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헌법이 살아있다는 의미
헌법이 살아있다는 의미는 헌법에 정한 규범대로 헌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의 문제다. 헌법 자체가 주인이 아니라 헌법의 주인은 따로 있다. 헌법에 규범을 정한 주체는 주권자 국민이다. 헌법은 전문(前文)에서 그 주체가 ‘대한 국민’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헌법을 잘 지켜야 하는 대상은 모든 권력이다.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은 모든 권력이 주권자 국민의 뜻을 좇아 권력을 행사하도록 정한 법이다.
모든 나라의 헌법이 잘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유신 헌법 체제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은 일이 있었다. 물론 한참 전인 1974년 유신 헌법 체제에서의 일이다. 이른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1974. 1. 8.)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하하는 행위와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대법원은 이 긴급조치 제1호에 따라 위와 같은 형을 확정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헌법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표현의 자유, 그리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었다. 대한 국민이 주권자임이 헌법에 또렷이 새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헌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고 다른 내용의 헌법을 모색하는 일은 주권자인 국민이 보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가장 강력하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 중의 권리다. 그러나, 이러한 당연한 권리를 인정한 것은 2013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 제1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한, 39년이 흐른 뒤였다.
유신 헌법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는 경우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었고, 이러한 긴급조치는 사법부가 심사할 수 없다는 내용이 헌법에 있었다. 이렇게 보면, 헌법이 당연하게 주권자 국민의 관점에서 권력자를 통제하는 법이라는 말도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뭔가 다른 것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헌법을 제대로 만드는 일 그리고 헌법이 지켜지도록 하는 일의 이면에는 또 다른 버팀목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2. 12․3 비상계엄과 헌법
한국 사회는 1987년 이후 자타가 인정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 민주주의 체제 위에 그리고 그 민주주의 체제의 최고법이 현행 헌법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헌법에 따르면 계엄은 군사상 필요가 있어 군대를 동원하거나 경찰력만으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워 군대가 필요할 때 발동하는 국가긴급권이다. 2024년 12월 3일 그 누구도 계엄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윤석열은 국회의 탄핵소추 발의 또는 예산 삭감 등을 계엄 발령 이유로 삼았다. 뜬금없이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계엄을 선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리고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 국회와 정당 활동 그리고 정치활동 일절 금지, 모든 언론과 출판에 대한 계엄사 통제 등을 담았다. 국회 활동 금지의 조치로서 국회의사당에 군대를 투입했다.
윤석열이 오로지 국회를 겨냥한 것은 틀림없다. 바로 이 점이 12․3 비상계엄의 본질이 내란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판단은 윤석열에 대한 형사처벌이 재판으로 확정되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주권자인 국민이 결정할 몫이다. 국회는 대통령이 계엄이라는 국가긴급권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계엄 해제를 요구함을 비롯하여 대통령이 선전포고 등 군사적인 조치 전에 동의를 얻도록 할 정도로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유력한 헌법기관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를 할 때 헌법재판소에 탄핵을 소추하는 권한 또한 대통령을 견제하는 국회의 권한이다.
대통령이 국회 활동을 정지시키는 일은 국회의 견제 없는 독재를 하겠다는 것의 노골적인 의사 표시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도 국회해산권의 헌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국회를 해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많은 시민이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간 까닭이다. 그런데도 당시 여당인 국민의힘 원내대표인 추경호는 자당 소속 국회의원을 국회가 아닌 자당 당사로 소집했다.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가지 않은 국회의원들이 헌법적인 책임, 특히 일부는 형사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다.
1997년 4월 17일의 대법원판결(96도3376)은 12․3 내란 판단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노태우 등이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내란을 일으킨 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대법원은 헌법이 정한 민주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권능 행사 불가능은 사실상 상당 기간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포함한다. 내란죄가 성립되려면 폭동이 있어야 하는데, 비상계엄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위협을 주는 것이어서 폭동이 되는 협박 행위라고 확인했다.
