생님이 그리신 그림 중에 제일 아끼는 그림은 뭘까요?
가장 아끼는 그림은 가장 고생했던 그림이에요. 저 ‘웃대가리들’. 제일 고생했고 그다음에 저기 윤상원 열사가 주인공인 ‘임을 위한 행진곡’ 고생 많이 했죠.
그림 그리면서 뭐 근데 이게 제 작품이지만은 마음에 든 그림이 있고 마음에 안 든 그림이 있어요. 근데 이제 제가 의도한 대로 잘 표현된 것들은 80~90%는 마음에 들고 한 10%는 저건 좀 더 그려야지 고치고 수정해야 되겠지 하는 것도 있죠.
그러니까 현 시점은 당장 마음에 안 들죠. 예를 들어서 ‘살풀이’하는 것도 아직 미완성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어서 저 ‘살풀이’ 주제는 내가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
근데 제 의도대로 많이 안 나왔던 게 지금 뒤에 산들이 너무 그냥 첩첩이 파도처럼 되고 해 가지고 내 의도대로 안 그려졌다 하는 생각도 좀 들고... 고치면 마음에 들 거예요.
안한수 화백의 ‘웃대가리들’이라는 제목의 그림과 윤상원 열사의 초상화를 토대로 그린 ‘임을 위한 행진곡’
Q. 제 눈엔 모두 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져요. 저 혼자 보기 아까워서라도 안한수 화백님을 알리고 다녀야겠어요.
대동세상, 안한수 작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있었던 1979년, 광주 전남대 미술학도로 당당히 입학하여 청년예술가의 꿈을 키우려던 찰나 일어난 ‘서울의 봄’.
신군부의 군화발에 봄이 짓밟힌 그 해, 1980년 5월. 그 봄 한가운데에서 22살의 안한수라는 청년이 군인들의 총성에 쓰러진 친구들의 주검을 안고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 후의 시간들도 회복의 시간은 아니었다. 왜곡되고, 엄폐되고. 두 눈으로, 살아있는 피부로 다 겪었던 그날 그 시간들을 거짓으로 몰았던 억울한 시간들을 헤쳐오며 그의 붓끝은 어찌 아름다운 것만 그릴 수 있었겠나?
“우리는 다 봤는데... 우리가 겪었는데... 너무 억울하고 이게 진실은 밝혀져야 된다. 그때 미술하는 사람들도 사실 아름다운 것만 그릴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것은 우리 문제다. 생존의 문제다. 망월동 묘지에서 그림 전시를 한다든가 금남로에서 전시를 한다든가 그렇게 버텼어요. 경찰들에게 그림도 뺏기기도 하고 그런 과정이 우리의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주었죠.”
인터뷰 중에 나는 안한수 화백님을 재밌게 해드리려 애썼다. 예술가 특유의 우울질 성향의 선생님 고백이 가슴 아팠다.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한 시대의 아픔 또한 전해졌다.
내가 사는 동네, 예쁜 공원에 살고 계시는 자칭 화려한 백수이신 안한수 화백님을 이렇게 만나보았다. 사실 올해 서너 번은 그 화랑에 가서 화백님을 만나고 온 듯하다. 갈 때마다 매번 반겨주시고 따뜻한 음료를 내주시곤 한다. 이런 저런 수다를 떨다 그림이 잘 팔려야 할텐데 걱정을 하면, 오히려 괜찮다고 걱정하는 나를 위로해 주신다. 노작 공원의 ‘미산 아트스페이스’를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점묘파 화가로도 불리고 있는 안한수 화백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경기공익 웹진에 알릴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예술은 외롭고, 예술가 혼자와의 싸움이라고는 하지만, 누군가 그 싸움을 맘졸이면서 구경하다 파이팅을 외쳐줄 사람도 필요하지 않은가.
내가 사는 동네에 예술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발견한 일은 참 기쁘고 행복한 일 아닌가. 더군다나 이렇게 걸출한... 지금쯤 한 점이라도 사두지 않으면 몇십 년 후에는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은 그림을 그리고 계신 화가라면 더더욱...
화려한 백수 안한수 화백님을 만나 잠시 행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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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안녕하세요~ 3기 아카이브 에디터 심지입니다. 지난 2023년 9월 1일 ~ 7일은 양성평등주간이었습니다. 양성평등주간은 남성과 여성이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일·가정 양립의 실천을 통한 실질적 평등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정된 법정주간입니다. 2020년부터 기념하고 있는 양성평등주간은 양성평등기본법에서 명시하고 있는데요.
<양성평등기본법 제38조(여성의 날 등과 양성평등주간)>
“범국민적으로 양성평등 실현을 촉진하기 위하여 매년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하고,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1년 중 1주간을 양성평등주간으로 한다.”
