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웹진」은 시민 기록 활성화를 위해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가 발행하는 참여형 아카이브입니다. 경기도 공익활동 현장의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콘텐츠의 내용은 뉴스레터 필진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필자의 의견과 관점이 담길 수 있으며 일부 내용은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명절이라고 모여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느낌은 아니지만, 연휴를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요.“
얼마 전, 한 청년을 만났다. 아동학대로 원가정을 나와 청소년쉼터에서 자란 그는 , 명절이면 고향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고 했다. 먼 지방에서 경기도까지 올라와 준 친구들과 한강에서 피크닉을 하고, 집에서 함께 음식을 해 먹으며 하루를 복작복작하게 채운다고 했다. 명절에도 이동이 쉽지 않은 친구들과 그렇게 시간을 함께 할수 있어 감사하다고 했다. 돌아갈 곳이 서로 다른 모양일 뿐, 그들은 서로가 집이 되어주는 셈이다.
"고향에 언제 내려가?" "가족들이랑 뭐 하기로 했어?“
명절이 다가오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인사를 나눈다. 별생각 없이 묻는 안부지만, 그 사이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누구에게나 돌아갈 집이 있고, 그 집에는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전제가 모두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아동학대나 가정 해체등의 사정으로 원가정 대신 보육원(아동양육시절), 그룹홈, 위탁가정, 청소년쉼터, 청소년자립생활관 등에서 보호를 받다가 성인이 되어 독립한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보호받은 유형에 따라 자립준비청년, 가정 밖 청소년, 무의탁 청소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명절의 무게는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찾아온다. 또 다른 청년은 오래 살던 시설이 문을 닫으며 낯선 곳으로 옮겨가야 했던 시간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터전이 바뀌어야 했던 경험은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었고, 한동안 누군가의 손길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그 시간이 그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시간이었다. 2023년 자립지원 실태조사(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자립준비청년의 고립·은둔 비율은 10.6%로 일반 청년 2.8%의 약 네 배에 달한다. 앞서 소개한 청년들의 경험은 개인의 특수한 사정이 아니다. 실태조사는 이를 수치로 보여준다. 연결될 기회 자체가 구조적으로 좁아져 있다는 뜻이다.
"일반 청년들의 경우에는 일이 있다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명절에 집에 안 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선택의 유무가 아니에요. 그냥 갈 곳이 없는 거예요. 명절이 허전하다는 건 많은 이들이 느끼지만 케이스 바이 케이스죠.“
명절마다 친구를 부르던 그 청년은, 저마다의 빈자리가 모두 같은 모양이 아니라고 말했다. 허전함이 자신의 선택이 아닌 주어진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는 곁에 있는 사람을 불러 그 시간을 함께 채운다. 관계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 만들어 낸다. 그것이 그가 명절을 버티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10명 중 2명은 연락두절”…자립 전부터 지원 나서야] 기사 캡처 / ⓒ KBS, 2025.05.15
"시설을 퇴소하는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사실 돈이 아니라 관계예요. 누군가 나를 지지해 주고 있다는 그 관계요.“
시설에서 오래 아이들을 돌봐 온 한 선생님의 이야기다. 이처럼 현장에서 청년들을 만나다 보면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시작하다가도, 결국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늘 마무리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관계를 쌓는 것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우리는 그 관계 쌓기를 언제까지 개인의 노력에만 맡겨두어야 할까.
지금의 자립지원 제도는 소관 부처와 시설 유형에 따라 대상이 저마다 다르게 나뉘며 지원의 유무가 정해진다. 같은 상황에서 독립을 시작하더라도, 어떤 청년에게는 자립 후에도 오래 곁을 살펴주는 안전망이 있고, 누군가는 그런 연결도 없이 홀로 사회로 나와야 한다. 지원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도움의 언저리나 그 밖에 머물러야하는 청년들이 생겨나는 구조이다.

자립준비청년 인터뷰 사진 / ⓒ 구준선 초록우산 사회복지사(청플 3기)
명절은 갑자기 누군가의 빈자리를 발견하는 날이 아니다. 어쩌면 일 년 내내 존재했지만, 저마다의 가족을 찾아 떠날 때 그 자리가 더 또렷하게 보이는 날인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추석에도 이 청년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명절을 보낼 것이다. 누군가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북적이는 하루를 채우고, 누군가는 자신이 자란 시설을 찾아가 함께 송편을 빚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방에서 혼자만의 그 시간을 건너고 있을지 모른다. 이번 명절에는 그들의 시간을 한번 떠올려보면 좋겠다. 저마다의 하루를 응원하고, 곁을 지키는 것. 그리고 아직 어디에도 닿지 못한 이가 무관심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처럼 그리 거창하지 않은 일이다. 동시에 그 관계가 개인의 노력에만 기대지 않아도 되도록 제도가 지금보다 더 넓어지기를 바란다.
〔필자 소개〕 구준선씨는 초록우산에서 근무하며, 자립 지원의 사각지대에 있는 아동·청(소)년을 위한 법·제도 개선 옹호 활동을 하고 있으며 경기도공익활동지원센터 청년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