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비영리 책무성: 우리 단체의 균형점
황인성(법무법인 동천 변호사)
책무성 하면 어떤 말, 어떤 느낌이 떠오르실까요? 우선 ‘책임’과 ‘의무’ 같은 법적인 용어들과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듣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말들입니다. 공익 증진, 사회적 가치의 창출을 목표로 당장의 산적해 있는 과제를 찾고 해결해 나가기도 바쁜 나날 속에서, 책무성이라는 단어는 뭔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갑갑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책무성을 영어로 번역할 때 흔히 accountability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계좌(account)나 회계(accounting)와 연관지어 ‘투명성’의 의미로 다소 좁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여러 단체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다 보면, 책무성과 투명성을 동일하거나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통상 규제기관이나 후원자(기관)에 정보를 공개하고 보고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재정상황과 지출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책무성 증진을 위한 활동은 곧 단체 바깥에서 가해지는 압력, 감시, 규제 같은 것에 대응하고 대비하는 행정 사무로, 오히려 본질적인 목표 달성이나 효과적인 사업추진에 지장을 주는 요소로만 여겨지기 쉽습니다.
책무성은 추상적이고,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학계에서도 세부사항까지 합의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단순한 준법이나 재정관리를 넘어, 비영리단체를 둘러싼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해관계자들의 관심과 욕구에 대응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념이 확장되어 온 경향은 분명합니다.
책무성(accountability)이라는 단어는 한글로 직역하자면 ‘설명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설명을 내놓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때의 설명은 뭐라도 아무 말이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계산과 사실에 근거하여 질문자를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말로 ‘설명하다’ 또는 ‘계좌’로 번역되는 ‘account’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4세기 무렵 ‘신탁 등으로 맡겨둔 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다,’ ‘돈을 계산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던 고대 프랑스어 동사 aconter에 어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설명한다는 것일까요? 이 세 가지 질문이 책무성의 여러 면면을 생각해보는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누구에 대한 책무인가? (to whom)
비영리단체의 활동에 대해 관심이나 이해관계를 갖는 누구나 질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직 외부의 이해관계자로는 기부자, 후원기관, 정부(규제기관), 파트너나 연대조직, 자원봉사자, 서비스 수혜자/이용자, 권익당사자, 언론, 넓게는 지역공동체와 일반 대중까지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조직 내부의 이해관계자는 조직의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구성원(사원, 이사 등), 사무직원 등이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책무인가? (for what?)
설명의 대상이 되는 책무의 내용을 분류하는 방식에도 여러 다른 견해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최대한 다양한 종류의 책무를 나열해보고자 합니다. 단계별로 나누어보자면, (i) 사업에 투입되는 자원의 관점에서, 재정, (봉사)인력, 평판자본이 적정하게 투여되고 관리되었는지 설명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ii) 사업의 수행과정에 관해서는, 법령을 준수했는지, 법인의 공식적 사명, 목적 등 정관의 내용을 지켰는지, 그 외에도 사업 과정에 비윤리적 행동이나 단체의 정당성을 훼손시키는 일이 없도록 관리하였는지가 문제될 수 있을 것입니다. (iii) 사업의 산출과 관련해서는, 생산하고 전달된 재화와 용역, 인식개선, 공동체 활성화나 지역재생 등 사회적 자본의 증가, 법령이나 정책에 미친 영향력 등이 화두가 될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자가 얼마나 단체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위계관계에 따라서(상향/하향), 외부자인지 내부자인지에 따라서 관심을 갖거나 설명을 요구하는 책무의 내용이나 비중도 달라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외부의 이해관계자 중에서도 자원봉사자, 파트너기관, 지역공동체, 대중 등에게는 절차(윤리, 정당성), 산출(사회적 자본과 정책적 영향력 창출)에 대한 책무가 강조될 수 있습니다. 기부자와 규제기관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자원의 투입, 특히 재정관리가 중요 요소가 될 수 있고, 한편 기부자와 수혜자, 권익당사자에게는 공통적으로 산출이 중요하게 고려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책무성을 구현할 것인가? (how?)
책무성 실현을 위한 흔하고 가장 기본적인 수단은 법령이 요구하는 재정이나 사업결과에 관한 사항을 공개/보고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법령상의 의무와는 무관하게 산출물 측정, 사회적 임팩트 측정 등 성과평가를 실시하고 결과를 공개하거나, 의사결정에 이해관계자를 직접 참여시키는 방안을 추가적으로 택할 수도 있습니다. 더 장기적인 산출의 측면에서, 비영리단체 내부의 학습촉진을 통해 변화하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적응하여 사명 성취, 성과 증진을 도모할 수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구현방식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대체로 책무성의 구현방식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인지(법률, 위계관계), 아니면 내부적인 사명과 동기에 의한 것인지, 상향적인지(기부자, 규제기관 등), 하향적인지(수혜자, 공동체, 파트너 등), 법률과 규칙의 준수에 그치는 것인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책무의 내용을 고려한 전략적 기획인지 등을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여전히 책무성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일은 어렵더라도, 준법, 재정투명성 확보 등 통상 ‘책무성’의 중심 개념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다양한 책무성의 모습 중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악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 책무는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고, 재원을 통제할 수 있는 기부자(후원기관)와 처분권한을 가진 규제기관을 주요 이해관계자로 하는 것이어서 ‘상향적’이며, 장기 전략과는 무관하게 당장의 규제 준수에만 초점에 맞추어져 있는, 매우 협소하고 기초적인 단계의 책무라는 것을 전체의 맥락 속에서 좀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협의의 책무성이라고 하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영리단체가 설립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성장기에 있을 때, 또는 오랜 기간 휴지기를 가졌다가 다시금 재정비하고자 할 때, 어느 때이든 법률 준수 및 재정관리는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책무이고, 특히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을 때 입게 되는 불이익과 평판 손실이 중대하여 단체 존립을 어렵게 할 우려가 있으므로 엄격한 관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단지 생존하는 것이 비영리단체의 목표가 되어서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법령과 규제의 준수 측면만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비영리단체가 여러 이해관계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가치를 고려한 조직 내 자원분배와 전략수립의 시기를 놓치고, 장기적으로 비영리 활동의 사회적 기여를 퇴색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책무성이라는 용어의 뜻을 ‘준법, 재정관리’ 정도로 축소하고 반복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규제당국이나 언론이 비영리의 투명성과 도덕성을 강조하고, 재정 비리나 위법 사안을 유독 부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 사안이 나타날 때마다 규제가 강화되고 점차 ‘협의의 책무성’ 분야가 홀로 비대해지며 또 다시 법적 위험이 커지는 악순환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당사자 아닌 이들이 먼저 나서서 책무성의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성격을 널리 이해해주리라 기대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책무성은 단지 일정한 요건이나 수준을 갖추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단체의 생애와 함께, 단체가 속해 있는 사회환경과 함께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책무성은 비영리단체가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물음에 응답함으로써 사회로부터의 신뢰를 유지하고, 자원을 확보하고, 단기적인 규제 준수와 장기 전략 사이에 자원을 적절히 분배하며,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에 발맞추어 조직과 역량을 쇄신하는, 부단한 ‘균형 맞추기의 과정’입니다. 이 짧은 글에서도 책무성의 의미를 충분히 담지 못한 것 같지만, 비영리단체, 종사자와 시민들이 먼저 보다 넓은 의미의 책무성을 이해하고, 일상의 언어 속에 반영하고, 사회 일반의 인식을 개선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