그럼 올해 양성평등주간이 왜 9월 1일~9월 7일이었는지 궁금하시죠? 바로 9월 1일은 최초의 한국여성인권선언서의 의미를 갖는 여권통문이 발표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권통문은 한국의 근대적인 여성 인권선언문으로서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효시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1898년 9월 1일에 작성된 여권통문에는 여성의 교육권, 직업권, 참정권을 주장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여권통문의 영향력은 그 이후 국내 최초의 여성단체 ‘찬양회’와 한국 여성에 의한 최초의 여학교 ‘순성여학교’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권통문 주요 내용>
- 첫째,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교육은 남녀평등의식을 고양시키고 교육을 통해서 여성은 정치참여 의식, 직업의 기회를 가진다.
- 둘째, 여성도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다.
경제활동은 여성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독립된 인격 확립의 시작이다.
- 셋째, 여성도 문명개화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새롭게 변화하는 시대에 여성들도 개화정치에 등장해야 한다. 정치참여 의식, 직업의 기회를 가진다.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은 양성평등주간을 맞아 토크쇼, 포럼, 캠페인 등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는데요. 그중 9월 1일에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다녀왔습니다. 경기도민을 위해 열린 행사라서 무료로 참여할 수 있었고 현장에 함께하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 경기도청 유튜브에서 생중계되었습니다.
1부는 축하영상을 비롯하여 양성평등 유공자 표창과 퍼포먼스가 준비된 기념식 행사였습니다. 표창에 앞서 많은 분들의 축하영상이 준비되어 있었는데요.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양성평등, 모두가 행복한 경기도”라는 올해 경기도 양성평등주간의 슬로건처럼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 평등한 세상,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경기여성네트워크와 경기자주여성연대의 이은정 대표님께서 직접 축사를 해주셨습니다. “여권통문의 주장은 이미 법과 제도를 통해 실현되었지만 (중략)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 불평등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중략) 125년 전에 작고 조용한 혁명을 외친 여성들의 뜻을 기리며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경기도를 만드는 데 함께 힘을 보탰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해주셨고 모두가 박수로 화답하였습니다.
경기도 양성평등 유공자 표창은 8분이 받으셨어요. 화성시 양수연 주무관님, 경기신용보증재단 조정우님,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이현우님, 부천여성청소년재단 이지원님, 고양시여성기업경제인협의회 진은덕님, 경기도여성단체협의회 평택시지회 정영옥님, 경기도여성단체협의회 양주시지회 윤혜선님, 한국부인회 이천시지회 심정례님 모두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올해의 경기도 성평등대상은 화성시가 받았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평등한 사회를 위해 애쓰신 걸음들이 참 소중합니다.
2부는 청년과 함께하는 양성평등 이야기라는 주제로 토크콘서트가 진행되었어요. 토크콘서트 패널로는 개그맨이자 주부작가이신 이정수님을 모셨는데요. 책 “결혼해도 좋아”를 쓰셨고 지금은 육아대디로 살고 계신다고 해요. 토크쇼의 주 내용은 결혼과 육아였습니다. 특히 남성의 육아휴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요. 육아휴직을 신청할 때 회사에서 눈치가 보이지는 않았는지, 아이를 돌본다는 것에서 어떤 행복을 느끼는지, 주부남성으로 살아갈 때의 에피소드 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이정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요. 육아중인 전업주부가 월급을 받는다면, 요즘 민간서비스에서도 육아와 가사일을 동시에 해주시지 않으니까 각 200만원씩 계산했을 때 월 400만원은 받아야겠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러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돌봄노동, 가사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해보는 기회가 되어서 인상깊었답니다.
고용부에 따르면 2022년(지난해) 남성 육아휴직급여 수급자는 3만7,885명으로, 전체 수급자(13만1,087명)의 28.9%였습니다. 육아휴직을 활용하는 남성들은 해가 갈수록 점점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오픈서베이에서 발표한 ‘육아 트렌드 리포트 2023’에 따르면 어린 자녀의 육아는 여전히 여성이 주로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36개월 미만 자녀를 키우는 전국 30~44세 남녀에게 육아에서 본인의 담당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묻자, 여성 응답자의 86.3%가 본인이 전적으로 혹은 대부분 맡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와 달리 본인이 주 양육자라고 답한 남성의 비중은 14.7%에 머물렀습니다. 여성의 육아를 남성이 돕는 것이 아닌, 함께 하는 육아, 같이 하는 육아가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토크쇼 중간 중간마다 청년예술인패널 가수 하림님, 싱어송라이터 주환님의 짧은 노래 공연이 있어서 분위기를 한껏 즐겁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토크쇼의 마지막에 주환님께서 해주신 소감이 기억에 남는데요. 시대마다 민주주의, 인종차별철폐 등 중요한 어젠다가 주어지는데 지금 우리 시대에 주어진 어젠다는 양성평등이라고 생각하며, 이 어젠다가 이루어져서 없어지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하겠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로비로 나가보니, 역사 속 여성인물을 만나보는 ‘국립여성사전시관 순회전’이 열리고 있었어요. 가족법 개정운동으로 여성인권 향상에 기여한 이태영 변호사,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과 정정화,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여성운동에 앞장섰던 서양화가 나혜석 등 남성중심의 역사기록에 가려졌던 여성들을 재조명하는 전시였습니다.
