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대받는 한 끼가 만드는 아이들의 ‘이바쇼’
‘어린이 식당’ 운동은 도쿄 외곽의 작은 동네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큰 재난으로 일본 사회는 어두워졌고, 아동 빈곤율은 치솟았다. 방학에도 돌봐줄 사람이 없이 배회하는 동네 아이들의 모습은 누구나 안쓰러웠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좌절감이 사람들 사이에 스며있었다.
그때 도쿄의 한 채소가게 주인 『곤도히로시』는 달랐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2012년 여름. 동네 아이들 몇몇을 자신의 채소가게로 불러 모아서 식사를 대접하고, 어린이 식당이라고 명명했다. 이 작은 실천에서 비롯된 움직임은 2026년 일본 전역에 1만 2천 개가 넘는 거점으로 확산되었다. 어린이 식당은 빈곤 아동만을 위한 급식소가 아니다. 어린이 식당은 아이와 어른, 이웃과 이웃이 밥상 공동체를 통해 무너진 지역 사회의 관계를 회복하는 ‘마을의 거실’이다.
이 운동의 핵심 키워드는 ‘이바쇼(居場所)’다. 이바쇼는 한국어로는 단번에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라고 한다. 장소를 뜻하면서도 내 모습 그대로 있어도 되는 곳, 평가받지 않는 곳, 기댈 사람과 믿을 만한 사람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또한 장소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람에게도 “당신은 나의 이바쇼입니다”라는 식으로 쓸 수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안식처’나 ‘비빌 언덕’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의 아이들 또한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코로나19가 남긴 가장 아픈 상흔은 ‘고립’과 ‘단절’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세상은 부모 외에는 믿을 사람도, 기댈 곳도 부족한 각박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학교 문을 나서면 돌봄 시설과 학원을 전전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영양분이 아니다. 자신을 온전하게 반겨주는 사람, 그리고 내가 이곳에 존재해도 좋다는 안도감, 즉 ‘이바쇼(내 자리가 있는 곳)’의 경험이다.

공릉동 ‘어린이 식당 작은 숲’, 마을의 느슨한 연대가 차려낸 식탁
서울 공릉동에서도 이 따뜻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어린이 식당 작은 숲’은 2011년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개설 이후 15년간 다져온 ‘꿈마을공동체’(다양한 사람과 단체가 느슨하게 연결된 지역 네트워크이며, 마을 교육공동체)의 자발적인 에너지가 응축된 결과물이다. 이곳의 식탁은 어느 한 기관의 힘으로만 차려지지 않는다. 지역의 작은 교회와 성당, 주민자치회와 작은 도서관, 학교와 복지관, 마을협동조합원 등에서 활동하는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식당을 열고 있다.



이곳의 식당은 2024년 말부터 매달 열리고 있다. 여러 단체가 힘을 모으고 있고,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책임을 나누니, 음식을 만드는 일은 1년에 한 번만 담당하면 된다. 완벽한 급식 서비스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어린이와 이웃이 만나 이야기를 꽃피우는 관계의 식탁이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은 ‘어린이 식당’이라고 표기한다. 오타가 아니라 ‘어린이’와 ‘어른’의 만남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을 기업 ‘나눔과 이음’은 알록달록한 비빔밥을 준비하고, ‘한살림 북서울노원지구’는 생명의 가치를 담은 정성 어린 주먹밥을 만든다. 시간을 내어서 일부러 방문한 주민자치회장님은 달콤한 디저트를 선물한다. 여기에 수공예 작가 모임인 ‘마디상회’는 라탄 바구니와 꽃병으로 식탁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소박한 한 끼지만 대접받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아이들의 얼굴은 싱글벙글 즐겁다. 친구와 함께, 부모님과 같이 온 아이도 있고 가끔 혼자 온 아이도 식당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외롭게 서 있다. 즐겁게 음식을 준비하고 어른들이 다가가 환대하며, “어린이 식당에 왔구나! 어서 오렴”이라고 다정한 말을 건 낸다. 청소년들은 손님으로도 오지만 ‘테이블 매니저’로도 함께한다. 동네 형, 누나들은 아이들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맵기는 어떻게 해줄까?”, “요즘 학교에서 재밌는 일은 뭐야?”라 물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내는 유능한 일꾼이 된다.

