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을 여는 첫 울림
무대 위 조명이 은은하게 번져가는 그 순간이었다. 막이 오르기도 전에 먼
저 찾아온 것은 북소리도, 춤사위도 아닌, 따뜻한 목소리들이었다. 영상 속
에서 흘러나오는 오랜 벗들의 인사말.
"고생 많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 짧은 말 속에 스며든 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함께 웃고 울었던
수십 년의 세월,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어온 험한 길들, 그리고 서로를 향
한 깊은 사랑과 믿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뜨
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굿판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구나. 사람과 사람을 잇
는 마음의 장단이 벌써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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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 신명, 그 첫 만남의 떨림
첫 번째 마당, 진도북놀이가 시작되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북채가 가죽
을 때리는 그 순간, 마치 심장이 한 박자 더 뛰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장
단이 울려 퍼질 때마다 객석의 모든 이들은 하나가 되어 몸을 흔들었다. 나
역시 어느새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고, 발끝까지 전해지는 진동에 온몸이 깨
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1985년 경기대 풍물패 '얼마당'의 청년 이성호가
상상이 되었다. 스무 살 청춘이 처음 북채를 잡았던 그 떨리는 순간부터, 지금 이 무대에 서기까지의 40년. 그 긴 여정이 장단 하나, 하나에 스며들
어 있었다. 풍물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숨결이자,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영혼의 다리였다. 그 인연이 이제는 무대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제2장 ― 해린, 그 이름에 깃든 이야기
지승 스님이 정성스럽게 지어주신 ‘해린’이라는 호에는 잔잔한 물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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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햇살이 반짝이며, 만들어내는 물비늘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파도와 햇살이 끝없이 춤추고 있는 것
처럼 이성호에게 ‘해린’이라는 호는 어울렸다. 두 번째 마당 소리굿에서 그는 정말로 해린 그 자체가 되었다. 거친 목소
리에 실려 나오는 살아온 이야기. 풍물 굿패에서의 추억들, 민주주의의 거
친 현장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풍물의 울림, 동지들과 어깨를 맞대고 춘
그 수많은 밤들을 보는 듯했다. 소리 하나, 하나가 삶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애틋하게, 때
로는 당당하게, 때로는 그리움에 젖어 들었다. 무대를 채우는 공기마저 그
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같았다. 굿은 단순한 흥겨움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살아온 모든 순간을 품고, 앞으로 걸어갈 희망을 노래하는 깊은 언
어였다.

제3장 ― 예의 길, 사랑의 춤
세 번째 마당 부포 춤이 시작되자, 나는 숨을 멈췄다. 하얀 부포가 공중에
서 꽃잎처럼 흩날릴 때마다, 무대 전체가 환상적인 빛으로 물들었다. 부포
는 살아있는 것처럼 춤췄고, 그 속에서 이성호라는 사람의 영혼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굿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그 소중한 가르침이 부포의 원을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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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궤적마다 새겨져 있었다. 예술(藝)의 길을 걸으면서도 사람을 향한 예
(禮)를 잊지 않았던 삶. 기교를 뽐내기보다는 마음을 전하려 했던 춤사위. 부포가 하늘 높이 치솟을 때마다 나의 마음도 함께 날아올랐다. 이것은 단
순한 춤이 아니었다. 한 풍물꾼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깨달음의 결정체였
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삶에 대한 다짐이었다. 객석의 모든 이들이 그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제4장 ― 삶의 터, 함께하는 울림
마지막 판굿이 시작되자 무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다. 함께한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어 장단을 풀어내는 그 순간, 신명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
만, 이 판굿은 그저 흥겨운 마무리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너무나 깊은 의
미가 스며들어 있었다. 매향리의 그 메마른 땅에서, 대추리의 눈물 젖은 들판에서, 용산참사의 아
픈 현장에서, 세월호의 차가운 바닷가에서.... 그 모든 곳에서 풍물은 늘 사
람들과 함께 울었다. 억울하게 떠난 영혼들을 기리고, 더 평등한 세상을 꿈
꾸며, 목소리 없는 자들의 외침을 대신했다. 굿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었다. 삶이자 투쟁이었고, 위로이자 연대였다. 무
대 위에서 터져 나오는 장단 소리는 곧바로 광장과 거리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써 내려온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역사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판굿은
진정한 '삶의 터'였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 한 사람의 발자취, 모두의 기억
공연 내내, 그리고 여운이 가시지 않는 지금까지도, 나는 이성호라는 사람
이 걸어온 길을 떠올린다. 1988년 수원 민주 문화운동연합에서의 첫 발걸음
부터, 문화공간 삶터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만남, 풍물굿 패 삶터에서 함께
만들어온 수많은 감동의 순간들. 정월대보름마다 이어온 지신밟기, 겨울밤을 따뜻하게 만든 달집 축제, 새해
를 맞이하는 해맞이 축제까지. 30여 년 동안 지역의 굿판을 이끌어온 그 모
든 발자취가 오늘 무대 위에서 되살아났다. 매향리와 대추리, 강정마을, 용산참사, 세월호 현장에서도 절대로 멈추지
않았던 풍물의 울림. 심지어 러시아, 일본, 베트남, 독일까지, 국경을 넘어서
도 굿의 감동을 전해온 그 놀라운 여정. 그의 삶은 예술이었다. 동시에 치열한 운동이었다. 무엇보다 사람과 함께
살아온 아름다운 연대의 역사였다. 그 모든 것이 오늘 밤 한 무대 위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 객석에서 흘러나온 진심
공연 내내 객석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힘찬 박수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 무대 위의 주인공만큼이나 객석에 앉은 이들도 특별했다. 이성호와 함께 세월을 살아온 소중한 벗들, 같은 길을 걸어온 동지들, 그리
고 그의 굿을 사랑해 온 모든 사람이었다. 함께한 인연들이 보내는 뜨거운 눈물과 환호는 굿판을 더욱 벅차게 만들
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이들이 하나의 큰 굿판 안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그 가운데 앉아 있던 나 또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뜨거운 울
림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공연을 보았다'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경험이었다. 한 사람의 삶 전체가, 그 삶과 함께해온 공동체의 소
중한 기억들이,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일궈온 민주주의의 역사가 굿판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 늦은 깨달음과 새로운 다짐
공연이 끝나고 여운에 젖어 있던 나는,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오늘 무대
에서 풍물을 치던 그 사람이 바로, 수많은 현장마다 늘 앞장서서 함께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음을 기억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무지함이 부끄러웠고, 그런 나 자신이 미안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다짐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소
중한 현장에서, 그와 함께 더 자주 마주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앞섰다.
"굿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나금추 선생님의 그 소중한 가르침처럼, 이성호의 굿은 앞으로도 사람과
사람을 잇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며,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울리면서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는 더 평등하고 안전한 세상을,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며 살 것이다. 그의 건강한 모습을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그의 굿이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심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