이상으로 양성평등주간 기념행사를 다녀온 소감을 마치겠습니다. 9월 한주동안이 아니라 1년, 52주가 평등주간이라고 생각하며 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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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6
●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일본 내 항일 독립운동
‘디아스포라’는 자의든, 타의든 거주한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생활 터전을 옮기는 것을 말하며, 보통 ‘난민’을 지칭하기도 한다. ‘난민’은 이주한 곳에서 법적 보호는커녕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의 삶을 살게 된다. 현재에도 내전이나 전쟁으로 디아스포라가 생겨나고 있지만 대표적인 디아스포라는 재일조선인이다.
한일합방 후 약 200만 명(1945년 기준)의 조선인은 먹고살기 위해, 또는 일제의 강제 동원으로 일본으로 생활터를 옮겨왔다. 군수공장과 탄광, 철도 및 비행장 건설에 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으며, 내지인보다 훨씬 싼 임금과 차별로 일본 내 최하층민이 되었다. 또한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그들은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오는 9월 1일 간토(관동)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7월 4일부터 7월 8일까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알아보고 일본 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대지진은 일본 도쿄도를 포함한 관동지방에 대규모의 지진 발생과 9월 3일까지 3일간 지속된 화재로 약 10만여 명의 사망자와 200만여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그리고 이 아비규환 속에서 자연재해가 아닌 조선인을 상대로 한 학살이 함께 벌어졌다.
지진이 일어나자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형무소에 있는 조선인이 탈출하여 일본사람을 죽이고 있다.’라는 유언비어를 의도적으로 퍼트려 군대가 아닌 자경단이 조선인 학살의 주범이 되게 했다. 더구나 이러한 학살은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가담했으며 약 6천~7천 명의 조선인이 비참하게 죽어갔다. 또한 오사카, 교토, 가나자와, 도쿄지역을 돌며 일본에 대한 항일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갔다.
- 오사카지역 : 1907년 조선촌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츠루하시쵸157번지 에 ‘초센쵸’라는 한인 밀집 지역이 만들어진 후에 츠루하시역 부근에 한인 시장이 만들어졌다. 오사카에 거주했던 한인들은 텐노지 공원 등지에서 일제의 조선 총독 폭압 정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거나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끊임없이 했다.
- 교토지역 : 일제강점기 교토대학과 도시샤 대학을 중심으로 조선 청년들이 유학하여 조직을 결성하여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특히 도시샤 대학에는 윤동주. 정지용 시비가 있으며 이총(비총)공원에는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전리품으로 베어간 조선군의 코와 귀를 매장한 무덤이 있다.
- 가나자와 지역 :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 형무소가 있었으며 이곳은 상하이에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가 압송되어 순국한 곳이다. 또한 일제가 사형 후 몰래 암매장한 곳이며 이곳에는 ‘윤봉길의사 암장지적비. 순국기념비’가 있다.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었던 ‘누카다니’ 채석장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대동아성전대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도쿄 지역 : 도쿄는 일본의 수도이자 조선의 많은 지식인이 유학하고 독립투사들이 잠입하여 활발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이곳에는 ‘2.8독립선언기념비’와 2,8독립만세운동 당시 한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했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YWCA)터가 있다. 그리고 김지섭, 서상한, 이봉창, 양근한 의사의 의거지가 있으며 이봉창 의사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한 ‘이치가야 형무소’터가 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재일조선인 차별의 역사와 ‘윤봉길 의사’, ‘윤동주’, ‘간토대지진의 희생자’의 흔적을 찾아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우리 사회가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 우토로 마을 – 차별을 넘어 평화를 꿈꾸다.
첫 비행기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여 바로 ‘우토로 마을’로 향했다. 우토로 마을은 일제가 전쟁 중 1941년 교토에 군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만든 재일조선인 마을이다. ‘함바’라고 불리는 임시 합숙소에 모여 살면서 시작되었으며, 여기서 일하면 징병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이 마을로 모여들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른 지역에 살던 조선인이 우토로 마을로 이주했다. 이들은 ‘재일조선인 학교’ (우리학교)를 세우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와 전통을 가르치며 일본 정부의 오랜 폐교 압박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일본 내 최하층민과 재일조선인이 사는 우토로 마을을 없애기 위해 일본정부는 1998년에 토지의 소유권이 없다는 이유로 강제 추방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어 2000년에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로 주민들의 강제 퇴거가 확정되었다. 이에 많은 재일조선인이 우토로를 떠났고 삶터는 무너졌으며 2015년 기준으로 이 지역에는 약 150명의 주민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일본 및 한국 사회에 알려지면서 일본과 한국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우토로 땅 매입을 위한 모금’ 운동과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2010년 ‘우토로 민간기금재단’을 설립하고 우토로 땅을 매입하여 재개발을 진행했고, 2018년 원주민들이 다시 들어오면서 완전한 거주지가 되었다. 그 후 2022년에는 우토로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설립되어 차별과 혐오의 역사가 아닌 함께 평화를 꿈꾸는 곳이 되었다. 재일조선인 3, 4세들과 일본 시민단체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박물관에 상주하며 공존과 평화를 이야기한다.