어린이 식당을 마치고,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작은숲 운영위원회
지속 가능한 어린이 식당 운동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
우리는 식당을 운영하며 일본 어린이 식당 운동본부인 ‘무스비에’가 정한 다섯 가지 원칙을 가슴에 새긴다.
첫 번째는 ‘자발성’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아이를 아끼는 마음과 베푸는 즐거움에서 스스로 시작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다양성’이다. 모든 아이의 개성이 다르듯, 식당 또한 엄격한 매뉴얼로 정형화되지 않고 운영 주체의 형편에 맞게 저마다의 색깔을 지닌다.
세 번째는 ‘포용성’이다. 특정 대상만을 위한 선별적 서비스가 아니기에, 저소득을 증명할 필요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네 번째는 ‘공익성’이다. 어린이가 영업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적 강요나 사익 추구의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
마지막은 ‘지역성’이다. 아이들이 돌봄 시설을 찾아 멀리 가지 않아도 골목에서 친구와 이웃을 만날 수 있을 때, 마을은 비로소 살맛 나는 공동체가 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원칙은 어린이 식당이 단순히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복지나 교육 서비스를 넘어, 평범한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작은 변혁(무브먼트)을 일으킬 수 있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실제로 이 원칙들은 식탁에 앉은 아이들과 식탁을 여는 이웃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공동체 식탁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파트 층간소음 갈등의 대상에서 반가운 ‘이웃’으로 전환된다. 일 중독과 빈둥지증후군으로 상실감에 빠져있던 중년의 시민들에게는 ‘사회적 양육자’라는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준다. 아이들의 미소로 연결된 시민들은 아동친화도시라는 행정의 선언을 살아 숨 쉬게 만들 수 있다.



어린이 식당 활동가 대회
어린이 식당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에너지는 공릉동을 넘어서 전국으로 번져가고 있다. 그 열기를 확인한 자리가 바로 2025년 10월 16일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에서 열린 ‘어린이 식당 활동가 대회’였다. 서울, 경기 뿐 아니라 제주, 부산, 대구, 광주, 충북 전국에서 어린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 어린이 식당을 해본 사람들, 어린이 식당 운동이 지역에서 펼쳐지길 희망하는 사람들 85명이 모였다. 그 사람들은 복지관 사회복지사, 청소년센터 직원, 협동조합 구성원, 일반시민과 학부모들로 다양했다. 우리는 이 운동의 확산 가능성을 실감했다.
이후 내가 일하는 노원구 지역에도 어린이 식당이 퍼져나가고 있다. 상계동에 위치한 청소년센터로, 경춘선 숲길 작은 도서관으로, 중계동 어린이도서관 근처 작은 공간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다. 타 지역에서 어린이 식당 사례를 듣고자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문턱을 낮추면 마을 곳곳이 식당이 된다.
어린이 식당은 거창한 전용 건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최고의 음식을 제공할 필요도 없다.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역시 작은 싱크대 하나로 식당을 운영한다. 마을의 문턱을 조금만 낮추면 우리 곁의 모든 공간이 아이들의 식탁이 될 수 있다. 낮 시간에 비어있는 주민센터 회의실, 마을회관, 작은 도서관, 동네 작은 교회나 성당, 심지어 학부모들이 모이는 작은 카페 공간도 훌륭한 식당이 된다. ‘누가 밥을 주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을 맞이하는가’이다.
마을 곳곳에서 식당이 펼쳐질 때, 아이들은 어른을 신뢰하게 되고 어른들은 아이 뿐 아니라 삭막한 이 도시를 함께 돌보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된다. 경기도 전역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모든 동네에 이 ‘관계 회복의 식탁’이 차려지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