대법원은 내란범을 넓게 인정한다. 내란에 관여한 가담자들이 비상계엄을 모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란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내란에 포함되는 개별 행위에 부분적으로라도 참여하거나 이바지했다면 내란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12․3 비상계엄이 내란인 점은 분명하므로, 이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함께 국가기구 내에서 비상계엄을 막지 못한 제도적 취약점이 무엇인지를 분석․평가하여 그 개선안을 도출해야 한다. 그것이 12․3 내란으로 질식사할 뻔한 87년 헌법을 다시 살리는 길이다.
3. 헌법을 살리는 방법
12․3 비상계엄 전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른바 ‘7공화국 개헌’을 말한다. 헌법에 공화국 표현의 등장은 5․17 내란 이후 80년 개정헌법에서 제5공화국이라고 규정한 것이 유일한 사례다. 누가 봐도 공화국이 아니었기에 그것을 가리기 위한 장식이었다. 그 이전 72년 헌법의 유신 체제 또한 공화국이라 할 수 없다. 5․16 내란 이후 62년 헌법 체제 또한 공화국이라 할 수 없다. ‘7공화국’ 표현은 대법원이 확고하게 부정했던,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 않은 내란을 정당화하는 일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한편 제왕적 대통령제를 문제 삼아 정부형태를 바꾸는 개헌이 헌법을 살리는 일인지 들여다봐야 한다. 칼 뢰벤슈타인이라는 학자는 헌법이 살아있는지를 옷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어떤 헌법은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잘 지켜지지만, 어떤 헌법은 몸에 비해 너무 큰 경우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헌법에 비해 몸이 자라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몸은 그 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체제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헌법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의원내각제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 안정된 복수정당제, 언론과 정치적 자유의 완전한 보장, 지방자치제의 확립, 정치인과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의 고도화 등을 말한다. 대통령제의 성공 조건으로는 정치인과 시민의 사회적 동질성, 권력 분산, 여론의 자유와 여론에 대한 존중 등을 꼽는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된다면, 대통령제든 의원내각제든 성공할 수 있다.
헌법이 위기에 빠졌을 때 주권자가 등장했다. 3․1혁명을 비롯한 항일독립운동, 제주 4․3항쟁, 4․19혁명, 반(反)유신 항쟁, 5․18 광주민중항쟁, 80년 6월항쟁과 7․8․9월의 노동자투쟁 등 많은 투쟁과 항쟁이 있었다. 문제는 다음의 일이다. 48년 제헌헌법은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도록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60년 헌법은 반민주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도록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87년 헌법은 62년․72년․80년 내란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지 않았다. 개헌한다면 진실 규명, 내란 행위에 대한 책임 추궁, 피해자에 대한 명예 회복과 배․보상, 사회적 기억, 재발방지책 마련 등 민주화를 확장하고 심화하며 공고히 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헌 이전에 국회에서 법률의 제정․개정․폐지를 통해 헌법을 살리는 법도 있다. 가장 쉬운 법률 폐지는 한 줄의 법률 제정으로 가능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은 이를 폐지한다.”라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법률’, “사형제도는 이를 폐지한다.”라는 ‘사형 폐지에 관한 법률’ 등이다. 다음으로 헌법을 고치기 전에 기본권을 강화하는 법률 개정도 할 수 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을 개정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차별금지법’, ‘생명 안전 기본법’, ‘블랙리스트 특별법’, ‘아동․청소년 및 학생 인권법’ 등을 제정하는 일이다.
헌법을 살리기 위해 그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다수이면서 약자 또는 소수자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곧 주권자고 헌법이다. 국회가 국회답게 일을 하려면 이들 주권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소리 없는 함성을 들어야 한다. 매일 공청회와 청문회를 열어 입법 작업을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굳이 헌법을 고칠 필요도 없이 헌법은 오래오래 잘 살아갈 수 있다. 헌법은 문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