함바(조선인 임시 숙소) / 우토로 평화기념관 전경
그리 크지 않은 3층의 우토로 평화기념관은 야외에 ‘함바(임시 숙소)’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었고, 각층에 우토로 마을의 고단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188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1876년 강화도 늑약으로 시작되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한반도 침탈 야욕에서 조선의 왕과 지배층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자신들의 안위와 사리사욕만을 위해 행동했던 그들은 외세를 한반도에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진짜 주인으로 살아왔던 백성들에게 총을 겨누고 삶과 삶터를 빼앗았다.
살길을 찾아, 또는 강제로 이주당한 조선인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 더 심한 차별과 혐오를 겪으며 살아가게 됐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혐오와 차별은 110년이 지난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를 가다.
서울 효창공원에 가면 4기의 독립운동가 묘소가 있다. 여기 안장된 4명의 독립운동가가 어떤 분들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엔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선생의 묘소와 1933년 중국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백정기 의사, 중국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사망케 한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 의거’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홍커우공원에서 공개처형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처형이 독립운동가와 현지 사람들에게 자극이 될까 두려워 그를 오사카 위수 형무소로 옮긴 후 사형을 집행하고자 했지만, 이곳에서 한 달 정도 독방에 감금한 후에 일본육군 제9사단 주둔지인 ‘가나자와’로 옮긴 뒤 다시 ‘미츠코지’산 육군작업장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당시 윤봉길의 거사는 중국인들의 대대적인 환대를 받게 되었고 이는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중국의 주석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불가능한 거사를 한국의 한 젊은이가 했다.”며 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독립 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처형 후 윤봉길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신을 화장했다는 일제의 발표에도 1946년 임시정부는 서상한을 대표로 하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을 조직하여 재일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게 된다.
형틀에 양손이 묶인 채 이마 정중앙에 한 발의 총알이 박혀 절명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노다산 육군 묘지 언덕과 시영묘지와의 경계에 있는 도로에 암매장하여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그 위를 지나다니게 했다. 나중에 이곳은 쓰레기 집하장이 되었고, 매장지 바로 위에는 작은 소각로를 세워 유해를 찾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재일조선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발굴된 유해는 1946년 3월, 거사가 일어난 지 14년 만에 ‘순국의사윤봉길지구’라고 표기된 새 관에 옮겨져 고국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책으로 읽는 역사와 직접 찾아가서 느끼는 역사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한숨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윤봉길 의사의 사진과 비석을 바라보니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발굴한 재일조선인의 후손인 이 보여주시는 발굴 당시의 사진을 보자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괘짝과 같은 상자에 구부리고 있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
시신에 대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사진에 일제에 대한 분노와 늦게라도 고국에 안장된 것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함께 올라왔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를 잊지 않고 끝까지 찾아낸 많은 재일조선인과 독립운동가, 팔십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윤봉길 의사의 업적과 더불어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리는 재일조선인 2세분의 헌신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하루아침에 해방이 된 것이 아니다.
사형집행 / 발굴된 윤봉길 의사의 유해 / 윤봉길 의사의 생전사진
● 강제동원의 현장 – 누카다니 채석장
더운 날씨를 피해 아침 일찍 ‘누카다니 채석장’으로 출발했다. 버스에서 내려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걸어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숲길 양쪽에 여러 개의 동굴이 보였다. 이 중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동굴도 보였는데 숲속에 웬 인공동굴인가 물어봤더니 연합군의 눈을 피해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서란다.
에도 시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누카다니’ 산간 지역에는 채석장이 수십여 개 운영되었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미쓰비시 중공업이 항공기 엔진공장의 건설을 계획하였고 기계설비가 일부 설치되었다.
대표적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 확대와 함께 성장한 독점 재벌이다. “미쓰비시 있는 곳에 전쟁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쓰비시의 광업과 중공업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였다. 한 예로 나가사키에 있는 미쓰비시 조선소에서는 당시 군함 82척과 어뢰 1만 7천 개가 생산되었다.
이러한 군수공장 시설 건설에는 일본 노동자보다 훨씬 싼 임금으로 강도 높은 노동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으며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도 약 6,000 천 명의 조선인이 강제 연행되어 노예와 같은 노동을 강요당하다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을 때 많은 조선인이 원폭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미쓰비시는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을 찾아낼 의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강제 동원까지 부인하고 있는 현실이다.
누카다니 채석장 소개글 / 미쓰비시 군수공장 터
채석장 올라가는 길, 산양인지 일본 사슴인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홀연히 나타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채석장을 올라가는 우리를 미동도 없이 한참을 내려다본다. 뭔가 익숙하게 전해오는 교감과 떨림이 어쩌면 식민지 조선 청년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 일본 우익의 상징 – 대동아성전대비, 야스쿠니 신사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양상을 맞게 된다. 진주만 공습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계속된 이 전쟁을 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고 한다.
반격에 나선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하고 1944년 사이판, 필리핀을 탈환한데 이어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일본 본토에 공습을 가했다. 결사 항전을 외치던 일본이었지만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무조건 항복에 조인하였다.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며 이 전쟁을 미화하고 정당화시키는 대표적인 상징물은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지와시 이시카와 호국 신사에 세워진 ‘대동아성전대비’와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이다.
‘대동아성전대비’는 폭 4m, 높이 12m로 2000년 8월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우익단체가 주축이 되어 건립되었으며 정면에는 일장기 모양의 붉은 원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전 세계는 천황 아래 한 집안’이라는 뜻의 ‘팔광위우’가 적혀 있다. 또한 이 비에는 대동아전쟁에서 천왕을 위해 죽은 이들의 이름과 단체가 새겨지는데 1945년 종전 직전에 전사한 조선인 7명의 이름과 조선계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단체 6개의 이름이 유족의 동의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새겨져 있다.
일본 제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는 1853년 개항 이후부터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쟁에서 숨진 246만 명의 전몰자를 신격으로 추앙하며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기 때문에 일본문화 혹은 일본 정신의 핵심이 되고 있다. 특히 이곳엔 태평양 전쟁의 1급 전범 14명과 조선인도 합사되어 있는데 한국 유족이 명단에서 빼달라고 요구해도 천왕을 위해 전사한 사람들이라며 일본 정부는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논란의 중심인 ‘야스쿠니 신사’보다 옆에 있는 ‘신이 노니시는 곳’이라고 불리는 ‘유슈칸 전시관’도 심각해 보였다. 가미가제를 수행했던 자살 폭격기는 물론이고 적함에 돌진하여 자폭하는 ‘인간어뢰’와 천왕을 위해 죽는다는 내용이 담긴 전사자들의 혈서 등 광적인 군국주의를 무수히 전시해 놓으며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
소년으로 보이는 전사자와 조선인으로 보이는 청년들의 사진 아래에는 천왕을 위해 장렬히 전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우리는 강제 징병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천왕을 위해 자발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고 한다.
대동아성전대비 / 야스쿠니 신사
● 재일조선인! 차별을 넘어 학살의 역사
간토대지진은 1923년 9월1일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10여만 명의 사상자와 수백만의 이재민이 발생한 사건이다. 이러한 재난으로 공포에 휩싸인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일제는 재일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을 제물로 삼았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약 6,000여 명의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학살에는 군인, 경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조직된 ‘자경단’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이 자경단에는 겨우 14~15세로 보이는 소년들도 가담했으며, 조선인뿐만 아니라 ‘15엔 50전’, 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오키나와인, 오사카인, 중국인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지른 전쟁범죄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일제가 같은 시기, 조선인에 저질렀던 ‘간토대학살’이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내용은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허망한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일본 사회에 진상규명과 사죄를 100년 동안 꾸준히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이다. 우리가 방문한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위령비’가 세워져 매년 시민단체의 주도로 추모식을 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일본 시민단체인 ‘봉선화’는 ‘조선인순국자추도비’를 세우고 이 사건을 자국의 사람들에게 알리며 일본인으로서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반성하고 사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인들이 관리하는 이곳을 방문하고, 희생자들에게 묵념과 비석에 술을 부어드리며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리고, 일본지역에서 항일 독립운동하다 구속되고, 고문받는 독립운동가와 국적도 참정권도 없는 신민 조선인을 위해 노력한 일본인들도 꽤 있었다. 특히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 변호사로 1923년 김시현 의사 등이 총독부 관공서 폭파를 계획하다 체포되자 이들의 공정한 판결을 촉구하며 변론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김지섭 의사와 영화로도 잘 알려진 박열 의사의 변론을 맡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1927년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체포된 권오설, 강달영 등이 일제 경찰의 고문을 폭로하고 고소를 제기할 때 소송을 담당하고 일본 사회에 실상을 알렸다.
위와 같이 조국(일본)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시위하는 조선 청년들을 변호하고 함께 행동한 ‘후세 다쓰지’와 간토대지진으로 희생된 재일조선인을 추모하고 조국의 만행을 알리는 ‘봉선화’와 같은 시민단체는 왜 이런 일들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자경단 소년 / 조선인순국자추도비 / 학살현장 아라카와강변에서 설명하는 봉선화 대표
출처 : 국가보훈부
● 민족시인 윤동주, 정지용 시비
교토 시내를 지나 붉은 건물이 눈에 띄는 도시샤 대학 내에는 이 대학에 재학하며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민족 계몽 활동 등을 펼치다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이 시비는 윤동주의 항일정신을 기리며 1995년 2월 건립되었으며 그의 대표작인 ‘서시’가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되어 함께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10m쯤 떨어진 곳에 또 한 명의 민족시인인 ‘정지용’의 시비가 자리 잡고 있다. 시 ‘향수’로 잘 알려진 시인 ‘정지용’은 발행 당시 큰 반향이 일었던 ‘정지용 시집(1938년)을 윤동주가 항상 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존경하던 시인이었다. 그리고 정지용도 소문만 듣고 만난 적이 없는 윤동주의 유작인 ‘쉽게 씨워진 시’를 경향신문에 소개하며 세상에 처음 알렸으며 이후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서문을 썼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한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정지용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불리는 윤동주는 이런 인연으로 모교인 도시샤 대학에서 시비로 나란히 기억되고 있다.
<정지용의 시를 모방한 윤동주의 습작품>
● 일본 내 항일독립유적지를 돌아보고.
역사 기행은 역사교육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게 해준다. 책이나 영상으로 느껴보지 못한 감성이 흔적만 남아있는 터만 보아도 그 시절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았던 사람들의 눈물과 결의와 비명이 눈가와 귓가에 맴돈다. 요즘 ‘이젠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래를 꿈꿔야 한다.’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망각 위에 세워진 미래는 과연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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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9
<1950. 6. 25. 잊히는 그날>
출처 : 전쟁기념관, 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recommendIdx=7231&division=img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시작. 휴전선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멈춘 한국 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 그날의 아픔과 슬픔,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6ㆍ25 전쟁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한국군, UN군, 경찰, 학도의용군 등 1백 17만여 명, 민간인 99만여 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가족을 잃은 전쟁고아와 나라의 모든 땅은 초토화되었으며 산업시설이 파괴되는 등 전쟁이 가져온 물질적 정신적 손해는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우리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남긴 전쟁이고, 아직 휴전인 전쟁이지만 6ㆍ25 전쟁은 어느새 국민들 사이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한국갤럽에서 2022년 6월 21~23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에게 6.25 전쟁 발발 연도를 물은 결과 성인의 60%만이 1950년이라고 정확히 답했다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나머지 40%는 연도를 잘못 알고 있거나, 아예 답하지 못했다는 결과를 밝혔습니다(신문고뉴스, 2022).
출처 : 신문고뉴스. http://www.shinmoongo.net/151914
<경기도 그날의 격전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그리고 민주열사들의 피와 땀의 결과입니다. 6.25 전쟁이 남긴 뼈아픈 교훈과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억하고 잊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날의 기억을 경기도 격전지를 통해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습니다.
출처 : 독립기념관. http://sajeok.i815.or.kr/i815/lists_edu/page/2?qs1=||||||||||||||||&qs2=|12|||||||||||&qs3=
독립기념관에서 운영하는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사이트에서는 6.25의 관련한 지역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검색조건에서 경기도 6.25 격전지를 보고자 ‘국가수호’, ‘경기’로 검색을 하면 66건의 검색된 지역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기도 전 지역에서 전투가 일어났지만, 그 중 파주, 포천, 연천 북부 지역이 편중되어 나타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출처 : 독립기념관. http://sajeok.i815.or.kr/i815/lists/?sf=|1||||%EA%B2%BD%EA%B8%B0&pp=10
검색 결과를 통해 제목, 운동계열, 지역, 현재의 상태, 종류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멸실 된 장소까지도 사진과 기록으로 정리되어 있어 사건에 대한 정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평택역 오폭사고지: 1950년 7월 3일 호주 공군기 평택역 오인폭격에 의해 전방에 공급될 보급품이 폭파되고, 역 건물이 파괴된 장소
출처 : 독립기념관. 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1903/page/1/sfl/all?sf=|1||||%EA%B2%BD%EA%B8%B0&pp=10
당일 오전 평택역에서는 국군 제17연대 등 전방에서 전투를 치르는 국군에 수송될 보급품의 하역작업이 한참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역 구내에는 탄약을 실은 기차 20량과 일반보급품 7량, 그리고 공차 10량 등이 대기하고 있어 우선 탄약부터 하역한 다음 트럭에 적재하려던 참이었다고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날 오후 3시경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한 호주 공군기 4대가 나타나 보급품을 실은 화차를 북한군으로 오인해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적재된 탄약이 연쇄 폭발하여 짧은 시간에 평택역이 파괴되고 시내의 건물과 인명에도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오인으로 인한 폭발은 수원 - 평택 간 도로 일대 전반에 영향을 주었고, 진지에 투입 중이던 국군 제17연대의 병력과 차량, 그리고 전방으로부터 남하 중인 피난민 대열에까지도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후 육군본부는 아군의 오인폭격을 막기 위해 긴급명령을 하달하여 백색 광목천이나 백색 페인트를 사용하여 아군임을 표시토록 하게 하였습니다(평택군지편찬위원회,『 평택군지』, 평택군, 1984, 505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3, 2005, 362-363쪽).
※ 화성 장안문: 1950년 7월 4일 전술상 파괴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보호를 위한 지휘관의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으로 폭파되지 않은 장소
출처 : 독립기념관. 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1831/page/1/sfl/all?sf=|1||||%EA%B2%BD%EA%B8%B0&pp=10
북한군의 남침 직후 국군 혼성 제2사단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전차가 수원을 향해 계속 남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육군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은 육군본부를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하기로 결정, 일부 병력을 남겨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 못 서게 하였습니다.
수원에 남게 된 잔류부대는 장안문을 중심으로 진지를 점령, 이 과정에서 공병감인 최창식 대령이 장안문을 공격하여 도로를 이용할 수 없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안양에서 철수 후 북문을 지나던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이 그 광경을 목격한 후 폭파를 만류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1950년 7월 4일 늦은 오후 북한군의 전차가 장안문 가까이에 나타나 전차포를 쏘며 공격하자 성루에 남아있던 병력이 큰 저항을 하지 못하고 그 저지선에서 철수하였습니다. 국군은 비록 철수했지만, 장안문은 일부만 피해를 입은 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3, 2005, 223쪽.;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197-202쪽.).
위와 같이 사진과 기록으로 한국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는데요. 지역에 관한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 지도와 지역 정보를 함께 담고 있어서,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에 어떤 역사 사적지가 있는지 확인 후 장소를 방문해보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수호 사적지 서울·경기>
출처 : 독립기념관. 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1831/page/1/sfl/all?sf=|1||||%EA%B2%BD%EA%B8%B0&pp=10
국가수호 사적지와 관련된 각종 콘텐츠가 모여있는 자료실에서 웹북을 만나보세요. 사이트에서 검색해서 자료를 찾아볼 수도 있지만 지역별로 잘 정리되어 있는 웹북으로 한 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국가수호 사적지 서울·경기’는 6.25전쟁과 관련된 국가수호 사적지 발굴 및 실태를 파악하여 사적지를 보존하고, 관리하여 활용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된 조사의 결과입니다. 정책 수립의 기초를 마련하고 국민적 관심과 교육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인데요. 문헌과 현지 사적지 실태조사를 통해 사진과 자료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웹북을 통해 아픈 역사 6.25, 나라를 위한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는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요.
<기억해야 하는 이유>
필자는 막연히 과거와 같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참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제2의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6.25의 교훈과 희생이 후손들에게 잊혀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안보와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그날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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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3
<젊은이?>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에서 출연자 송지효가 ‘젊은이’라는 이야기로 웃음을 안겼습니다. 평균나이 42세가 넘어가는 출연진들 사이에서 ‘우리 젊은이들끼리 회식하자.’는 내용에서 비롯된 단어 선택이었는데요. ‘젊은이’, 과연 우리는 누구를 젊은이라고 할까요?
출처: 유튜브_2023. 2. 13. #Runningman #런닝맨 #예능맛ZIP 런닝 MT 2탄.zip 《런닝맨 / 예능맛ZIP / RunningMan 》
<세상을 바꾸는 젊은이, 청년>
젊은이의 사전적 의미는 나이가 젊은 사람을 칭하는데요. 우리말 가운데, 어린이-젊은이-어른의 구분으로 알 수 있듯이 사회계층의 하나로 ‘젊은이’란 개념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근대 초기에는 ‘소년’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때 소년은 20세 미만의 학생 신분을 갖는 사회계층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보다 높은 연령층을 일컫는 말이 ‘젊은이’인데요. 이는 일반적으로 18∼30세 전후의 연령층을 의미합니다. 1920년대에 청년단체 가운데 ‘젊은이 모듬’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곧 ‘靑年會’를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출처: pixabay
역사적으로 젊은이들은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고 주도했었는데요. 3·1운동, 4·19의거, 광주와 부마의 민주항쟁, 6·10 민주화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 속에서 젊은이들은 앞장섰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 촛불을 들은 이도, 세월호 참사 때 촛불을 들고 단상에 오른 이들도 모두 젊은 청년들이 이끌었습니다.
<‘청년 삶 실태조사’의 시작>
지금을 사는 젊은이, 청년의 삶은 어떨까요? 2022년 청년 삶 실태조사 결과가 드디어 나왔는데요! 이 조사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청년기본법 때문입니다. 청년기본법은 2022년 2월 18일부터 시행된 법안이며, 청년기본법 제11조에 따라 청년의 실태를 조사하여 청년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조사 결과를 공표해야 합니다. 조사는 청년기본법에 따라 2년마다 실시하는데, 이번 조사 결과는 바로 첫 번째 조사 결과입니다.
2022년 청년 삶 실태조사는 2022년 7월부터 8월까지 만 19~34세의 청년 가구원을 대상으로 시행했는데요. 목표 표본은 15,000가구였으나 최종 분석에는 14,966가구, 14,966명의 청년의 응답이 활용되었습니다.
이번 조사에는 청년에 대한 일반사항, 주거, 건강, 교육·훈련, 노동, 관계·참여, 사회인식·미래설계, 경제 등 8개 분야, 200개 항목에 이르는 정부 최초 청년 삶 전반에 대한 조사로 정부의 공식 청년통계로 자리 잡게 된다고 합니다. 청년 정책을 개선, 발전시키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하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청년 삶 실태조사 주요 결과>
우리나라 청년가구 중, 청년이 가구주인 가구는 43%, 부모 등에 속해 있는 청년이 가구원으로 있는 비청년 가구주 가구는 57%의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교육수준은 대졸이 61.4%로 가장 많이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대학재학이 24%, 고졸이 14.6%을 차지하였습니다.
출처: 청년포털_[보도자료] 2022년도 청년 삶 실태조사 결과 발표
조사 결과 중, 주거 부분을 살펴보면 청년 중 부모와 동거하는 비율은 57.5%로 남자(59.7%)가 여자(54.9%)보다 조금 높게 나타났으며, 수도권에 거주하는 청년이 비수도권보다 부모와 동거하는 수가 높게 나타났습니다.
출처: 청년포털_[보도자료] 2022년도 청년 삶 실태조사 결과 발표
부모에게 독립하려는 구체적 계획은 67.7%가 없다고 응답하였는데요. 그 이유는 생활비 절약이 56.6%로 가장 높은 응답을 차지했습니다.
청년이 가진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한 인식 구조는 어떨까요? 삶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점수(0~10점)로 삶의 만족도를 조사해보니, 6.7점이 나왔습니다. 국민 전체 삶의 만족도 5.9점(’19~’21 평균, 통계청, 국민 삶의 질 2022)보다는 높게 나타났다고 하는데요. 행복감 6.9점, 자유로운 선택 6.9점, 사회에 대한 신뢰는 5.2점으로 나타났습니다.
출처: 청년포털_[보도자료] 2022년도 청년 삶 실태조사 결과 발표
경제 항목에서는 청년이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고 사회활동을 하는 데 영향을 주는 기본 사항들을 조사하였는데요. 생활비, 소득, 재산, 부채 등이 해당합니다. 생활비는 가구 단위로 묻되, 소득과 부채 등은 가구와 개인 단위로 조사하여 청년의 경제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자세한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청년이 속한 가구의 월평균 생활비는 303만 원, 지출항목으로는 식료품비(96만 원), 연금⋅보험료(32만 원), 교통비(27만 원), 교육비(24만 원)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청년 1인 가구의 경우를 살펴보면, 월평균 생활비는 161만 원, 지출항목은 식료품비(48만 원), 주거비(22만 원), 연금⋅보험료(13만 원), 교통비(12만 원) 순입니다.
출처: 청년포털_[보도자료] 2022년도 청년 삶 실태조사 결과 발표
이러한 조사 결과들을 청년 삶의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향후 청년 정책의 방향에 대해 논의할 때 사용되는 자료로 앞으로 꾸준히 조사하여 연구자료이자 정책자료로서 시계열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2022년 청년 삶 실태조사에 대한 연구보고서와 데이터 전체는 아직 공개 전인데요! 통계청의 품질점검을 거친 뒤, 각각 정책연구관리시스템 PRISM (https://www.prism.go.kr/homepage/)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https://kosis.kr/index/index.do), 마이크로데이터 통합서비스(https://mdis.kostat.go.kr/index.do)에 상반기 중 공개될 예정이니 참고해주세요.
<필요한 정보를 모아놓은 청년포털>
청년을 조사한 결과가 활용되는 곳, 바로 청년정책! 어떤 정책이 있을까요? 질문에 대한 답은 청년포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청년을 위한 맞춤 정보를 제공하고 청년들의 참여와 소통을 위한 창구기능을 하는 곳입니다.
출처:청년포털
정책 이름과 내용, 유형, 지역으로 상세 검색하여 원하는 청년 정책을 바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취업지원, 창업지원, 주거와 금융까지 필요한 정보를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출처: 청년포털_청년정책
지역별로 진행하고 있는 정책과 프로그램을 한 눈에 보고 싶으시다고요? 그렇다면 광역청년플랫폼으로 방문해주세요. 16개의 지역별로 운영되고 있는 사이트에 바로 연결이 되는데요! 경기도에 대해 궁금하다면 ‘경기청년포털’을 클릭해주세요.
출처: 청년포털_광역청년플랫폼
청년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와 참여기구 소개’부터 청년에 대한 최신정보인 ‘일자리, 자기개발, 주거, 법률, 정책정보 등’ 청년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 경기청년 마음상담소까지 청년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정보들을 모아서 제공하고 있으니 방문해서 필요한 정보를 알아가면 좋을 것 같아요!
젊은이, 바로 청년은 세상의 많은 변화를 이끈 존재였습니다. 청년이 건강하고 안전하다면 세상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더 건강하고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청년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참고자료>
청년의 역사적 등장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40_0050_0010_0010
[신영전 칼럼] 언제나 젊은이들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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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